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인터뷰] 김현장 전 전민련 국제협력위원장 "원조 주사파가 본 文정권 반미 코드"
[미래인터뷰] 김현장 전 전민련 국제협력위원장 "원조 주사파가 본 文정권 반미 코드"
  • 인터뷰 박주연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20.02.1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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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 주역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함께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당 대표 특보인 김현장 씨다. 그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으로 사형을 구형받았던 반미 인사로 알려져 있다. 그가 황 대표와 인연을 맺게 된 건 1989년 전민련 국제협력위원장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출소 6개월 만에 재구속됐을 때였다고 한다.

남산 안전기획부(국정원 전신)에서 20일 넘게 고문 받다가 검찰로 넘겨졌는데, 담당 검사가 황교안이었다. 그 후로 친분을 맺고 정치적 조언까지 하는 멘토까지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화제가 됐다. <미래한국>은 2월 초 서울시내 모처에서 그를 만나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과 당시 반미운동에 관해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김현장 전 전민련 국제협력위원장

- 좌파 운동권 출신들이 말하기를 평생 살아온 이념이 바뀌기란 죽기보다 힘들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전향을 하게 되셨는지요?

김영삼 대통령 당선 이후 1993년 봄이 돼서야 제가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지금도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에 다녀요. 그때 발가벗겨져 고문을 당하는데 그 당시 생각하면 지금도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납니다. 그때는 저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 다 죽이는 게 제 남은 과업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분노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생각해 보니 제가 그런 증오심을 버리지 못하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김영삼 대통령 당선으로 민주화도 됐고요. 그때 우리 꿈이 민주화 투쟁 아닙니까. 목표를 달성했는데 그 사람들이 밉다고 해도 김일성보다 더 밉습니까.

용서하지 않고서는 이 나라에 정치 발전이란 게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다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만 고민하자, 그런 마음을 먹고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내가 추구한 반미의 진짜 성격

- 감옥에서 깨달음을 얻으신 건가요?

제가 미 문화원을 방화한 사건이나 김대중 씨와 민주화에 대한 배경을 알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이해가 됩니다. 저는 1987년 양김 단일화 전까지는 김대중 씨를 신으로 생각했어요. 1982년 제가 미 문화원을 (배후)방화한 여러 이유 중 하나가 김대중의 문제도 있습니다.

대법원 확정판결 전까지 무죄추정인데도 재판 중에 한민통(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빌미가 됐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 이라는 연속극까지 만들어 빨갱이로 규정해 놓고 재판을 했습니다. 또 광주항쟁에 대해 미국의 책임을 물었던 의미도 있어요. 전방에서 몇 개 사단이 와서 시위대를 포위했지 않았습니까.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국의 철두철미한 감시 속에서 한국의 그 많은 사단을 후방으로 빼서 광주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이 미국의 동의가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두 번째는 광주항쟁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이 LA 공항에서 수많은 기자들이 ‘김대중 씨 등 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연행되고 광주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죽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한국 국민은 들쥐(레밍)와 같아서 누가 대통령이 돼도 상관없다’고 했어요.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누구 한 사람 이 말에 항의한 적이 없어요. 미국 레이건 정부가 들어선 후 저는 전두환 정권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만일 미국이 그냥 구경만 한다면 한국 사람 누가 미국을 지지하겠어요. 그런데 광주 시민들의 선지피가 마르기도 전에 미국이 전두환의 등을 두드려 주더라고요.

그 전까지 미국은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쳐주고 공산주의를 막아준 나라라고 믿었는데 이때부터 미국을 달리 보기 시작한 것이죠. ‘아, 우리는 미국의 허락 없이는 최소한의 민주주의도 못 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건 없었습니다. 직선제 한번 해보자는 거였죠. 삼선 개헌 이전으로 돌려달라는 것뿐이었어요. 다른 주장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김대중을 잡아갔으니 석방하라는 것, 전두환 물러가라는 것, 김일성 오판 말라는 것, 다른 구호는 없었다니까요? 지금은 광주를 한쪽에서는 이용해 먹고 한쪽에서는 폄하하는 것이 일상이 돼 버렸어요.

이용해 먹는 쪽은 그때 무슨 대단한 이념적인 구호가 있었던 것처럼 각색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 공작이라는 미친 소리나 하고 있고요. 광주 사건은 반사작용으로 인해 에스컬레이터 된 사건이에요. 저쪽에서 총 들고 막으니까 이쪽이 무기고 털어서 같이 대응한 것이죠.

아무튼 왜 남의 공관에 불을 질렀는가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불 지른 것 자체만으로는 제가 죽일 놈이죠. 나중엔 미국에서 김현장이를 살리라고 했어요. 김현장이를 죽이면 반미감정이 더 커질 테니까요. 1982년 3월 18일 사건인데 그해 6월 8일 아버지 부시가 부통령 할 때 전용기로 날아왔어요.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위컴 장군의 쥐새끼 발언 등이 미국의 공식 발언이 아니라 개인적인 망언이라고 하면서 비공식적으로 사과했어요.

그리고 김대중 씨 문제는 4자 필승론을 앞세워 단일화를 않고 있을 때 제가 감옥에서 단일화를 요구하는 단식을 했지만 결국 무산됐죠. 내가 법정에서 목숨까지 걸고 옹호했던 김대중 씨였지만 그 이후로는 등을 돌렸습니다. 1987년 대선에서 광주가 김대중에 몰표를 줬습니다.

누가 안 찍었는지 골라보세요. 죽었는데 아직 사망신고가 안 된 경우, 문고리 잡고 일어날 기운 없는 사람 빼고는 다 찍었어요. 그때 김대중 씨가 김영삼과 단일화를 했다면 지역감정이 조금이라도 해소됐을 텐데 그걸 안 하면서 지역감정이 더 시멘트화 된 거예요.

감옥에서 사형당해 죽을 뻔한 사람이 뭐가 무서운 게 있겠어요. 저는 제 생각대로 옳다고 믿는 대로 살아왔습니다. 저는 반미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럼 미국 공관에 왜 불을 질렀느냐, 미국의 그릇된 대한 외교정책의 시각을 교정해주려고 했습니다. 미국과 우리는 수평관계이지 상하관계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당시 언행을 보면 미국은 우리나라를 상하관계로 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필리핀 취급도 못 받은 겁니다. 제 사건으로 인해 미국이 다음부터 말조심하게 됐죠. 요즘도 보세요. 얼마나 말조심합니까.

비록 폭력적인 방법이었지만 제가 그런 반미를 통해 한 측면으로는 미국을 각성시키고 한국에 대한 상하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가도록 한데 공헌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세요. 미국을 각성시키려면 다시 광주항쟁 두 배 되는 시위를 조직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어요? 그리고 그것도 몇 십 년 걸려요. 그래서 비상수단을 쓴 거예요. 그걸 알아야 돼요.

지금도 내용이 그대로인지 모르겠지만 한미방위협정을 보면 무기는 삼팔선 이북에서 쳐내려올 때만 사용한다고 규정돼 있어요. 그 점이 중요해요. 어린 학생들이 민주화해서 삼선 개헌 이전으로 전환하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했는데 거기에 총알을 쏴버리도록 돼 있나요? 5월이라도 꽤 더운 날씨에 저수지에서 목욕하는 애들을 향해 쏴버렸잖아요. 그게 5·18이에요.

그런데도 그런 정권을 지지하고 군대 이동을 용납했다는 것은, 미군 사령관이 사인했다는 것은 미국이 이곳에 있는 존재 이유를 부정한 것 아니냐는 거예요. 그래서 전 물러가라고 한 것이다,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냥 있어라, 내 말 틀립니까? 그런 거예요. 우리가 무슨 공산주의자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김일성 만세 한 번도 부른 적이 없어요.

불타는 부산 미 문화원
불타는 부산 미 문화원

미 부산 문화원 방화 사건의 배경

- 그렇군요. 2013년 박근혜 정부가 발족시킨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돼 활동하셨죠. 어떻게 인연을 맺었습니까.

한나라당에도 이재오 의원 등 남북연방제 통일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야당은 거의 100퍼센트이고요. 자칫 잘못하면 통과될 수가 있는 거예요. 연방제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박근혜 뿐이겠구나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간에 여러 일들이 있었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직접 연락을 받고 인연이 되어 도왔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제가 손해를 보더라도 거짓이 없이 있는 그대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박근혜 지지 연설을 하는데 제가 살아온 것을 얘기하면서 지역감정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어요. 사람들이 김대중 이후 최고의 연설이라고 하더군요.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박근혜가 당선되겠다고 말들 하더군요. 이회창 후보 때의 (전라도) 지지 0.3%를 우리가 10%로 만들어냈습니다. 부족한 2%를 내가 채운 거예요. 그때 한광옥, 김경재, 6·3항쟁 서울대 정치학과 김중태, 그리고 김지하까지 온 거예요.

미 문화원 방화사건을 보고 김일성이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이 사건을 두고 북한 공작원이 저질렀다고 했어요. 그런데 잡아넣고 보니 제일 보수적인 고신대생들이거든. 의대, 약대 다니는 아이들, 심지어 미성년자까지 있었어요. 그러니 얘들이 빨갱이라고 내놓을 수 없잖아요. 그때 저한테 걸린 현상금이 광주사건으로 5천만 원, 미 문화원 방화사건으로 5천만 원으로 1억이 저한테 붙었습니다.

제가 간단하게 살지는 않았어요. 남 흉내 내면서 사는 성격도 아니고요. 그렇게 살아도 짧은 것이 인생인데, 거짓이 할 짓이에요? 누가 당신 스승은 누구냐고 물으면 전 바를 정(正)자라고 얘기해요. 제가 타협 없이 인생을 사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도망가죠. 또 한 가지, 제가 감옥에서 사형을 받고 있으니 돈도 명예도 벼슬도 아무 의미가 없게 느껴지더군요. 죽음이 찾아오면 맞이하는 거구나, 그걸 이기겠다고 하는 게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 인간이 어떻게 죽음을 이겨낼 수 있겠어요? 나에게 찾아오는 순사인데, 맞이해야죠.

그때 제 나이가 서른인데 하고 싶은 일은 얼마나 많았을 것이고 제 심정이 어떻겠어요. 국회의원 시켜줄 테니 뜻을 굽히고 김대중 밑으로 오란 말이 그런 저에게 먹히겠어요? 내 남은 인생을 지역감정 해소하는 데 한번 바쳐보자는 결심을 한 겁니다. 손바닥만 한 땅덩어리가 남북으로, 그것도 동서로 또 갈라져 있으니 사회적 비용이 엄청납니다. 그래서 국민통합에 들어간 거예요. 제가 거리낌 없이 얘기했고 박 전 대통령이 귀담아 들었죠. 들을 만한 가치가 있고 다른 사람들과 목소리가 달랐기 때문에 들은 거예요.
 

- 문재인 정부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어요. 문재인 청와대에 임종석 전 비서실장 등 반미주사파 출신 학생 운동권이 많이 들어가 있는데, 보시기에 이들은 어떻습니까.

잘못됐다고 봐요. 임종석이 한양대 시절 전대협 의장 할 때 내가 이부영 의장 대신 전민련(1989년 1월 21일 결성된 재야민족민주운동의 전국적 조직. 줄여서 전민련) 대표로 가서 축사를 해줬어요. 그런 인연이 있지만 문제는 우리 반미운동의 본래 의도나 의미를 확대해석해서, 좋게 말하면 자기들 유리한 대로 왜곡해서 끌고 갔어요. 주사파들은 책을 열권 이상 읽은 사람이 없죠.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한 사람들은 옛날 통일혁명당 사건을 계승했다는 남민전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심지어 김일성 주체사상파가 아니면 사람 취급을 안 했으니까요. 그랬던 사람들이 요즘엔 안 그랬던 것처럼 하고 다닙디다. 아무튼 제 사건이 나니까 김일성이 깜짝 놀랐어요. 간부회의에서 뭐라 그랬냐 하면, ‘김현장 동지 부산 미문화원 방화투쟁은 보천보 투쟁보다 더 영웅적인 투쟁이다’ 이렇게 규정을 했어요. 북한 노동당 최고 간부회의에서 제가 영웅이 돼 버린 거예요.

그래서 북쪽에서 온 사람들이 나를 보면 깜짝 놀라요. 공화국 영웅을 만났거든. 북쪽에서 나한테 몇 번 뭣이(연락으로 해석) 왔어요. 밝힐 수는 없지만. 내가 뭐라 했냐면, ‘내가 그쪽에서 영웅 노릇하느니, 여기서 무기징역을 사는 게 더 낫다’고 했어요. 그러니 저한테 더 접근하겠어요? 안 오죠. 김일성 만나러 갔던 (강철서신) 김영환하고 서울대 정치학과 나온 조유식 이 친구들은 김일성이 시조고 김현장을 중시조라고 생각했던 친구들입니다. 그런데 김현장이 빠져나가니 얼마나 자리가 허전했겠습니까.

제가 ‘너희들이 한번 가봐라’ 그랬더니 이 놈들이 김일성이를 두 번인가 세 번 만나고 와서 안기부로 갔더구만. 그런데 가보니 북한이 저희들이 생각했던 사회가 아니거든. 조유식이 갔다 와선 저한테 “선배님 죄송합니다” 그래요. ‘뭘 죄송해, 내가 한번 가보라 했잖아.’ 제가 그런 사람이에요.
 

주사파의 반미운동은 초근목피 과거에나 통할 시대착오

김일성 주체사상과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이 반미운동으로 결합이 돼 버린 거예요. 그렇게 확대돼 버린 것이죠. 본래 내 생각과 상관없이 그렇게 돼 버린 거예요. 그래서 어디 가면 제가 죽일 놈이 돼 있기도 하죠. 정치는 오늘보다 내일이 낫고 국민 생활을 더 나아지도록 하는 것 아니겠어요? 김일성 사상이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까?

안 되잖아요. 김일성 사상 읽어보면 우리가 옛날 초근목피로 생활하던 시절 1920년대 만주 유랑하던 시절에나 먹힐 수 있는 이론이에요. 저는 김일성 주체사상 읽어보곤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무엇 때문에 현혹돼서 그렇게 가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더라고요.
 

- 김 선생님은 그렇게 보시는데, 정작 한총련 이후 세대에서 반미운동이 크게 확산됐네요.

잘못된 거죠. 크게 잘못됐죠. 그럼 자기들은 북한에 가서 살 수 있습니까? 못 살아요. 우리나라가 얼마나 잘 사는지 몰라. 외국에 한번 나가 보세요. 문재인 정권은 빨리 축출돼야 할 대상입니다. 저 사람들은 민주화 세력이라고 하지만 지금 민주주의를 하고 있습니까? 삼권분립 다 허물어버렸잖아요. 누구를 위한 정권이에요? 우방을 우방으로 생각합니까? 오직 두려워하고 쳐다보는 것은 새파란 김정은 아니에요? 북한 삼대 초상화를 쳐다보고 산 사람들이에요.
 

- 주사파 계보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겠어요.

주사파 대장을 김근태가 하다 갔어요. 부시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국회 연설을 김근태가 해요. 평양방송에서 나올 법한 말을 해요. 김근태하고 내가 유신 때 지하신문도 만들고 했는데, 잘 아는 사이에요. 김근태 부인 집안도 마찬가지죠. 내가 원래 대학 때부터 유명한 르포 기자였어요. 빈민이나 무주택 문제에 대해서 글을 썼어요. 조갑제 선배가 국제신문 기자였고, 내가 대학생으로 용쟁호투식으로 글을 발표했어요.
 

- 답답한 시국에 걱정하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저는 지금 ‘좌파 운동권 세력의 득세’ 이런 사태를 언젠가는 꼭 한번 겪어야 할 진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말하자면 사회주의, 마르크스 레닌이 주저앉는 것을 보고 죽어버린 사람이 내 주변에도 두어 사람이 있어요. 러시아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통곡을 해버린 거예요. 내 청춘을 바쳐 투쟁해왔던 이상의 종점이 이것인가, 조영래 변호사도 그런 사람이죠. 신념과 철학이 빠져나가니 허수아비가 돼 버리잖아요. 그러니 병이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 양반은 진짜 천재인데 폐암으로 갔잖아요. 김근태도 그렇잖아요.

그런 사람이 많아요. 보수정치의 가장 큰 잘못은 관제 빨갱이를 만들어냈다는 거예요. 안기부에서 한 건 해야 되고, 치안본부에서 한 건 해야 되고 제일 만만한 게 제일교포였죠. 옆집에 조총련 안사는 집 없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두드려 패서 만든 것 아니에요? 나도 당해봤지만 공산주의자는 고문을 당해도 다시 삽니다. 신념이 있기 때문인데, 그게 생명력이죠. 평양에서 날 기억한다, 우리는 혁명을 위해 산다, 죽어도 열사릉에 묻힌다, 이런 의지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좌절감, 분노, 억울함 이런 것으로 병이 들어 죽습니다. 한두 명을 본 게 아니에요. 제가 볼 때 (지금 간첩 공산주의자라고 의심받는 사람) 70%가 가짜예요. 그러니 공안이 간첩 잡았다고 해도 안 믿잖아요. 저놈들 또 한 건 했다고 생각하잖아요. 맨날 늑대가 나타났다고 하다가 진짜 늑대가 나타났는데도 안 믿듯이 똑같은 짓을 한 거죠. 씨족 사회인데 남의 귀한 자식을 빨갱이 만들어 연좌제로 고통 받고 그런 것을 사과해야죠.

제가 황교안 옆에 있는 것은 부족한 2%를 채워주는 거예요. 국회의원 하라고 해도 안 한 놈이 이제 와 무슨 벼슬을 하겠소. 멍석 깔아줘도 안 한 놈이 이제 와 뭘 합니까. 황교안은 알아요 제 단심을. 대금 소리가 아름다운 건 속이 비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마주하면서 제 욕망을 버리고 비우니 한 단계 더 높아진 느낌이 듭디다. 전라도 풍토에서 제가 비웠으니 그렇지 다른 사람 같으면 숨도 못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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