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소설 민영환과 이승만....이승만과 민영환이 구한 말 암흑 시절 대한제국 자강 자립을 위해 손잡고 뛴 이야기
[신간] 소설 민영환과 이승만....이승만과 민영환이 구한 말 암흑 시절 대한제국 자강 자립을 위해 손잡고 뛴 이야기
  • 김민성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9.10.04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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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승만(대통령)과 민영환(충정공)이 구한 말 암흑 시절 대한제국 자강 자립을 위해 손잡고 뛴 이야기를 소설로 엮은 것이다. 이미 드러난 역사적 사실 이외 당시 두 사나이와 얽힌 사건, 일화는 거의 작가 상상력으로 틈을 메웠다. 그렇지만 뼈대는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한다.

픽션 가공하는 가운데 등장한 공신원 주인 명주월, 북한산 문수암 만수 도사와 뉴욕 혈죽회 관련 인사들은 가공인물임을 미리 알려둔다.

문수암 해후 중에서

민영환과 이승만의 연대는 운명적인 거룩한 낭비 관계다. 만남과 헤어짐, 시작과 끝이 절묘하다.

그들이 처음 만난 곳은 서울 북한산 문수암이다. 바야흐로 계절이 농익기 시작할 때였다. 온 산이 봄꽃으로 물들어 바람 불 때마다 색깔 별로 파도를 쳤다. 불당 앞 계단을 서성대며 주변 풍경에 빠져든 민영환에게 갑자기 입성 깨끗한 소년이 말을 건네 왔다.

“선비님, 부처님께 뭘 빌었어요? 과거 급제, 아니면 수명장수?”

고즈넉한 암자에서 한껏 심심하던 차에 민영환은 내심 반가 왔다. 때 묻지 않은 소년의 싱그러운 말 걸기. 산사의 풍경 소리,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 개울물 소리, 산비둘기 소리도 슬슬 물릴 때 아닌가. 그런데다 질문 내용이 당돌했다.

“부처님께는 빌기보다 그냥 맡기는 게 좋아. 마음을 정갈히 갖고 부처님 앞에 앉아 소원을 다 들어주시겠지 하는 믿음으로 기다리는 거지.”

민영환이 천천히 대답하는 동안 소년은 스스럼없이 다가 와 계단 끄트머리에 걸터앉는다. 구김살이 없다. 나 홀로 산행과 오랜 침묵 끝에 몇 마디 하고나니 영환의 기분도 한결 좋아진다.

부대부인 호출 중에서

영환은 부대부인을 집안 고모이상으로 존경해 마지않았다. 마치 한국 산야 어디에나 피어나는 민들레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다는 의미다. 밟아도, 짓눌러도 다음 날 아침 노랗게 웃으며 재생하는 민들레- 수명이 다 하면 한낱 홀씨가 되어 하늘을 날다가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 그 생각을 하자 얼떨결에 마음 속 비밀을 털어놓는다.

“실은 한군데 있지만, 때가 아니라 망설인 겁니다. 노여움 푸세요.”

이 말을 듣자마자 부대부인 얼굴이 활짝 펴진다. 금방 화색이 돌며 입이 귀에 걸린다.

“그럼 그렇지. 내 똑똑한 조카가 어련히 알아서 처신할까. 욕심 많던 애비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의젓하고 절제하며 일을 순탄히 꾸며 왔거든. 그래 어떤 소녀인가?”

부대부인은 한시가 급했다. 감고당에 천주교 신자 미사가 없는 날을 골라 민영환을 오라 불러놓고 운현궁에서 가마 타고 오는 도중 왜 진작 새색시 감을 미리 찾아놓지 못 했나 후회막급이었다. 그런 판에 영환 한마디는 그녀에게 바로 감로수였다.

춘생문 거사 중에서

화이팅 선교사는 또 승만의 조선어 강사 역할에 만족, 넉넉한 급여를 지급했다. 그는 배재학당 스타였다. 왕비 살해 소식에 스타가 화를 내자 학당이 분노했다. 당시 학생 수는 109명인데 이승만이 소집하자 즉시 20여 명이 모였다. 신긍우, 신흥우 형제, 이충구, 윤창렬, 이익채 등이 북치고 장구치고 분위기를 주도했다.

“여러분, 국모가 이처럼 무참히 살해되었는데 그냥 있을 수 없소. 피 끓는 젊은 학도라면 복수하는 게 마땅하오. 기탄없는 대처 방안 제시를 바랍니다.”

비분강개한 이승만의 첫 마디가 떨려나왔다. 분노한 학동들이 이구동성으로 떠들어 댔다. 곧장 일본 공사관으로 몰려가자는 주장이 컸다. 남산 일본인 거주지 왜장대를 습격해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선동도 나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과격해졌다.

“아니, 우리가 흥분해서 행동하면 어떤 불상사가 벌어질지 몰라요. 조금 가라앉혀서 합리적 방안을 찾읍시다.”

역시 연장자인 신긍우가 과열 분위기를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곧바로 이충구가 큰 소리로 그의 말허리를 꺾어 버린다. “지금 흥분하지 않게 되었소? 나라의 국모가 왜놈들에게 난자당했는데 거기 무슨 합리적 대처를 찾나. 그것도 대낮 궁궐 안에서. 이건 화적떼나 다름없어요. 당장 막대기라도 들고 공사관으로 쳐들어갑시다.”

양자 간 논쟁이 격화하려 하자 이승만이 두 손을 버쩍 치켜들고 외쳤다. 순간 좌중이 조용해진다.

뉴욕에 뿌리 심기 중에서

1897년 7월 26일 이른 아침, 배는 미끄러지듯 뉴욕 항구로 들어왔다. 새벽 어스름 사이로 리버티 섬 자유의 여신상이 온화한 얼굴로 맞이하고 있었다. 작년 1차 사행 때 잠시 스쳐간 탓인지 자못 감회가 깊다.

자유, 평등, 박애를 혁명 공약 삼았던 프랑스가 1846년 이 여신상을 제작해 미국에 보낸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미국 민주주의를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그였지만 아직 자유의 개념은 생소했다. 갑판에서 하선을 기다리며 새삼 자신 처지를 되살펴본다.

백척간두 조선의 유럽 6개국 전권 공사로서 4개월간 이역만리 타국을 떠돌며 열심히 일했다. 갖은 설움 다 겪었다. 하지만 성과는 보잘 것 없다. 이대로는 국내 조야 대신들 지탄을 면키 어렵다. 자신을 전폭 신임하는 고종조차 역정을 낸다지 않는가.

이제 귀국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미국에 왔으니 더 할 말이 없다. 묵묵히 계획한 일을 추진해갈 뿐이다. 공개할 수 없는 사명이다. 먼 조상이 보내는 신호음에 따라 알아서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혈죽회 관련 일을 누구에게 말하겠는가.

찝찝한 생각이 그를 괴롭힐 때 하선 차례가 왔다. 걸음이 무거웠지만 1주 이상 배에서 시달린 탓인지 몸은 땅 밟기를 재촉하고 있다. 마침내 어마어마한 뉴욕 빌딩 숲을 향해 그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형님, 여기에요, 여기.”

대동국 음모 중에서

승만은 밤새 구호와 연설을 외치다 보니 목이 다 쉬었다. 그러나 그는 젊었다. 한 두 시간 꼭지 잠을 자고도 여전히 군중 사기를 돋우며 다녔다.

그렇게 혼란한 며칠이 흘렀다. 군중은 흩어지지 않았다. 체포된 간부들이 재판을 받기 위해 고등 재판소로 옮겨가자 시위대도 따라갔다.

이를 신문들이 연일 보도했다. 독립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매일신문 등이 불티나게 팔렸다. 이를 막으려 경찰력이 동원되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한때 논의된 군대 동원은 외국 공사들의 완강한 반대로 무산됐다.

역사는 경험 때문에 반복되는가. 인간의 한계인가. 이로부터 62년 뒤 1960년 4·19 학생 의거로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다. 독립 쟁취와 북한 남침의 한국동란을 극복, 12년을 집권하며 대한민국 초석을 다진 이승만 자신이 말년 자유당 독재 불명예로 물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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