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처럼 번지는‘남북영화 교류’ 진짜 속셈은?
구호처럼 번지는‘남북영화 교류’ 진짜 속셈은?
  • 조희문 영화평론가
  • 승인 2019.01.1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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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영화계와의 접촉, 교류가 영화계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은 영화제 개최를 앞두고 2019년 영화제의 운영 계획을 밝히는 자리에서 ‘한국영화 100주년’을 계기로 남북한 영화 연구자들 간의 토론 자리를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최근 부산, 부천, 전주 영화제들에서 북한 영화를 상영하는 빈도가 잦아지고 있는 중에, 남북한 영화인들 간의 직접 교류를 언급한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행간에 다른 뜻을 묻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명쾌하지 않다.

남한도 영화를 만들고 북한도 영화를 만들기는 하지만 영화의 역할이나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남한 영화는 관객(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자유로운 민간 제작이지만, 북한은 당과 이념을 위한 선전 매체이자 국영으로 운영되는 사업이다. 제작기법이나 표현 양식에서도 현격하게 다르다. 우리가 고급 승용차라면 북한은 당나귀나 노새가 이끄는 수레만큼이나 차이가 난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남북한은 영화에 관한한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영화제작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해방과 함께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다소의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남한 영화는 기본적으로 산업 시스템을 확대해온 데 비해 북한은 이념선전과 교육의 수단으로 삼았다. 북한에는 영화산업은 없고 영화사업만 있다고 보면 된다. 체제가 다르고 교류와 접촉이 제한적이었던 만큼 남북한 영화계의 교류나 접촉 또한 미미했다.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만든 '사랑 사랑 내사랑'

최은희·신상옥 납치로 시작된 남북 영화 접촉

남북한 영화(영화인)의 접촉은 ‘사건’으로 시작했다. 1960년대 한국 영화계를 이끌다시피 했던 배우 최은희와 감독 신상옥은 1978년,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 당한다. 한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고 국제적으로도 특별한 뉴스로 떠올랐다.

새해 분위기가 남아있던 1월 11일 배우 최은희(崔恩姬, 1926~2018)는 홍콩에 거점을 둔 북한 대남 공작원 김규화(金奎華)·이상희(李象姬) 등의 초청을 받고 홍콩에 도착했다. 김규화는 당시 한국 모(某) 영화사의 홍콩지사장을 맡고 있었는데, 최은희에게 합작영화 제작을 제안했고, 최은희는 이 제안에 관심을 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일은 특별한 주목을 받지 않았고, 한국 배우와 홍콩의 제작자가 합작영화를 만드는 문제를 논의하는 정도로 일부 관련자들 사이에서만 알려진 수준이었다. 홍콩과의 영화교류는 이전에도 많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 사건은 그 뒤에 일어났다.

3일 후인 1월 13일 최은희는 투숙하고 있던 호텔에서 종적을 감췄다. 호텔 관계자들도, 가족들과도 연락이 끊어졌고, 행적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첩보 라인을 통해 실종 사실이 국내로 알려지면서 북한에 의한 납치 사건의 의구심이 증폭했다. 최은희는 한국 영화계의 빅스타였고, 대북 관련 사건은 훨씬 민감하게 다뤄지던 시기여서 ‘북한 납치설’이 등장하는 순간 초강력 태풍급 파문을 일으켰다.

수사 결과 김규화의 초청은 최은희를 홍콩으로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고, 북한 공작원 이상희가 강제 납치한 뒤 배편을 이용해 황해도 해주로 끌고 간 것으로 드러났다.

최은희 실종사건은 ‘신상옥 최은희 드라마’의 서막이었다. 최은희 납치의 충격이 가라앉기도 전에 최은희의 전 남편이며 감독 겸 제작자이기도 한 신상옥(申相玉, 1926-2006)도 같은 해 7월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되어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최은희 실종 소식을 알게 된 그는 최은희의 흔적을 찾아 백방으로 움직이던 중 같은 해 7월 14일 홍콩에 입국했다가 5일 만인 19일 북한 공작원에 의해 역시 강제 납북된 것으로 알려졌다.

훗날 최은희 신상옥 두 사람은 불안한 통제 속에서 생활했다고 밝혔지만, 10여년 남짓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신상옥은 감독으로 복귀했고, 최은희는 <소금> <탈출기> 등의 영화에 출연하는 등 북한 영화계에서 두 사람은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 사이 국내에서는 두 사람의 행적이 보안 사항으로 다뤄졌지만, 체코의 카를로비 바리, 모스크바, 베를린 국제영화제 등에 참석하거나 수상하는 등 국제적으로는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8년이 지난 1986년 3월, 두 사람은 북한을 탈출하면서 또 다시 세계적인 뉴스메이커가 되었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신상옥, 최은희 두 사람은 남북한 모두에서 활동한 기록을 남긴 것인데, 지금까지는 누구도 뒤따른 경우가 없었다.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불가사리>(1985)는 2000년 7월 북한 영화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수입되어 공개되었으니 남북영화교류의 물꼬를 튼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남북한 영화인들이 가까이서 만나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눈 것은 1990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뉴욕남북영화제(10.10~ 13)가 처음. 미국동부한국예술인협회가 주관한 이 행사에는 한국 측에서 강대선 감독을 단장으로 하여 강대진, 이태원 제작자, 신성일, 윤일봉, 장미희, 이미숙 배우 등이 참가했고 북한 측에서는 감독 엄길선을 단장으로 하여 오미란, 홍영희 등의 배우가 참가했다.

김정일과 포즈를 취한 신상옥과 최은희
김정일과 포즈를 취한 신상옥과 최은희

남북한 참가자들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흥을 나누기는 했지만, 남북한 교류와 접촉이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던 시절이라 한 번의 행사로 그치고 말았다. 그나마 남북한 영화인들이 제3국에서 만난 것인데, 지금의 상황에 대비해보면 북한 영화인 여러 명이 동시에 미국 비자를 받은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국내에서는 한동안 가시적인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2000년 11월에 이르러 임권택, 강우석 감독을 비롯 배우 문성근 등이 방북해 북한 영화계를 둘러보는 일이 생겼다. 이들의 방북은 민족네트워크라는 단체의 주선으로 이뤄진 것인데, 2000년 설립된 민족네트워크의 구성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방북단은 북한에서 어떤 일정으로 누구와 접촉했는지, 남북한 영화 교류를 위해 어떤 사업을 구상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 기록이 없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이뤄진 남북 정상회담을 비롯해 종교, 문화 단체들의 방북에는 상당한 대가가 뒤따랐다는 의구심을 빗대어 본다면, 영화인 방북에도 그만한 뒷거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그 규모가 얼마인지, 출처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드러난 것이 없다.

2007년에는 ‘씨네2000’이란 영화사가 영화 <황진이>를 제작하면서 황진이의 활동 공간으로 알려진 북한의 금강산과 박연폭포 등을 현지 촬영하는 기록을 만들었다. 북한 소설 ‘황진이’의 원작자인 홍석중에게 원작료를 지불했다고 하는데, 원작료가 얼마였는지, 촬영 팀의 방북에 따른 추가적인 대가가 전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의미 없는 남북 영화 교류, 의도는 정부지원금?

1999년, ‘라운규와 수난기영화’(최창호, 홍강성, 평양출판사)는 무성영화 시절 한국 영화계의 대표적 스타였던 나운규(1902~ 1937)의 생애와 활동을 다룬 평전(評傳)인데, 북한에서 나온 최초의 영화사(映畵史) 연구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 책은 그보다 2년 앞서 국내에서 출간된 ‘위대한 한국인-나운규’(조희문, 한길사, 1997)를 통째로 베끼다시피 한 것이었다. 북한의 자체 연구가 아니라 남한의 책을 복제한 표절이나 다름없었다. 북한의 영화관련 연구가 지극히 빈약하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사례로 꼽힌다.

최근 부산, 부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북한 영화를 상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불가사리>가 국내 영화관에서 상영되었을 때나 <임꺽정>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등이 TV에 방영되었을 때의 반응은 참담할 정도로 미약했다. 금기 시절에는 호기심이나 정치적 운동의 빌미로 영화를 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허용되자 오히려 관심이 줄어든 것이다. 이념 선전과 어버이수령 찬양에 열중하는 북한 영화는 다이나믹하고 세련된 기법에 익숙해진 국내 관객들의 눈높이를 도저히 따라 잡기 어렵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유튜브 등을 통해서도 수십 편의 북한 영화를 검색할 수 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지금 영화계 일각에서 북한 영화 교류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에 대한 속내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영화의 역할에 인식이 다르고 제작방식과 유통체계가 근본적으로 다른 실정에서 ‘남북한 영화 교류’라는 말은 수사적 선동 외에 어떤 효과를 기대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교류가 목적이 아니라 교류를 핑계로 편법 지원의 수단을 만들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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