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재일교포 목화선생 “선전에 속아 갔던 북한에서 나는 노예였다”
[인터뷰] 재일교포 목화선생 “선전에 속아 갔던 북한에서 나는 노예였다”
  • 박주연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19.12.18 1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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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이른바 ‘재일교포 북송’ 60년이 되는 해이다. 1959년 900여 명의 재일교포를 태운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新潟)항을 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북송사업. 이후 1984년까지 25년간 180여 차례에 걸쳐 진행된 북송사업으로 약 10만 명의 재일교포들이 고향을 떠나 낯선 북한 땅에 도착했다.

이후 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미래한국>은 북송 이후 우여곡절 끝에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다시 돌아온 한 재일교포와 전화 인터뷰를 통해 북송의 회한과 당시의 고통, 북한인권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목화 선생으로 불리는 이 재일교포의 신분보호를 위해 익명 처리한다.

- 어떻게 하다가 일본에서 북한으로 가시게 됐는지요?

한마디로 말하면 여기 60만 재일교포들이 송환될 때는 현실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가난 속에서 헤매고 있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조총련이 북한을 지상천국으로 선전하니 가보자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당시에는 일본 생활도 힘들었으니까요?

- 북한의 선전이 재일교포들에게 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군요. 당시 일본 생활은 어땠습니까?

그때 당시 제가 고등학교 1학년 16세였어요. 당시 아버지 나이가 65세이고, 어머니가 49세이었고요. 우리 형제가 다섯 명이었지요. 내 위로 세 살 위 누이가 있고, 밑에 여동생 두 명이 있었구요. 남자 동생이 막내였어요. 막내동생은 지금 한국에서 살고 있는데 아무튼 그렇게 온 가족 7명이 북한으로 가게 되었어요.

살기 힘들었으니까요. 한마디로 그 당시 북한은 왜 북송 문제를 선전했느냐 이거예요. 우리가 가겠다, 보내 달라 한 것도 아니었는데 김일성과 한덕수 조총련 의장 두 사람이 짜고 일본 온 전국을 도쿄로부터 큐슈까지 살고 있는 재일교포들에게 북한이 대우가 좋으니까 가라고 부추겼죠. 조총련 간부가 우리 집에도 너덧 번씩 찾아오고 하니 그런 선전에 넘어간 것이에요. 현지에 살고 있는 재일교포들의 생활들이 너무 어렵다 보니까 선전에 넘어간 것이죠.

조총련 간부가 네 번째 찾아왔을 때 우리 아버지가 북한으로 가겠다고 결정했어요. 그때 아버지 나이가 65세 되었을 때인데 자식들은 절 빼고 다 학생이었지요. 당시 아버지 결심은 자신의 인생보다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아이들만은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좋은 교육을 시켜야겠다고) 그리 생각한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북한과 아무런 인적관계가 없어요. 다 한국 출신들이니까요. 아버지는 충청도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경상북도 사람이었어요. 저는 가보지 못했지만…그러니까 재일교포 95%가 다 이남 출신이고 0.5%가 북한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고향에 가고 싶다고 신청한 사람보다 여기 일본에서의 생활고로 신청한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우리 아버지 경우도 하루 벌어 하루 가족을 먹여 살리셨고요. 우리 가족의 경우는 먹고 살기도 힘든데 공부하기도 힘들고 월사금도 내기 힘들고 하니까 아버지가 가기로 결심한 것 같아요.
 

- 당시 많은 재일교포들이 북한의 선전을 믿고 갔을 텐데, 일본 생활의 어려움만이 원인이었을까요?

그 당시 북한보다 한국이 못살았던 이유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 정부가 재일교포들한테는 무관심했어요. 그때 한국의 경제성장이 북한보다 못했거든요. 한국은 재일교포 60만을 받아들일 힘이 없었어요. 그때 한국은 일본 정부에서 (재일교포들을) 보내겠다고 하니까 1명당 배상금을 얼마큼씩 주면 받겠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또 당시에 한국과 일본이 일본과 북한의 교류보다 별로 없었어요. 물론 김일성도 일본과 교류가 많지는 않았지만, 김일성이 원래 깜짝골(잔머리)를 잘 쓰는 사람이니까 한덕수 조총련 의장과 짜고 다 건너보내라, 그랬던 것이죠.

속아 간 북한은 노예의 땅

- 북송된 다음 그곳에서 생활은 어떠셨어요? 그리고 어떻게 다시 탈북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북한으로 간 때가 1961년 6월이었는데 막상 가보니까 조총련이나 김일성이 선전하던 것과는 거꾸로 된 거예요. 다 거짓이었어요. 무엇이 가장 고통스러운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와 인권이 말살되어 뭐, 좌우간 살수가 없는 나라였어요. 처음에 가보니까. 경제의 자유도 없고, 사상 감정을 표현하는 표현의 자유도 없고,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자유도 없었고, 그리고 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해도 가고 싶은 대학도 못가고요. 그러니까 일본 현지에서는 모스크바요, 바르샤바요, 아무 대학이나 갈수 있다고 그렇게 요란스럽게 선전하더니 와보니까 아니더라고요.

특히 (북한 현지인보다) 일본에서 온 재일교포들은 고등전문학교 이상 상급학교에 가기가 아주 힘들었어요. 자본주의 나라에서 왔다는 딱지가 붙어가지고요. 물론 일부 학교 추천을 받아 간 사람들도 있지요. 그러나 그 경우는 조총련 소속 생활을 했던 사람들 위주고요. 저희는 조총련에 가담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혜택을 누릴 수 없었지요.

제 경우는 북조선에 도착해서 탄광에 배치 받아 석탄 캐고, 공무과에 가서 선반도 돌리고 기계작업을 했어요. 그런데 인간으로서 인권이라든가 자유는 법적으로 보장이 되어야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데 이런 면은 전혀 없었지요. 예컨대 서울에서 강원도에 가고 충청도에 간다 하면 자유롭게 못가고 (이동의 자유가 없고) 통행증이라는 것이 있어서 안전부, 그러니까 경찰에서 승인받아야 여행증명서가 발급되고 그래야 다닐 수가 있고 그랬지요. 뭐라고 할까, 동물원에 있는 원숭이나 동물 같은 인간이 되고 말았어요. 그때는 북한에서 탈북한 사람들을 일본 정부가 안 받아줘 탈북 결심을 못하다가 1980년대 말경 북한의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김만철 씨가 가족을 데리고 일본으로 배를 타고 한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일본에 남아 있는 형님이 보내준 소형라디오를 통해 들었어요. 그래서 ‘사람이 결심하면 배를 타고 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으로 가려면 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전혀 불가능하고, 중국에 가서 배를 타고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것도 불가능해 보여 단념했었습니다.

그러다 1990년대 와서 나라(북한)가 엉망이 되어 모든 정책, 경제, 행정기관들이 마비가 되고 배급이 단절되어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아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 중국으로 도망가고 그런 난리가 났습니다. 저도 기회를 보다 2006년 탈북해 중국을 거쳐 2007년 일본에 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중국 쪽으로 탈북한 동기는 이렇습니다. 당시 김정일의 지시로 인해 북한 주민이 300만 명이나 굶어 죽으니까 묘지가 많았습니다. 김정일이 뭐라고 했냐면 묘지를 모두 없애라고 했지요.

그러다 보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 묘비도 깎아지게 되었고 묘비도 땅속 깊이 묻어두고 제사를 지내야 했지요. 그래서 ‘아, 이거 노예나 같구나’, ‘이건 완전히 사람 취급을 안하는 나라구나, 내가 죽더라도 일본에 가야겠다’ 그렇게 결심했어요. 그게 탈북 동기였습니다.

1994년 6월 7일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난 조총련 의장 한덕수(오른쪽). 김일성은 한 달 후인 7월 8일 사망했다.
1994년 6월 7일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난 조총련 의장 한덕수(오른쪽). 김일성은 한 달 후인 7월 8일 사망했다.

북송의 원흉 상대로 북한인권운동 할 것

-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그런데 선생님과 비슷하게 북송된 케이스가 계속 있었잖아요. 재일교포 북송이 계속 이어지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북송 문제 발단은 이렇습니다. 일본 가나가와현이라고 아십니까? 가와사키시에 1000여 명이 사는 집단 부락이 있습니다. 1958년 8월경 그곳 모임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 ‘공화국 북반부에 진출해서 사회주의 건설에 이바지하고 싶다’며 이미 일본 정부에서 허락도 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20~30명이 모인 가운데 만장일치로 찬성해서 김일성한테 편지를 보냈어요.

이런 내용이었어요.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 차별과 멸시, 학대를 받고 월급도 제대로 받을 수 없으며 어렵고 힘들게 살면서 자식들의 교육에 있어서도 차별교육을 받는다, 그래서 도저히 못살겠다’, 그래서 김일성 수상님, 그때는 김일성이 수상이었거든요. ‘김일성 수상님이 우리 재일교포들을 받아주면 좋겠다’라고 편지를 쓴 것이죠.

그 편지를 받은 김일성이가 얼른 받아들여 1958년 9월 9일 공화국 창건 10돌 경축대회에서 ‘60만 재일동포들로부터 귀국 열망을 받았으니까 내각 결정을 거쳐 조치를 취하겠다, 우리 공화국 정부는 60만 재일교포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하고 생활 문제에 아무 걱정 없도록 모두 국가에서 책임지고 해결해 줄 터이니 어서 빨리 조국에 오라’고 그렇게 답이 한덕수 조총련 의장 앞으로 온 겁니다. 그렇게 해서 1958년 9월부터 선전 사업이 진행이 되었던 거예요.

그렇게 하여 우리 가족도 1년 후인 1959년 12월 14일 북송되었죠. 이후 (탈북해서 일본 정부에 체류를 요구하니까) 지금은 일본 정부가 ‘당시에 당신들이 북한으로 가겠다고 손을 들고 일본 정부에 제기해서 갔으니까 본인 책임도 있지 않는가’ 그렇게 말하더군요.

- 북한이 지금도 그때처럼 공작을 하거나 북송사업을 계속 하고 있을까요?

북송사업은 이미 84년에 없어졌어요. 가겠다는 사람이 없어서요.

- 그렇군요. 그러면 과거처럼 이제는 북한이 재일교포들을 다른 형태의 어떤 선전, 선동으로 다시 북한으로 데리고 가는 일은 전혀 없는 건가요?

이제는 없어요. 비밀리에 가는 사람들도 없고요. 예전에 일본에서 발생되었던 납치 문제도 없습니다. 국제적으로 하도 비판 여론이 높으니까요. 북한은 당중앙위원회 산하에 납치 등을 관여하는 대남연락소라는 기관이 있는데 한국에 남파간첩을 보냈던 것도 당분간 중지하고, 모든 것을 예전과 다르게 외국에 스파이나 공작원을 보내는 수위가 중단되었어요.

- 일본에는 북송된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분들이 꽤 많을 텐데요. 다시 데려오려는 노력이 있는지요?

많죠. 자식들도 있고 처가도 있고요. 그러나 노력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막대한 돈이 필요합니다. 우리 올 때와 또 다르거든요. 우리 올 때는 일본 돈으로 2만~3만 엔 정도만 있으면 두만강 건너 왔는데 지금은 100만 엔, 한국 돈으로 1000만~1500만 원 정도 있어야 될 거예요.

도쿄 중심부에 위치한 조총련 중앙본부
도쿄 중심부에 위치한 조총련 중앙본부

- 돈을 주면 데리고 올 수 있는 건가요?

네, 있어요. 북한이나, 중국이나 그런 걸로 돈벌이 하는 브로커들이 있으니까요. 브로커라는 게 어디까지나 돈벌이 하는 사람들이니까 사람을 잘 만나야 돼요. 양심적이고 책임 있는 사람을 잘 만나야 되는데 돈만 받아먹고 너는 갈 데로 가라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선택이 어려워요. 그리고 우리가 올 당시에는 국경경비가 아주 허술했거든요.

중국 국경 쪽에는 경비병이라는 것이 없었어요. 북한 쪽에서 두만강 때문에 한 개 연대가 20m 간격으로 보초가 서 있고 무장까지 하고 있었죠. 그러니까 북한도 군대가 하도 못 사니까 물건이나 돈을 매수하면 OK하고 보내줘요. 맨손으로 가면 그건 모험이니까 잘못하면 강물에 들어가야 하는데, 김정은이 명령했어요. 무조건 묻지도 말고 총으로 쏘라고요.

- 선생님은 ‘관동탈북자협회’ 회장으로 활동하시는데 앞으로 활동 계획이 궁금합니다.

북한의 북송 사업이 올해로 60년이 되었잖아요? 이런 짓을 한 것이 조총련이니까 총련 앞에서 항의 집회도 갖고 일본 사회나 기업을 대상으로 북한인권 심포지엄도 가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과 국제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단체들과 연대해 북한 정권의 반인도적 범죄를 계속 알리는 활동도 전개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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