처칠의  ‘다키스트 아워’ 영국의  ‘다키스트 아워’
처칠의  ‘다키스트 아워’ 영국의  ‘다키스트 아워’
  •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 승인 2018.03.05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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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영국인들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윈스턴 처칠을 우선적으로 지목한다. 재미있는 건, 영국인들만이 아니라 유럽인들도 그런다는 사실이다. 유럽연합이 유로라는 단일통화를 통해 정식으로 유럽인들을 묶기 시작한 2002년에 실시된 ‘19세기 이후 가장 위대한 유럽인’ 설문조사에서 처칠은 1위를 차지했다.

그가 6년 가까이 지속된 대(對) 나치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유럽도, 유럽의 번영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처칠이 구해낸 것은 영국만이 아니었다. 히틀러가 지배하는 세상은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너무나도 생생하게 묘사한 노예들의 세상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세상은 유럽 땅에서 멈추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처칠이 항상 존경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 처칠 역시 오랜 정치 경력 동안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 총리가 되기 전까지 처칠은 영국 정계의 말썽거리였다. 20세기 초 자유당 내각에서는 복지국가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을 주도했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해군장관으로서 갈리폴리 작전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큰 희생을 야기했다.

특히 영제국의 영광을 유지하려는 그의 완고함은 간디가 이끈 인도 민족운동과 심각하게 대립했고, 영국의 ‘문명화 사명’에 따르기를 거부한 식민지인들은 처칠로부터 모멸적 언사를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역사에 남은 처칠의 궁극적 이미지는 영국과 유럽을 나치즘으로부터 구해낸 영웅이다. 그 한 가지만으로도 처칠은 위대한 인물로 존경받는 것이다.

위스키와 시가 담배에 절어 있던 그는 조급하고 고집 세고 독단적이었지만 바로 그런 성정 덕분에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전쟁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처칠의 위대함은 특히 전쟁 초에 발휘되었는데 영화 ‘다키스트 아워’는 그 때를 조명한다. 이 글에서도 전쟁 지도자로서의 그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위대한 지도자 처칠

처칠이 수상 직을 넘겨받은 1940년 5월의 시점에서 영국은 마치 대양 한가운데 홀로 돛단배에 버려진 사람과 마찬가지 상황에 처해 있었다. 유럽 대륙은 거의 히틀러의 손에 넘어가 버렸고, 스탈린은 바야흐로 히틀러와 조약을 맺고 땅 따먹기에 몰입하기 직전이었으며, 미국은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휘말릴까봐 조바심을 내며 나 몰라라 하고 있었다.

영국만이 홀로 남아 사악한 나치 정권에 대항하며 버티고 있었다. 그처럼 어려운 순간에 영국과 전 세계의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 바로 처칠이었다. 프랑스가 항복한 1940년 6월부터 진주만 폭격 후 미국이 어쩔 수 없어 참전하게 된 1941년 12월까지 18개월 동안 처칠은 혼자서 자유를 위한 인류의 투쟁을 이끌었다.

영국에게는 동맹국도 없었고 무기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영국에는 신념과 용기와 행동으로, 그리고 사람들의 혼을 감동시키는 연설로 무장한 윈스턴 처칠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3일 시작되었다. 1933년에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가 국제법과 조약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독일을 재무장시키고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는 등 온갖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동안 유럽 정치인들은 전쟁이 터지는 것만은 막아보자는 생각에 그의 만행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러나 뮌헨협정(1938년 9월)에서 합의한 대로 주데텐란트 만이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집어삼킨 히틀러가 폴란드까지 침공하자 영국으로서는 더 이상 물러설 여지가 없게 되었다. 막상 선전포고 후 여러 달 동안 전투는 별로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1940년 4월 9일, 갑자기 독일군이 총공세를 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고 곧이어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을 넘어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5월 10일, 나치군의 프랑스 공격이 시작된 날, 체임벌린 정부가 불신임되고 65세의 처칠이 수상 직에 올랐다. 1920-30년대 영국 사회에서 처칠은 외로웠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더 이상의 전쟁은 용납할 수 없다는 반전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그만큼 1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가 컸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는 히틀러가 등장해서도 바뀌지 않았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총리 체임벌린과 외무장관 핼리팩스로 대변되는 유화적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유화주의의 절정은 체임벌린이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기라는 히틀러의 요구를, 당사자이며 주권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물어보지도 않은 채 수용하고는 ‘세기의 평화’가 약속되었다고 주장하며 국민의 환호를 들을 때였다.

오직 처칠만이 히틀러와 나치즘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고 군비 확장을 주장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광야의 외로운 외침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그를 전쟁광으로 비난할 뿐이었다. 반면 처칠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잔혹한 사기꾼에게 계속 당하고만 있는 체임벌린과 같은 종류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역사는 누가 옳았는지를 보여줬다.

패배를 승리로 바꾼 덩케르크 철수작전

총리가 된 처칠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프랑스 덩케르크 항구에 포위된 채 남겨진 35만 명의 영국과 프랑스 병력을 철수시키는 일이었다. 이 소개 작전은 5월 28부터 6월 4일 사이에 650 척이 넘는 온갖 종류의 배--개인 요트, 유람선을 포함--를 총동원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영국인들의 기억의 터전에 확고히 자리 잡은 ‘제국의 가장 위대한 시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철수 작전은 실은 패배 후의 후퇴였지만 오히려 ‘도덕적 승리’로 포장되면서 영국인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고집스레 그 과정을 지휘한 것은 처칠이었다. 핼리팩스를 위시한 정부 내 유화론자들은 독일이 유럽을 지배하는 대신 영제국을 손대지 않겠다는 히틀러의 꼬임에 넘어가 협상에 임하라고 성화였다.

그러나 처칠은 그것이 히틀러의 또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함을 알고 있었다. 히틀러가 한 약속이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은 1941년 6월에 스탈린과 맺은 독소조약을 무시하고 독일군이 소련에 진군했을 때 명백히 드러났다. 덩케르크 소개 작전이 마무리되고 얼마 안 있어 프랑스가 결국 독일에 항복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당장 독일 손에 넘어가게 된 프랑스 함대 문제가 대두했다. 당시 프랑스 함대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함대 중 하나였고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전함들은 북아프리카 해안에 집결해 있었다. 처칠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독일에 항복하는 경우에도 함대는 절대 넘겨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일부 비점령지역을 그들 통치에 남겨주겠다는 히틀러의 제안에 솔깃해 함대를 독일군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함대가 독일 측에 넘어가는 순간 영국 침공이라는 사태가 벌어질 것은 명약관화였다. 나폴레옹 이후 어느 누구도 영국을 침략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 히틀러가 그런 야망을 품었고 그것은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독일군은 영국으로부터 30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처칠은 급히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수십 척의 구축함이라도 보내달라고 애원했지만 루스벨트는 거절했다. 처칠은 영국 해군 제독들에게, 각각의 프랑스 함대와 접촉해 그들이 결코 독일에 함대를 넘겨주지 말도록 설득하고, 불응할 경우 격침을 명령했다.

윈스턴 처칠 영국의 신임 총리가 첫 라디오 연설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대본을 읽고 있는 영화장면

실제로 알제리 해안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 함대가 요구를 거절하자 처칠의 폭격 명령이 떨어졌다. 얼마 전까지 동맹군으로 간주되던 프랑스 함대에 폭격을 하게 된 영국 병사들이나 당하는 프랑스 병사들이나 상상도 못했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처칠의 결정에 대한 비난이 터져 나왔지만 이 사건은 그야말로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요? 그것은 승리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하는 것입니다”라고 포효하던 처칠의 강철 의지를 입증한 사건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사건을 계기로 루스벨트는 처칠과 영국의 의지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스벨트는 영국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항복할 것이라 생각했고 어차피 침몰하는 영국에 도움을 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미국 여론도 점차 고립주의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궁극적으로 미국은 무기 대여법에 의해 영국을 지원하게 된다. 이 두 사건을 겪고 난 처칠은 곧이어 8월부터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중전과 런던 공습이라는 심각한 사태를 맞게 된다.

당시 독일 공군은 영국에 비해 3대 1 이상의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영국 공군기들은 일당백의 용맹으로 적기에 대항했다. 물론 희생도 무척 컸다. 처칠은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소수의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빚진 적이 없었다”며 영웅적인 전투기 비행사들을 예찬했다.

이 전투는 ‘영국 전투(Battle of Britain)’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공중전이 뜻대로 전개되지 않자 히틀러는 영국 공군의 지상 기지만이 아니라 런던을 폭격하라고 명령했다. 8월부터 200일 동안 공습이 계속되었는데 이때 런던 시민들이 보여준 용기와 희생도 길이 역사에 남을 만했다. 6만 명의 시민들이 희생되었고 런던의 주택 7채 가운데 2채가 파괴되었으며 1941년 5월에는 의회 건물마저 폭격을 맞았다.

위기에서 단결한 영국 국민

이때 처칠은 그의 탁월한 어휘력을 발휘해 그 고난의 기간을 ‘가장 멋진 순간(the Finest Hour)’으로 부르며 국민들을 고무했다. “영제국의 역사가 앞으로 천년 동안 지속된다 해도 이 시간만큼 멋진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방공호에서 라디오로 처칠의 연설을 듣고 있던 영국인들은 ‘가장 멋진 순간’을 함께 하며 애국심과 자부심을 불태웠다.

역사상 영국 국민이 그처럼 단결되었던 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처칠이 동원한 탁월한 무기는 심금을 울리는 연설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때로는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처칠은 ‘영어를 동원하여 전투에 내보냈다.’ 결국 히틀러는 영국을 침공한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했다.

비록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고 실시된 총선(1945년 7월)에서 영국민은 처칠이 아닌 노동당의 애틀리를 선택했지만 그들이 그를 영원히 배신한 것은 아니었다. 처칠은 그 후 한 번 더 총리로 봉직했다. 처칠이 90세가 넘어 영면했을 때 노동당 지도부조차 그를 ‘국왕, 의회, 국교회, 언론과 더불어 우리의 가장 위대한 다섯 번째 제도’로 칭송했다.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전후 세대도 불굴의 의지와 용기를 지닌 한 인간으로서의 처칠에게 경의를 표한다. 처칠의 경우에서 보듯 모든 정치 지도자에게는 공과 과가 있기 마련이다. 처칠에 대한 그들의 존경에서 영국인들은 공과를 구분해 합당한 평가를 할 줄 아는 현명함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8년의 대한민국이 1940년의 영국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판단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어찌되었든 히틀러에게는 핵무기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에 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극명한 차이점은 우리에게는 처칠과 같은 지도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히틀러의 사기극에 넘어갔을 때, 혹은 용기를 잃고 노예로의 길을 받아들였을 때 끝까지 맞선 지도자가 처칠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김씨 일가에게 그렇게나 당하고도 아직도 그들이 제시하는 사기극에 넘어가려 한다. 우리를 이끌 처칠과 같은 지도자는 정녕 없는 것일까?

1940년 6월부터 18개월 동안 처칠과 영국은 고립무원으로 혼자 싸워야 했다. 처칠은 영국 혼자만으로는 결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미국을 끌어들이려 부단히 노력했다. 결국 미국이 참전했을 때 비로소 처칠은 다가올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처칠과 루스벨트가 가까운 사이는 절대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고 많은 사안에 의견 대립을 보였지만 나치즘이라는 거대한 적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이미 미국이라는 혈맹이 있다. 그런데 너무 당연해서인지 우리는 그 동맹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다. 이제라도 그 동맹의 막중함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제발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을 하기를 바란다. 영화에서는 대화체로 표현되었지만, 처칠은 자신이 저술한 아버지 랜돌프 처칠의 전기에서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은 존경할 만한 성정이지만 나 자신은 결코 그렇게 되지 않기를 충심으로 바란다”고 쓰고 있다.

마음을 바꾸지 않고 있는 우리 사회의 종북 좌파들은 언제 처칠의 지혜를 배울 것인가? 일전에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다키스트 아워’를 단체로 관람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그러나 정파를 떠나 모든 정치인이, 나아가 일반인들이 ‘다키스트 아워’를 보고 자극을 받고 처칠에 대해 배웠으면 한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이 영화를 보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나아가 이 영화가 준 울림이 본격적인 역사 공부로 이어지기를, 역사학자로서 기대해본다. 영화 한 편 보고 역사를 다 이해했다는 식의 얄팍함에서 벗어나 역사가 주는 심오한 교훈을 책에서 찾아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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