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세의 독일통일 이야기 - 서독기본법 = 바이마르 헌법에 대한 반성 + α
권영세의 독일통일 이야기 - 서독기본법 = 바이마르 헌법에 대한 반성 + α
  • 김상민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8.03.15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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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6월 독일 분단이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한 미, 영, 불 등 서방 전승국들은 소위 '프랑크푸르트 문서(Frankfurt Document)'라는 제목의 문서로 자신들의 서독 분리독립 결정 내용을 담아 미리 구성되어 있던 서독지역의 주 정부 수반들에게 보냅니다. 

위 주 정부 수반들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은 이 결정에 대해 즉각 논의를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일부 반대가 없진 않았지만 이내 동의를 하고 이미 독일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기민당의 콘라드 아데나워와 사민당의 카를로 슈미트 등 일군의 법률가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부분국가', 즉 서독의 헌법 기초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전 국회의원, 전 주중대사 권영세
전 국회의원, 전 주중대사 권영세

이들은 독일 통일에 대한 서독인들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우선 절차와 형식에서부터 이 '부분국가로서의 서독'의 헌법이 통일 전까지만 효력을 가지는 '임시적'인 것임을 강조하려 하지요. 우선, 법의 명칭부터 '헌법(Constitution)'이 아니라 '기본법(Basic Law)'으로 정합니다. 또 이 '기본법'을 심의하는 기구도 역시 격을 낮춰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한 '헌법제정회의(Constituent Assembly)'가 아니라 주 의회에 의해 선발된 '의회 심의회(Parliamentary Council)'로 정하고, 그 최종 확정방법도 국민투표가 아니라 위 '심의회 의결'과 '주의회의 비준'이라는 약식 절차에 의하도록 합니다.

이들 서독기본법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기본법의 '내용'과 관련해서 가장 크게 고민한 부분은 바이마르 헌법과의 차별화, 즉, 히틀러의 제3제국 탄생을 가능케 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헌법구조를 기본법 속에 담아내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한 국가의 실패가 전적으로 그 헌법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혼란, 그에 따른 히틀러와 제3제국의 등장에 그 헌법이 기여한 것은 - 최소한 막지 못했던 것은  - 분명했기에, 이들은 새로운 공화국의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안전장치와 급진세력들의 헌정질서 파괴시도를 막아내기 위한 방어장치를 기본법에 반드시 포함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즉, 기사당 출신 위 심의회 위원 요제프 슈발버의 말처럼 "너무 자유주의적이어서 심지어 민주주의와 자유의 적들에게도 그 자유와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는 합법적 수단을 제공"했던 바이마르 헌법과는 달리, 기본법은 자신의 적들에게는 단호한, '방어적'이고 '전투적'인 민주주의이어야 했습니다.  

기본법 기초자들의 첫번째 조치는 대통령직을 약화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바이마르시절 군주에 버금가는 권한을 가졌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결국 히틀러 집권의 길을 열어주었던 점을 고려하여, 우선 대통령을 국민들의 직선이 아니라 별도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로 하였고, 그 권한면에서도 대통령은 단지 '상징적', '의전적'인 국가원수일 뿐 실권은 총리에게 부여하였습니다. 

두번째 조치는 소위 '건설적 불신임제(constructive vote of no confidence)였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존속기간 14년 동안 13번이나 총리가 바뀌며 극심한 정국 불안정이 초래된 점을 고려, 총리의 불신임결의를 통한 해임은 동시에 재적과반수가 지지하는 새로운 총리를 선출해야만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셋째는 바이마르헌법 제48조 소위 '국가긴급권'조항, 국가비상사태에서 행정부에 의한 일반적 입법권 행사를 가능케 했던 독소조항의 폐지였습니다. 위 조항이 평시에도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남용되면서 의회의 견제권이 사실상 무력화되었던 점을 고려한 조치였지요.    

넷째는, '5% 제한규정'의 도입이었습니다. 즉, 총선의 정당투표에서 5% 득표를 하지 못한 정당은 비례대표 의석을 배정받지 못하도록 한 것인데, 이는 소수당 난립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과 더물어 1928년 선거에서 나치당이 2.8% 득표에도 불구하고 의석을 받아 결국 독일을 파멸로 이끌게 한 데 대한 반성적 고려도 작용한 결과였지요.

다섯째는 헌법재판소에 의한 정당해산제도입니다. 나치당과 같이 정당자체의 그 목적이나 이념이 기본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명백히 반하는 경우, 개별행위자 처벌만으론 부족하고 아예 정당자체를 해산할 수 있어야 기본법을 지켜낼 수 있다는 논리에서 였지요.

이렇듯 바이마르헌법에 대한 반성적 고려 외에 미, 영, 불 등 전승국의 의지가 기본법 어딘가에 반영되었을 것임을 짐작하는 것은 서독의 건국과정 자체로 보아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요. 

우선, 전승국 중 프랑스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기본법은 지방(주; Land)의 권한이 강한 연방제도를 채택한 부분입니다. 프랑스로서는 20세기에만도 두번씩이나 자신들에게 전쟁의 참화를 안긴 이웃국가가 또 다시 강력한 중앙정부를 가진 국가로 재탄생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습니다. 서독인들 사이에서는 견해가 갈렸는데, 전통적으로 바바리아 지방의 자율성을 강조해온 기사당은 당연히 찬성한 반면, 사민당과 자민당은 약한 중앙정부로는 서독의 생존이 보장되지 않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강력히 반대했고, 기민당은 중간적 입장이었습니다. 결국 반대측 입장을 일부 고려하여 중앙정부의 재정권한을 다소 강화시켜주는 타협안으로 최종 결정되게 됩니다.

두번째는, 서독기본법의 민주주의가 국민들의 국민투표 등 직접참여 형태가 아닌 대의제적, 간접적 성격을 가지게 된 부분입니다. 전승국으로서는 '자발적으로' 히틀러를 선택했던 독일국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을 전혀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직접참여제도가 도입될 경우 공산주의자들이 선동을 통해 결국 기존질서를 무너뜨릴 것을 우려하고 있던 서독 정치인들도 이 부분은 쉽게 동의합니다.

1948년 9월부터 시작된 기초작업은 약 8개월만인 1949년 5월 8일 의회 심의회가 서독기본법안을 최종 확정하고 전승 3국의 승인과 각 주의회 비준을 마친 뒤 마침내 같은 달 23일 선포됩니다.

전 국회의원, 전 주중대사 권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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