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출국' 과 리얼 오길남 스토리
영화 '출국' 과 리얼 오길남 스토리
  • 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
  • 승인 2018.11.28 13: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길남 박사 가족의 기구한 인생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 <출국>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극히 제한된 상영관과 상영 횟수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오길남 박사 문제를 제일 처음 재거론(‘예술가의 위대한 업적과 정치적 업보’ 조선일보 2010. 4. 22)했던 사람으로서 필자는 이 문제에 남들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여러 매체에서 여러 번 문제 제기(‘두 公人의 허위-노태우와 윤이상’ 동아일보 2011. 9. 2; ‘윤이상 음악제에 세금지원 안 된다’ 동아일보 2011. 11. 8; ‘윤이상 이응로의 반인륜 범죄, 더 이상 덮지 말라’ 뉴데일리 2011. 6. 29 등 다수)를 했었기에 이 사건에 대해 잘 아는 편이기도 하다.

필자가 이 문제를 제기한 이유 중 하나는 피해자들은 지옥과 같은 생활을 하는 데 반해, 가해자인 윤이상 씨는 남북한 모두에서 추앙받으며 윤 씨 가족들은 남북한과 독일, 미국을 자유로이 오가며 풍요한 생활을 한다는 도치된 현실이었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윤이상에 대한 잘못된 ‘우상화’ 작업이 무분별하게 진행되는 것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싶었고, 별 관심을 못 끌고 잊혀져가는 북한 수용소의 오 씨 가족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에 절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 <출국>을 관람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코엑스 극장에 가려 했더니 새벽 2시 반 것만 있어서 도저히 볼 수 없었다. 가까스로 강남 메가박스에서 밤에 상영해서 지인 몇 사람과 같이 볼 수 있었다. 먼저 이 영화를 제대로 규정하고 얘기를 시작해야겠다.

<출국>은 논픽션 영화, 즉 실화영화가 아니라 철저한 픽션 영화에 오길남 가족 스토리를 살짝 입힌 것이 라고 생각하고 봐야 한다. 이 영화를 철저한 실화영화로 생각하고 가신 분들은 큰 실망감을 표현했다. 원래 오길남 씨 스토리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사실이 그렇다.

이 영화와 실제 스토리와 같은 것은 두 딸의 이름 혜원, 규원이라는 것과 영화에서 이범수가 주연을 맡은 주인공 이름이 오 박사라는 것 정도이다. 극 중 인물의 이름도 오길남이 아니라 오영민이다. 그러나 감독.작가는 이 픽션 드라마에 원래 스토리를 사이사이에 집어넣으려 꽤 노력했다. 원래 오길남 스토리를 잘 아는 필자는 영화를 보면서 그 노력의 흔적을 잘 읽을 수 있었다. 그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헌신적인 배우들의 연기에 박수를

영화에서는 오 박사가 유학생들을 포섭해서 북한으로 데려가려고 가족과 코펜하겐으로 같이 나오는 것으로 설정됐는데, 이것부터가 픽션이다. 공작을 하는데 어떻게 가족들이 동행을 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오 박사는 북한 공작원들과 독일에 들어가기 위해 코펜하겐 공항에 입국하다가 탈출을 감행하고 성공했다. 가족들은 물론 북한에 남아 있었다. 또한 주인공인 오 박사를 많이 미화했지만, 원래 오길남 씨는 그런 영웅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나약하기 짝이 없고 판단력에 큰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필자가 2010년 오길남 케이스를 재거론하자 오길남 박사에게서 나를 보자는 연락이 와서 만나서 장시간 얘기를 나누고 저녁을 같이 하기도 했다. 그는 죄책감과 괴로움을 술로 달래는 생활을 해왔기에 심신이 많이 지쳐 있었다. 그의 여러 판단과 행동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지만 그에게 깊은 인간적인 동정을 느꼈다. 그는 결코 강인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리고 영화 자체가 가족들을 구하려 노력하는 멜로가 가미된 첩보물이었기에 허구의 상상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영화에 실망한 관객들은 특히 오길남 씨 부인과 두 딸이 오 씨 탈출 후에 수감된 요덕 수용소의 ‘요’자도 안 나오고, 라스트 신에 큰 딸이 아리따운 모습의 외국인 관광객 안내원으로 외국인 관광객으로 나오는 장면에서 분노했다. 마음 같아서는 실제 이 가족이 겪었던 비극적인 스토리를 더 사실적으로 부각해서 북한 체제의 악마성을 더 확실히 나타냈으면 좋으련만, 사정상 스토리를 매우 소프트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이 있다고 이 영화에 관계했던 분들은 말한다.

이 영화가 픽션 영화임을 감안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약간의 사실을 버무린 픽션 영화로 감상한다면 볼 만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항간에는 이 영화가 좌파의 교묘한 북한 체제 찬양영화라는 혹평도 있지만 그것은 너무 극단적인 해석인 듯하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가족이나 인권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 북한 체제의 비정함이기 때문이다.

또한 배우들의 연기가 좋다. 주인공 역의 이범수는 이 어려운 배역을 열연을 하고 있고, 원로 배우 전무송은 오 박사를 꼬셔서 북한으로 가게 만든 윤이상과 송두율 교수를 합쳐놓은 캐릭터인 강문환 박사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특히 윤이상과 송두율의 음험함과 위선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영화에서 강 박사는 노동당 정치국 비밀 후보위원일 때는 ‘김영호’라는 이름을 가진 북한 서열 40위 정도인 인물로 나오는데, 실제로 송두율은 고 황장엽 비서의 증언에 따르면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북한 서열 20위권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북한 첩보 책임자 역을 맡은 이종혁의 탄탄한 연기도 볼 만하다. 오 박사 부인 역의 박주미는 미인으로 유명한 배우라 내심 걱정했지만 이 영화에서는 수수한 보통 여자의 모습으로 비극을 감수하는 아내와 엄마 역을 무난하게 소화해 냈다.

특히 북한으로 데려갈 인물인 화학자 이문호 박사가 북한으로 갈 것을 결심하는 장면은 명장면이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이문호의 북한행을 설득하는 오 박사는 마치 과거에 강문환에게 자기가 설득당하는 장면이 오버랩 되면서 현실과 과거가 혼동돼서, 오 박사가 오 박사 자신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것처럼 처리된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문호 박사가 북한행을 결심하자 속으로 “나도 너같이 생각하고 북한에 갔다가 인생을 망치게 됐어!”라고 외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였다.

그럼 당시 오길남 씨가 실제로 북한에 데려가려 했던 인물은 누구였을까? 오 씨는 여러 번 그 인물이 현재 상지대에서 법을 가르치는 박병섭 교수라 증언했다. 증언에 따르면 박병섭 박사를 북한으로 데려오는 계획은 오 씨가 탈출하면서 무산됐고, 박 씨는 한국에 돌아와 비교적 조용히 살았지만 좌파권에서 늘 활동했고, 강만길 씨가 상지대 총장일 때 부총장을 맡기도 했었다. 오 씨의 증언이 맞다면 오씨는 박 교수의 생명의 은인이지만, 박씨는 그 후 오길남 박사를 기피했고 본인이 북한행 대상자였다는 것을 완강히 부정했다 (‘[단독]오길남씨 “入北포섭 포기했던 유학생은 모대학 교수’ 동아일보 2011. 9. 30)

영화보다 더 참혹했던 오길남 스토리

지금 상황에서 이만큼이나마 <출국>이라는 영화가 완성돼 나온 것이 다행이다. 오 박사의 가족들인 신숙자 모녀들이 끌려가, 부인인 신숙자 씨가 죽었다고 알려진 악명 높은 요덕 수용소가 빠진 건 아쉬운 일이긴 하다. 그러면 진짜 오길남 가족 스토리는 어땠는가. 영화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고 리얼하다.

오 씨는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85년 서독 브레멘 대학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유학중 파독 간호사로 서독에 온 신숙자 씨를 만나 결혼하고 서독에서 두 딸(다시 언급하거니와 혜원, 규원. 영화에서 실명이 나오는 인물은 두 딸이 유일하다)을 낳았다. 재독 시 반한 단체인 민건회(영화에서도 언급된다)에 가입해서 열심히 활동하다 작곡가 윤이상과 송두율이 권유하고, 독일에서 활약한 북한의 고정간첩인 김종한이 주선해서 박사학위 취득 후인 1985년 12월에 가족들과 입북했다.

북한에 갈 때도 부인인 신숙자 씨의 반대가 컸다고 한다. 그러나 김일성대학 교수직을 준다는 윤이상의 말을 믿고 북한에 갔지만 그에게 기다린 것은 대남 공작원이라는 직책이었다. 오 씨는 약속과 달리 북한에 가서 대남 공작원으로 이용됐고, 북한 체제의 실상을 알고 나선 탈출을 결심했던 것이다. 대남방송 등에서 활동하다가 1986년 12월에 서독 유학생 둘을 더 포섭하라는 임무를 받고 북한공작원들과 서독을 향하던 중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에서 탈출을 결행하고 성공했다.

그는 그 후 서독에 5년간 머무르면서 가족을 되찾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대한민국 당국에 자수하고 서울로 들어왔다. 특히 입북을 권한 윤이상을 만나 그의 가족을 송환시켜 줄 것을 수차에 걸쳐 간절히 요청했다. 그러나 윤 씨와 부인 이수자는 신 씨 모녀 사진과 서신, 음성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북한에서 가져와 오 씨에게 두 차례 전하며 재입북을 강요했다. 윤이상은 오 씨의 북한 복귀를 강요하며 안 돌아갈 경우 “은혜를 베풀어준 주석을 배반”했기에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다” “가족은 죽는 줄 아시오”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했다 한다.

오 씨의 가족은 악명 높은 요덕수용소로 끌려갔고, 그들의 요덕 생활을 탈북자들에 의해 여러 번 확인됐다, 요덕 내에서 신숙자 씨는 서독에서 왔기에 ‘서독 댁’으로 불렸던 사실도 알려졌다.

“당신은 미제 고용 간첩이다. 은혜를 베풀어 준 김일성 주석을 배반했으므로 가족을 인질로 잡아 둘 수밖에 없다.”

윤 씨는 강압적으로 오 씨가 다시 입북해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강요했다.

오 씨의 책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자유문학사)는 1993년에 출간됐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곧 절판됐다. 그러다가 2011년 오길남 박사 가족 생환운동이 벌어지고 전시회가 성황리에 개최되면서 오 씨 스토리는 언론의 큰 관심을 받게 됐다. 오 씨의 이전 책이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도서출판 세이지)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기도 했다. 영화 <출국>은 이 책을 모티브로 삼았다.

한동대 교수였던 김미영 세이지코리아 대표와 동료들이 서울 인사동에서 2011년 2월에 ‘그곳에는 사랑이 없다’라는 제목의 정치범수용소 및 북한인권 전시회를 같이 열면서 오길남 가족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곧이어 5월에 신숙자 씨와 윤이상의 고향인 통영시 소재 경상대 해양과학대학 도서관 1층에서 ‘그런데 통영의 딸이 그곳에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북한 정치범수용소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는 통영기독교연합회와 통영현대교회에 의해 주관됐다. 그런데 이 전시회들에서 공개된 흑백 가족사진 한 장이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바로 윤이상이 준 요덕에서의 신숙자 씨 모녀의 사진이었다. 요덕(수용소) 출신 탈북자의 증언을 통해 이 사진의 배경이 수용소 내부라는 것이 확인됐다. ‘혜원·규원 자매와 아내 신숙자씨는 1987년 말 요덕수용소 혁명화 구역에 갇히는데 이때 혜원 11세, 규원 9세였다.’(전시회 팸플릿 소개)

이 사진이 주는 반향은 대단했다. 더군다나 부인 신숙자 씨가 윤이상과 같은 통영 출신임이 밝혀지면서 그녀에게는 ‘통영의 딸’이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그리고 오 씨 가족들의 송환 촉구 서명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처럼 신 씨와 두 딸의 구출 청원이 이어지자, 결국 북한에 있는 오 씨 가족들은 유엔으로부터 난민 인정이 됐다. 국제사회의 질의에 북한 당국은 유엔에 간단한 통보를 했다. 북한 당국은 2012년 4월 27일 스위스 제네바 주재 북한대표부 명의로 유엔에 신 씨가 간염으로 이미 사망(1998년)했음을 서한으로 통보했다. 아마도 물리적 나이나 요덕에서의 열악하기 짝이 없는 생활환경을 감안하면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운동이 확산되는 데 많은 분들이 노력했지만 김미영 세이지코리아 대표, 이지혜 국제변호사, 한동대 하임숙 씨 등이 큰 역학을 했고, 통영에선 방수열, 소신향 목사 부부가 견인차 역할을 했다. 언론계에선 주간조선, 조선일보, 월간조선, 동아일보, 뉴데일리 같은 매체들이 특히 열심히 이 운동을 소개해 줬다. 북한인권운동을 하던 당시 최홍재 MBC 방송문화진흥회이사는 “신숙자 모녀의 안전귀환”을 요구하며, 통영여중에서 2011년 11월 19일 출발해 도보로 부산, 대구, 대전, 서울을 거쳐 12월 11일 임진각에 도착하는 대장정을 펼치기도 했다.

윤이상이 오길남에게 전달한 북한 요덕수용소에 있는 오길남의 아내  신숙자씨와 혜원, 규원 자매

거짓으로 미화된 윤이상

윤이상은 1963년 평양으로 비밀리에 불법 입북하는 등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발각돼서 10년형(동백림 사건, 1967년)을 받은 후 이 사건이 조작이라는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또한 동백림 사건 이후 윤이상 부부의 행적은 심각한 문제투성이였다. 북한을 자주 오가며 한 김일성과 주체사상 찬양 기록은 양(量)적으로 너무 많고 질(質)적으로는 심각하다. 김일성을 ‘우리 역사상 최대의 영도자인 주석님’이라고 쓴 편지는 압권이다.

참고로 윤 씨 부부는 김일성을 만난 순간 “분단된 조국의 운명을 짊어지고 꿋꿋이 걸어 나가는 김 주석의 모습에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고 했고, “마치 옛 고향집으로 돌아간 것 같은 따듯함을 느끼는”(이수자 ‘나의 남편 윤이상’ 하편 107쪽) 북한에서 “우리 역사상 최대의 영도자”인 “흠모하는 수령님의 영생불멸”(윤이상·이수자 부부의 편지와 방명록 글에서 발췌)이나 기원하고 조용히 살았으면 한다고 고백했었다.

윤 씨는 오길남 박사 이외에도 프랑스 파리에서 한인회장을 하던 허홍식 씨 등의 입북을 지속적으로 유도했고 관철시켰다. 그런데도 통영의 윤이상기념관에 가면 그가 ‘애국자’였다고 써 있으며, 통영국제음악제재단 홈페이지에는 “현대음악의 거장 작곡가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 시작된 통영국제음악제”의 취지가 “민족에 대한 사랑과 화합, 화해의 세계를 추구한 그의 음악세계는 현대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버젓이 거짓 설명이 나열돼 있다.

이러한 윤씨 부부의 막장행각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행동을 했던 이응로 화백과 그의 후처(後妻) 박인경(이응로는 한국에 본처가 있었기에 중혼(重婚)인 상태였다)의 활동과 쌍벽을 이룬다. 이응로 부부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백건우 윤정희 부부 납치 미수사건의 주범임은 이미 여러 문서를 통해서 밝혀졌다. 그런데도 아직도 윤이상과 이응로를 숭상하는 한국 사회의 위선성은 놀랍기만 하다.

작년 7월 5일 영부인 김정숙 여사는 문재인 대통령의 독일 방문에 동행했다가, 독일 베를린 가토우 공원묘지에 있는 윤이상의 묘지에 헌화했고, 꽃다발 리본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 김정숙, 조국과 통영의 마음을 이곳에 남깁니다’라고 적혀졌다. 또한 통영에서 가져온 동백나무 한 그루가 심어졌고, 나무 앞 붉은 화강암으로 된 석판에는 ‘대한민국 통영시의 동백나무 2017.7.5. 대통령 문재인 김정숙’이란 금색 글자가 새겨졌다.

현실과 허구가 뒤죽박죽된 현재 한국 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