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세의 독일 통일 이야기 - 패전 이후 독일의 Nazi 과거 청산
권영세의 독일 통일 이야기 - 패전 이후 독일의 Nazi 과거 청산
  • 미래한국
  • 승인 2018.03.20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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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종전후 독일을 분할 점령하여 관리하던 미, 영, 불, 소 등 전승 4대국은 유럽이 또 다시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나치관여자의 처벌, 배제과정을 통해 독일인들에게 나치의 과오를 분명히 인식시키고 평화, 민주적 질서의 가치를 주입시키는 나치과거의 청산과정 즉 탈나치화(De-Nazification)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같이 합니다. 

탈나치화의 첫단계는 포츠담 협정에서도 합의된대로 뉘른베르크 재판(1945년 11월 - 1946.10월)으로 시작됩니다. 수많은 나치 관여자들이 조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어 처벌되는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괴링과, 나치 육군원수 카이텔 장군, 외무장관 리벤트롭, 반 유대계 신문 발행인 슈트라이커 등 12명이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되고(괴링은 자살), 군수장관 슈페어 등 나머지는 관여 정도에 따라 장, 단기의 징역형을 받고 복역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미흡했던 탈나치화 작업 중 가장 잘 된 편이라는 이 재판도 많은 논란이 뒤따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 재판이 서구 형법의 대전제인 죄형법정주의(nulla poena sine lege ; 누구나 행위 당시의 법에 의해서만 처벌된다는 원칙)에 위배되었고 따라서 승자, 강자의 정의였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실제로 같은 전쟁 중 소련군에 의해서도 수많은 전쟁범죄, 반인륜범죄가 자행되었지만 그것은 불문에 부쳐집니다. 
 

전 국회의원, 전 주중대사 권영세
전 국회의원, 전 주중대사 권영세

이 재판이 종료된 이후에도 전승국의 각 점령지역에서, 그리고 이후에는 독일정부 또는 관련된 외국 정부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나치조직의 구성원들에 대한 청산작업이 진행되지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지요.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설립된 시몬 뷔젠탈 센터가 나치전력자 색출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특히 전승 4대국의 직접 관리를 받던 시절에는 각 관리지역마다 큰 차이를 보이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우선 미, 영, 불 등 점령지역과 달리 소련 점령지역에서는 개별 행위자들의 책임을 묻는 것보다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고 내용면에서도 제일 가혹하였습니다. 농지개혁을 통해 나치 후원자였던 '융커'계급을 몰락시키고, 나치에 협력한 기업가들의 재산을 몰수하였습니다. 또 정치, 정부 영역 뿐 아니라 교육, 법조 분야 등 거의 모든 공적 분야에서 조금의 관여사실이라도 밝혀지면 숙청하거나 배제하였습니다. 그 빈자리는 전문적 능력이나 지식과 상관없이 공산주의자들로 채워졌습니다. 즉, 탈나치화는 그들의 동독 공산화 정책과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었지요. 이 과정에서 소련 점령당국은 실제 나치전력자가 아님에도 자신들의 사회개조에 방해가 되는 인물이라면 나치전력자로 몰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등  탈나치화는 매우 자의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이 강제수용소들은 1950년까지 유지되었는데 그곳으로 보내진 12만명 가량의 동독인 중 4만명 이상이 수용 중 사망했다고 전해집니다.  

미, 영, 불 점령지역에서는 소위 Spruchkammer라 불리는 법원형태의 조사심의기구를 구성하여 처리하였는데 소련과는 달리 관여의심을 받는 대상자의 개인책임여부를 묻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대상자는 (1) 중대관여자 (2) 관여자 (3) 경미관여자 (4) 단순 동조자 (5) 무혐의자의 5개 범주로 나누어 처리하였는데, 이 3국 중에도 미국이 가장 엄격하여 불과 소수만 '무혐의자'로 분류했고, '단순 동조자'들도 원 직업에서 배제를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반면 영국이 가장 관대하여 조사대상자 절반이상을 '무혐의자'로 분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점령지역 내 조속한 안정화를 위하여 전문가들이 필요해졌을 뿐 아니라 한 때 거의 대부분의 독일인들에 의해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되었던 히틀러의 모든 추종자들을 다 가혹하게 대하는 것은 사회불만을 키우고 정치적 급진세력의 출현을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점차 관대화 되기 시작합니다.(이런 변화는 소련 점령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의 자료가 멸실되다 보니 심의기구 성격상 제대로 판별해내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위 Spruchkammer에 갈색옷을 입고 들어간 사람이 나올때면 빳빳한 하얀 옷을 입고 나온다며 '세탁기'라고 조롱당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분류결정은 주로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는데 대부분 관여사실을 부정하는 증언들 일색이라 선별작업에 관여했던 점령당국 인사들 사이에서  "요즘 독일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 나치당원은 히틀러 한명 밖에 없었던 것 같다"다는 우스개 소리도 나돌았습니다. 한 예로, 학계에서도 수많은 나치 조력자들이 있었음에도 마틴 하이덱거, 칼 슈미트 같이 아주 두드러진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자리를 유지하거나 잠시 휴직기간 을 가진 뒤 바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20여년전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군부 고위책임자들은 소위 '뒤에서 칼질하기(stab in the back)'신화를 조작해 내어 책임을 피할 수 있었던데 비해 2차 대전을 일으킨 나치 추종자들은 전승국들의 적극적인 관여로 인해 자신들의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바람직한 일이었지요. 그러나 그 추종자들이 너무 많았기에, 또 곧바로 시작된 냉전 덕에, 일부를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책임을 피한 채 '평화롭게 은퇴하여 편안한 말년을 보낼 수 있'게 한 것은 역사적 정의의 면에서 아쉬운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철저하지 못했던 과거청산으로 인해 오늘날 일본이 보이는 과거사 망각, 왜곡행위를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예에 위의 독일 예를 더해 보면서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어쩔 수 없었던 큰 역사의 흐름에 따른 결과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답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루빨리 스스로 강해져서 더이상 역사의 흐름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처지가 아닌, 그 흐름을 만들어 가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합니다.

전 국회의원, 전 주중대사 권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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