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소설가 복거일 “위대한 삶을 살았지만 잊힌 프란체스카 여사를 위하여”
[인터뷰] 소설가 복거일 “위대한 삶을 살았지만 잊힌 프란체스카 여사를 위하여”
  • 박주연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8.08.08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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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주연 미래한국 기자

악극(樂劇) <프란체스카-우연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한국 여인> 희곡집 출간

“프란체스카 여사의 삶을 그린 작품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언제 처음 들었는지 이제는 기억이 흐릿하다. 생각의 씨앗이 세월의 흙 속에서 싹트고 모르는 새 자라나서 그럴 것이다. 처음엔 소설로 쓰려 했다. 그러나 실재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은 여러 모로 제약이 커서, 선뜻 시작하지 못했다. 그런 무기력에서 나를 흔들어 깨운 것은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의 <에비타(Evita)>가 거둔 성공이었다.

그 작품의 주인공인 아르헨티나의 에바 페론(Eva Peron)은 늘 인기가 높았지만 역사적 평가는 크게 엇갈리는 인물이다. 그래도 사후에 예술 작품을 통해서 온 세계의 칭찬과 사랑을 받은 것이다.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여(Don’t Cry for Me, Argentina)>를 들을 때마다, 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위대한 삶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거의 다 잊힌 프란체스카 여사를 깊은 부끄러움으로 떠올렸다. 그런 사정에 격발되어, ‘나도 한번 희곡으로 써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후기 중)

소설가 복거일 씨가 <프란체스카-우연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한국 여인(북앤피플)>를 최근 펴냈다.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도너 리 부부의 삶을 바탕으로 만든 희곡집이다. 작가 후기에서 밝혔듯 프란체스카 여사를 또렷이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에 속한 자로서 어떤 의무감이 그를 움직였다. <미래한국>에서 복거일 작가가 이런 희곡을 쓰게 된 계기, 그가 생각하는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작가 후기를 통해 “우남과 프란체스카 도너 리 여사는 하나의 중력 중심을 도는 이중성(binary star)”이라고 했다.

소설가 복거일
소설가 복거일

- 악극 <프란체스카-우연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한국 여인>를 위한 희곡집을 쓰셨는데요, 계기가 궁금합니다.

우남(이승만)은 워낙 훌륭한 분이라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지만, 프란체스카 여사는 잊혔어요. 아마도 대한민국 국민 50세 이하 중 프란체스카 여사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나는 그분을 잘 아는 마지막 세대에 속하지요. 내 입장에서는 내가 죽으면 나중에 프란체스카 여사를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현실적인 걱정이 들었어요. 일흔이 넘을 즈음 써보겠다고 결심했고, 그 작업을 한 것이지요.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과 결혼하기 위해 힘든 결정을 내린 뒤 줄곧 우남을 보필했어요. 흔히 내조라고 말하지만 그보다는 한 차원 더 높은 활동을 하신 겁니다. 프란체스카 여사를 흔히 우남 주변에 있는 한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보이긴 보이지만 우남을 둘러싼 하나의 풍경처럼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두 분의 삶을 추적해보면 그 양반 비중이 생각보다 더 크다는 게 드러나요. 부부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남자가 잘 되면 아내 역할이 크다는 게 드러나지요. 우남이 위대했으니 프란체스카 이 분 삶도 같이 위대해진 거예요.
 

이승만-프란체스카 만남은 단순한 연애 그 이상의 사건

- 제1막-연인의 이야기, 제2막 아내의 이야기, 제3막 며느리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고 뒤편에 작가 후기를 통해 상세한 내용을 기술하셨는데요. 프란체스카 여사 어떤 면에 초점을 맞추셨습니까?

악극이란 한국식 뮤지컬을 뜻합니다. 유럽의 오페라를 미국 사람들이 받아들일 때 딴따라 식으로 받아들이면, 그게 뮤지컬이 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다시 약간 속화된 게 악극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나는 악극을 좋아합니다. 어릴 때 그걸 보고 자랐어요. 그걸로 만드는 데 재미있어야 될 게 아니겠어요?

첫 번째 연인의 이야기가 기막혀요. 두 분이 국제연맹회의가 열리던 스위스 제네바에서 풍광 좋은 호텔에서 만났으니까 로맨틱 하죠. 그런데 막상 생각해보면 두 분은 전혀 어울리지 않지요. 우남은 58세였고, 프란체스카 여사는 33살, 그러니까 25년 차이가 나는데 극복이 잘 안 되거든요. 또 하나는 인종적 차별이란 벽이 있잖아요. 당시 유럽 인종 차별은 상상조차 못하는 수준이에요.

1960년대 미국에 간 우리 유학생들도 인종 차별이 너무 심해 모두 반미주의자가 돼 돌아와요. 하물며 1930년대 유럽은 나치가 강성해질 때거든요. 유대인들은 집에서 쫓겨나 피신하고 미국 등 다른 나라로 옮겨가는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인종에 대한 감수성이 굉장히 예민해진 때였어요. 그 당시 오스트리아는 특히 반유태주의가 독일보다 더 심각했지요. 그런 상황에서 유색 인종과 결혼한다는 건 굉장한 추문이죠. 손가락질 받고 박해 받아요.

그런데 우남은 국적까지 문제되거든. 일본이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우남은 그때 여권도 없었어요. 국제적인 떠돌이 신세인데 만일 자식이라도 생겨 봐요. 무국적자가 됩니다. 또 생계가 안 되는 가난뱅이지요. 프란체스카 여사 어머니가 두 사람 사이를 반대했는데 자기 자식이 그런 선택을 한다는데 누가 안 막겠어요. 참 성사되기 어려운 사랑인데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우남에 대해 이성에 대한 사랑을 넘어 흠모의 정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미 지도상에서 사라진 나라를 되살리려고 평생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노 혁명가를 보고 인격적으로 존경한 겁니다. 우리가 그 점을 놓치면 두 분의 사랑은 그저 평범한 연애사건이 돼 버려요.

프란체스카 여사는 우리나라로서는 굉장히 고마운 분인데, 잊혔잖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내가 연출도 하는데요, 보통 작가나 안무가 이런 사람들에게 연출자가 작품 포인트가 어디냐고 물어 옵니다. 그걸 알아야 연출할 수 있으니까요. 이 작품에서는 딱 이겁니다. 우남과 프란체스카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는데 그때 우남이 ‘잊지만 말아 달라’고 한 부분이에요. 그 대목 부를 때 그 장면에서 관객이 울지 않으면 연출에 실패하는 것이지요.

내가 연출할 때 배우들한테 보통 그리 얘기합니다. “이 대목에서 관객 울지 않으면 우리 실패한 거야” 아주 감동적이잖아요? 우남으로선 프란체스카를 사랑하지만, 손이 안 닿는 곳에 열린 과일과 같은 존재니까 잊지만 말아달라고 얘기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랑은 혼자만으로는 극복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두 분이 극복했어요.

- 악극을 위한 희곡집이니 공연 계획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런 종류의 공연은 상업적으로 관객을 모을 수 있는 공연은 아니에요. 교육적인 측면이 큰 작품이기 때문에 지원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전경련이 예전 그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그 기능을 포기했어요. 보수우파 예술 활동이 중단된 상태거든요. 희곡을 썼으니 일단 내부 반응을 보고 살펴야겠지요. 어떤 독지가가 나와 지원한다면 모를까 당분간은 어렵지 않을까 해요. 작가로서 써놔야 세상이 바뀌면 공연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일단 작가로서 이걸 내놓으면 임무를 완수한 셈이고, 공연은 다른 차원이지요.

앞장서 대한민국 독립운동을 북돋웠던 여인

- 설명해주신 것만으로도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큰 존재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독립운동 하면 늘 쪼들립니다. 보통 부인 입장에서 보면 자기 앞날도 생각해야 될 거 아니에요. 남편 나이는 70이 다 되어 가는데 남편은 죽으면 끝이지만 자기 여생은 남잖아요. 그럼 최소한의 돈은 있어야 하는데 없거든요. 저축이 없잖아요. 그런 상황에서도 프란체스카 여사는 한 번도 자기 앞날 때문에 남편 독립운동을 제어하지 않았어요. 어떤 면에서는 남편보다 더 앞장서서 독립운동을 북돋웠지요.

올리버 박사가 쓴 전기(로버트. T. 올리버, 1954년에 쓴 이승만의 전기 <이승만 전설 속의 인간>)에도 그 부분이 나와요. 두 분은 가난했지만 어떤 의식을 갖고 살았는지 관심을 갖고 읽어봐야 드러납니다. 우남에 대한 전기는 1954년에 나왔죠. <이승만 전설 속의 인간> 이 책이 거의 유일해요. 가계도 꾸리지 못하는 형편에서 독립운동을 했거든요.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국에 와서 생계를 꾸려나가려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런 면에서 불평 않는 아내 역을 충실히 한 것만 해도 굉장히 큰 역할을 한 것이지요.

1987년 장편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 작가 복거일은 책이 좋아 읽다보니 어느새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젊은 날, 넉넉한 보수를 주던 은행을 그만둔 이유도 오롯이 책 읽는 시간을 더 늘리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충남 아산 출신의 작가이다.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대체 역사 소설’이라는 장르를 만들기도 한 작가이다. 작가는 문학 창작 활동뿐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짚어야 할 문제들에 주목하여 ‘우리 시대의 보수논객’으로 불린다. 사회평론가로도 활동해 왔으며 그의 여러 저서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사회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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