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서평]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9.04.24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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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예술 작품이라고?’ 

소변기가 예술 작품이 된 지 100년이 지났다. 그 후 전보로 초상화를 대신하고, 자기가 싼 똥을 캔에 담아 똥 무게에 해당하는 금값을 받고 파는 작가도 나타났다. 50년쯤 된 일이다. 요즘엔? 뒤샹의 그 유명한 소변기에 진짜 소변을 흘려 내려서 작품을 ‘재상품화’하고, 유명 배우를 유리 상자 속에 누워 있게 하고 사람들에게 감상하게 하는가 하면, 전시실에 가상의 상황을 마련해 두고 감상자가 그 상황에서 보이는 상호작용으로 작품이 매번 새롭게 완성되기도 한다(감상자의 상호작용까지 작품의 요소라는 뜻). 

이런 흐름 속에서 예술가들은 창작하는 자유를 누렸겠지만, 감상자들은 점점 머리가 하얘졌다. ‘이게 예술 작품이라고?’ 미술관에 전시된 동시대 미술 작품 앞에서 보통의 감상자들은 당혹스러워한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보통의 감상자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러니 기죽을 일 없다. 

나조차도, 특히 상업적 갤러리들은 여전히 꽤 위압적이라고 느낀다. 프런트 데스크에는 기가 죽을 정도로 시크한 갤러리의 여직원들이 버티고 있고, 어마어마하게 넓은 대지를 차지한 아주 비싸고 세련된 콘크리트 건물에서 신비롭고 난해한 물건 덩어리들을 두고 소리 죽여 표현하는 찬미의 분위기도 불편하다. 거기다 종종 거창하게 부풀려져 의미조차 불분명한 예술계의 용어들은 말할 것도 없다.

미술계의 정회원(세계적인 도예가, 터너 상 수상자, 대영제국 3등급 훈장 보유자, 영국 왕립 미술원 회원)이자 이 책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를 쓴 그레이슨 페리의 고백이다. 
 

동시대 미술이란 무엇인가 

‘동시대 미술’이란 말 그대로 지금 시대의 미술을 뜻한다(이는 먼 훗날에는 오늘날의 동시대 미술이 다른 이름으로 불릴 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술사에서 보면 1978년 이후의 미술을 뜻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동시대 미술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 않고 ‘현대미술’로 뭉뚱그려 이야기하곤 한다. 

단순히 시기를 구분하는 말인 이 용어가 어렵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동시대 미술이 현대미술의 연장선 위에 있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의 시대에 이르러 미술의 범위는 폭발적으로 넓어져 더 이상 소묘, 회화, 조각 같은 전통적인 형식에 머무르지 않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 이미 50여 년 전에 똥도 미술이 되었고, 지금은 컴퓨터 프로그램도 미술이 되는 시대다. 그러니 보통의 감상자들에게 동시대 미술이 점점 더 낯설어 보일 수밖에. 

혁신을 말하는 건 후지다 

모든 것이 미술이 될 수 있는 시대, 달리 표현하면 미술이라는 것의 경계가 사라져 버린 시대는 역설적으로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의 경계선을 넘어선” 작품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시대다. 미술의 경계선이라는 게 사라져 버렸으므로 현대미술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근본적인 혁신이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심지어 머릿속에 새로운 아이디어라 할 만한 게 떠오르더라도 그게 새로울 거라 기대해서는 안 되는데,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십중팔구 누군가가 이미 해 버린 것일 공산이 큰 탓이다. 이 시대에 “독창성이란 잘 까먹”거나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것이다! 

만약 누군가 예술가들에게 오늘날의 최첨단 아이디어가 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피식거릴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란 현재의 트렌드를 살짝 비트는 것 정도라고 생각할 테니까. 미학적 대변동이니 문화적 격변이니 하는 건 오늘날의 예술에서는 상당히 예스러운 개념이다.

그리하여 이제 새로울 수 있는 것이라곤 예술가가 담아내려고 하는 ‘의미’와 ‘에너지’ 정도밖에 남지 않았달까. 오늘날 미술에 작가의 자의식이 강하게 끼어드는 건 이 때문이다. 예술가는 “자의식에 기초해서 ‘무엇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뿐 아니라 ‘예술이라 불리는 이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까지 성찰”해야 한다.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을 어떻게 구분할까 

예술가의 자의식이 강하게 끼어들고 표현 방식의 한계가 사라진 까닭에, 동시대 미술은 (예술가와 감상자의 자의식이 높은 수준으로 동기화되어 있지 않은 한) 오리무중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게 동시대 미술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감상의 대상이라고들 하는 이유다. 그래서일까. 이 책에서 그레이슨 페리는 개별 작품 속으로 들어가 설명하는 대신, 동시대 미술 세계가 돌아가는 원리와 예술가의 속마음을 알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 세계가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예술가들은 이런 사람들이로구나!’ 하고 알게 되었을 때 작품을 (감상에 가장 필요한 자질인) 열린 마음으로 마주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유치원생의 그림과 예술가의 작품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법이니까. 그레이슨 페리는 “예술의 경계선 때리기”라고 부르는 여덟 가지 테스트 기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 세 가지만 소개하자면, 먼저 ‘그것은 다른 무언가의 따분한 버전인가?’라는 게 있다. 예술로 정의되는 것에는 오락의 가치도 즐거움도 없다는 얘기다. 

그다음으로 ‘핸드백과 힙스터 테스트’라는 게 있다. “수염을 기르고 안경을 쓰고 싱글스피드 자전거를 끌고 온 사람들이나 커다랗고 멋진 핸드백을 든 특권층 사모님들이 무언가를 쳐다보면서 자기가 보고 있는 것 때문에 뭔가 어리둥절해하거나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면” 예술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쓰레기 하치장 테스트’도 있다. “테스트 대상인 예술 작품을 쓰레기 하치장에 두었을 때, 지나가던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는 왜 예술품이 버려져 있는지 궁금해하는 경우에만 그것은 예술 작품의 자격을 갖춘 것이 된다”는 뜻이다. 

오라! 동시대 미술의 넓고 따뜻한 품으로 

우리는 예술과 예술 감상 앞에서 소심해지기 쉽다. 학술적, 역사적 지식을 두둑이 갖추지 못하면 예술 작품을 즐길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독자 분들이 이 책에서 꼭 챙겨 갔으면 하는 메시지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누구나 예술을 즐길 수 있고 누구나 예술 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조차도 그러지 않는가! 예술계라는 마피아 집단은 에섹스의 크로스드레서 도예가인 나조차도 그 세계에 받아들여 주었다.(10쪽) 그러니까 전통적 형식의 도자기를 만드는 일조차 결국에는 환대받고 받아들여졌다.

예술계의 이런 환대는 우리가 ‘예술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감상자로서 우리는 모두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시도들을 보며 정신의 자유를 경험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 또한 독일 예술가 요제프 보이스가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듯이, (형식의 한계가 사라지고 본질적으로는 평가가 필요 없어진) 예술 활동을 통해 자신을 더 진실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레이슨 페리는 바로 이것이 예술의 본질이라 말한다. 감상을 통해서든 표현을 통해서든 결국 우리 삶을 풍요롭고 충만하게 하는 게 예술이라는 뜻이다. 

그는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과 겁쟁이 사자 같은 사람들이 좀 더 똑똑하고 좀 더 용감하고 좀 더 다정하게 예술계라는 에메랄드 시티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려고” 이 책을 썼다고 했다. 한마디로 이 책은 동시대 미술로의 초대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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