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과 기독교 삼일운동에 대한 기독교의 기여에 대한 고찰-이상규 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찬
삼일운동과 기독교 삼일운동에 대한 기독교의 기여에 대한 고찰-이상규 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찬
  • 박명수 서울신대 교수
  • 승인 2018.05.29 11: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명수 서울신대 교수

이상규교수의 삼일운동과 기독교에 대한 본 논문은 삼일운동 전반을 다루면서 여기에 대한 기독교의 기여를 폭 넓게, 그리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논문은 지금까지 삼일운동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 쓴 논문 가운데서 가장 포괄적으로 그 관계를 정리한 논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아울러서 현재 삼일운동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도 종합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이상규 교수가 지적한 것에 대해서 많은 부분 동의하면서 여기에 몇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필자의 의견을 덧붙이고자 한다.

I.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삼일운동의 배경에 대해서

이상규교수는 지금까지 삼일운동의 배경이 윌슨의 민족자결론이라는 전통적인 주장에 대해서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국내의 내적인 요인에 강조점을 두는 새로운 학설을 지지하는 것과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필자는 삼일운동에는 외인과 내인이 있다고 본다. 외인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이며, 내인은 일제의 강점에 따른 식민지배에 따른 항거이다. 과거 내적인 요인을 무시하고 외적인 요인을 강조한 것에 대해서 내적인 요인을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본다.

하지만 필자는 삼일운동에 있어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위치를 약화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일제의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외칠 희망을 갖지 못했던 당시 상황에서 윌슨의 주장은 한국민에게 독립을 외칠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당시 국제적인 한 흐름( 비록 이것이 오판한 것이라고 할지라도)에 호소해 보려는 것이다. 따라서 삼일운동의 근본 출발은 국제사회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분명히 해서 외교적으로 독립을 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이상규교수는 당시의 농촌 사람들이 얼마나 국제정세를 알았을까 의문시하지만 필자는 많은 지방의 인물들이 일제에 의해서 심문을 받을 때, 파리에서 국제회의가 열리고, 여기에 우리 민족의 분명한 의사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언급한 기록을 보았다. 따라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국제적인 흐름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이것은 기미독립선언서에 잘 나타난다고 본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기독교적인 정신에서 나왔다. 당시 미국의 선교사들은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이들은 작은 민족들이 강대국에 의해서 고통받는 것을 보았다. 특히 터키 지역에서 이슬람에 의해서 알메니안이 대량 학살당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을 보면서 미국 선교사들은 모든 민족은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교학자들은 이런 선교사들의 소수민족에 대한 견해가 윌슨에게 영향을 비쳤다고 본다.

이같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기독교적인 내트웍을 통해서 국내에 전달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이후 많은 한국인들은 해외로 도피했고, 이곳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특히 미국, 일본, 중국에서 영향이 컸다. 우선 미국에 있던 교포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알았고, 이승만을 통하여 여운홍에게 전달되었고, 상해에서는 미국 선교사 피치를 통하여 이런 윌슨의 생각이 여운형에게 전달되었으며, 이런 해외 기독교인들의 네트웍은 일본과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YMCA가 그 중요한 통로였다. 이것을 보면 기독교는 세계적인 사조의 흐름을 국내에 전달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 것이다.

II. 국내의 삼일운동, 기독교, 그리고 다른 종교

본 논문의 목적은 삼일운동에 기여한 기독교의 역할을 서술하는 것이다. 이상규교수는 이런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삼일운동의 지도자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얼마나 차지하는 지, 삼일운동의 피해자 가운데 기독교인이 얼마나 차지하는 지, 그리고 삼일운동의 지방확산 과정에서 기독교의 기여가 얼마나 많은 지에 대해서 충분하게 설명하였다. 필자는 여기에 동의하면서 그 이유를 첨부하고자 한다.

첫째, 삼일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다른 종교와 비교해 볼 때 더욱 분명하다. 한국의 전통종교라고하는 유교는 말할 것도 없고, 불교의 역할도 미미하다. 오히려 이런 종교들은 일본과 많이 타협하였다. 일제는 한일병합 이후 유교를 친일화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유교세력인 기존의 왕족에게 수 많은 작위와 상금을 제공하였다. 또한 당시 한국불교는 일본불교와 손을 잡고 포교활동을 했기 때문에, 한용희와 백용성과 같은 사람은 불교에서 매우 예외적인 인물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천교교의 경우, 자금 및 인원동원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삼일운동이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도교에서는 여기에 이같은 근대적인 요소가 부족함으로 큰 틀에서 본다면 한계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기독교는 국제적인 연락망, 전국적인 조직망, 근대국가를 위한 사상적 배경등을 생각할 때 단연 그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둘째, 삼일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당시 일제 강점기에서 차지하는 기독교의 독특한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는 일제의 후원으로 존립하는 종교가 아니라 서구국가와 손을 잡고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일제시대에서 교회는 일제가 범접하기 어려운 특별한 공간, 즉 일종의 해방구였고, 또한 기독교인과 교회공간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들이 다같이 일본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에 다른 단체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이었고, 기독교가 삼일운동을 주도하고, 기독교 장소(교회, 미션 스쿨, 병원 등)과 같은 장소가 삼일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셋째, 삼일운동과 기독교의 관계를 말하면서 선교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삼일운동의 본질적인 목적이 국제사회에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알리는 일이 중요했다. 이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중요한 문서를 번역하는 것이었다. 감리교 감독 웰치는 동경의 2/8선언서를 번역하였고, 스코필드는 기미독립선언서를 번역하고, 첫 번째 시위장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그리고 언더우드와 기타 선교사들은 제암리교회의 박해를 기록으로 보존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은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을 지라도 인도적인 견지에서 한국인들을 구출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런 모든 일들은 외국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에 우리나라의 모든 영역은 일본의 강력한 지배아래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기독교가 갖고 있는 서구와의 연계성 때문에 일본의 지배가 느슨한 지역이었고, 동시에 기독교는 오히려 근대사상과 세계의 흐름과 연결할 수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적어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런 현상을 지속되어 갔다.

III. 삼일운동과 대한민국의 관계

삼일운동은 단지 일제에 대한 독립운동이 아니고, 오늘의 대한민국의 뿌리이다. 따라서 우리는 삼일운동이 어떻게 오늘의 대한민국에 연결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선 삼일운동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임시정부의 수립이다. 삼일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생겼고, 이것은 독립운동의 정통이 되었다. 그런데 이 임시정부는 그 헌법 제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고 못 밖고 있다. 그러므로 삼일운동으로 나타난 民意는 새로 새워지는 나라는 조선왕조의 복권이 아니라 민주공화국 수립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서재필의 독립협회, 이승만의 만민공동회, 그리고 안창호의 신민회등을 거쳐서 발전해온 서구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민주주의를 한국에 들여온 것은 기독교였다. 선교사들을 통해서 미선 스쿨에서 가르쳐진 민주주의가 이제 삼일정신의 핵심으로 등장하여 새로운 나라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런 민주주의적인 사상을 어떻게 동양의 전통종교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비록 천도교가 강력한 힘으로 삼일운동에 참여했지만 사실 삼일정신의 핵심은 기독교정신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민주공화국을 만들려는 삼일정신은 곧 바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것은 미국에 대한 실망으로 많은 사람들이 소련으로 기울어졌다는 사실이다. 윌슨은 재선에 실패하고, 파리회의에서 독립운동가들은 실망하고, 1921년 미국 워싱턴회의에서 미국이 일본 편을 드는 것을 보고서는 미국과 기독교를 의지하고 독립운동을 하려던 사람들은 완전히 절망하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미국 대신에 새롭게 등장했던 세력이 소련이다. 소련은 자신들이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는 약소국가의 대변자라고 말하면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주었다. 이 때 기독교에서 좌익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수 없이 많다. 김규식(나중에 다시 우익으로 돌아왔음), 여운형, 이동휘와 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삼일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이제 노동자와 농민이 주도하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곧 노동자와 농민이 세우려는 나라는 바로 인민공화국이었다. 이것은 계급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해방이 되었을 때, 한반도에는 두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는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삼일정신을 계승하여 민주공화국을 세우려는 사람들과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삼일운동 이후 프로렐타리아 운동을 계승하여 인민공화국을 세우려는 사람들이다. 전자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뭉쳤고, 후자는 공산당을 중심으로 뭉쳤다. 현재 대한민국은 바로 전자를 계승하는 나라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후자를 계승하는 나라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에는 3/1운동과 임시정부가 있지만 북한의 헌법에는 그런 단어가 없다.

해방 직후 처음 열린 삼일절 기념행사는 1946년 3월 1일에 열렸다. 좌익은 남산에서,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좌익은 33인 중심으로하는 3/1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뒤에 나타났던 농민과 노동자의 운동에 역사의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기미독립선언서와 33인을 부정하였다. 우익은 모든 계급을 초월해서 일어난 3/1운동과 모든 종교를 넘어선 33인이야말로 민족의 대표적인 운동이며, 기미독립선언서가 그 핵심이라고 보았다.

같은 날 북한에서도 3/1절 행사는 열렸다. 북한 당국은 장대현교회에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모인 3/1절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진정한 삼일정신은 33인과 기미독립선언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뒤의 노동자와 농민운동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날 기독교인들은 엄청는 박해를 받았다. 북한은 3/1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이유는 진정한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3/1운동은 새로운 지도자를 기다리게 되었는데, 바로 그가 김일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삼일정신 대신이 주체사상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3/1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3/1정신을 바로 잘 계승한 것이라는 것을 장 인식해야 한다. 3/1운동은 민주공화국을 만들기를 원했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바로 3천만 동포들이 외치던 그 나라인 것이다.

(한국기독교학술원 제52회 학술공개세미나 박명수 박사 원고)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