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구조조정 없는 한국형 양적완화, 소득양극화 키운다
[심층분석] 구조조정 없는 한국형 양적완화, 소득양극화 키운다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20.09.0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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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재확산이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다. 기업들과 금융권이 비명을 지르자 한국은행이 구원투수로 나섰다. 한국은행은 지난 3월 ‘제로금리 불사’를 외치며 금융회사들을 상대로 환매조건부채권(RP)을 모두 사들이는 내용의 ‘전액 공급방식의 RP매입 제도’를 실행했다. RP란 금융회사들이 보유한 국공채 등을 담보로 한국은행에 돈을 빌리는 방식이다. 8월 26일 현재 종료를 통해 33개 금융회사에 18조6900억 원 규모의 유동성이 시중에 공급되었다고 한국은행은 발표했다.

문제는 이렇게 풀린 유동성이 과연 생산유발을 통해 국민소득을 늘리고 고용을 증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미 미국과 일본, EU의 천문학적인 양적완화는 그 효과가 목표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독일 헌법재판소는 지난 5월 유럽중앙은행(ECB)의 코로나를 위한 양적완화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유럽은행의 양적완화에 제동 건 독일 헌재

독일 헌재는 결정문에서 ECB가 2015년부터 시작한 공공채권 매입 프로그램(PSPP)이 ECB 권한을 넘어선다고 판단했다. PSPP는 ECB가 국채 등 공공채권을 매입하는 프로그램으로 ECB의 대표적 양적완화 정책이다. 2018년 이후 중단됐다가 지난해 말 재개됐다. 현재까지 ECB가 PSPP로 매입한 채권 규모는 2조 유로(약 2647조 원)가 넘는다.

독일 헌재는 판결문에서 “ECB는 PSPP로 인해 달성할 수 있는 통화정책의 목표와 그 여파로 발생하는 경제적 영향 사이에 균형을 잡는 데 실패했다”며 “(양적완화의) 부정적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부정적 영향으로는 △장기 금리 하락에 따른 저축 이자 손실 △기업의 자금 조달 용이로 인한 ‘좀비 기업’ 등장 △자산매입 장기화 부담 증가 등을 들었다.

유럽중앙은행의 입장은 ‘일부 자산시장에 불균형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성공적’이라는 주장이다. 학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서 양적완화의 영향은 한 목소리로 통일되지 않지만 양적완화로 인해 자산가들이 먼저 수혜를 입는 상황이 있었다는 점에는 대체로 실증적인 연구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한마디로 양적완화가 ‘부의 불평등 확대’를 가져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중앙은행이 금융시장의 신용경색 해소와 경기 부양을 위해 정부의 국채나 여타 다양한 금융 자산의 매입을 통해 시장에 직접 유동성을 공급하는 정책을 말한다. 양적완화는 정책 금리가 0에 가까운 초저금리 상태여서 더 이상 금리를 내릴 수도 없고 재정도 부실할 때 경기 부양을 위해 사용된다. 이는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조절해 간접적으로 유동성을 조절하던 기존 방식과 달리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시장에 통화량 자체를 늘리는 통화 정책이다.

미국은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 이후 그해 11월과 2009년 3월 그리고 2010년 11월(2011년 6월 QE2 종료) 등 두 차례의 양적완화를 시행한 바 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양적완화는 실물경기 회복에 기대만큼 미치지 못했다. 이에 따라 2012년 9월 13일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는 매달 400억 달러 규모의 주택저당증권(MBS)을 사들이고 0% 수준의 기준금리를 2015년 중반까지 유지하기로 한다는 3차 양적완화(QE3)를 발표했다.

이후 저금리의 풍부한 자금이 풀리면서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이던 경제성장률이 2014년 상반기에 4.6%까지 회복되었으며 실업률이 하락하는 등 경기 부양 효과가 나타났다. 이에 따라 3차 양적완화 정책은 2014년 10월 종료되었다. 일본의 경우 2001년 3월 일본은행이 장기간의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처음으로 양적완화를 실시했다. 일본의 양적완화 정책은 이후 2006년 3월 종료 시점까지 5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그다지 효과는 보지 못했다.
 

1:99 논쟁 불러온 미국의 양적완화

미국의 양적완화가 금융위기와 실업을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 소득 불평등 문제를 심화시켰다는 지적도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2011년 7월 미국의 온라인 잡지 <애드버스터스>는 트위터 등 SNS를 통해 월스트리트에서 소득불평등에 대한 시위를 제안했다. 그해 9월 17일부터 시작된 이 시위는 ‘Occupy Wall Street(월가를 점령하라)’라는 구호와 함께 1:99 논쟁을 벌여 유명세를 탔다. 월가 시위는 이후 유럽에도 번졌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원적 물음의 시위의 배경은 반 세계화 운동에 불을 지폈다.

미국 정부는 2008년 발생한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 금융회사 등을 살리기 위해 국민 혈세로 모은 천문학적 규모의 구제금융을 월가에 투입했으나 월가 금융회사들은 보너스만으로 200억 달러를 나눠 갖는 돈잔치를 벌였다. 반면 압류주택 통보를 받은 주택은 9개월 연속 증가하는 등 2008년 이래 미국 시민들의 소득 양극화가 심화됐다는 보고들이 홍수를 이뤘다.

2015년 5월 뉴욕타임스는 벤 버냉키 미국 중앙은행(연방준비제도) 전 의장이 자신이 주도한 초저금리를 통한 양적완화 정책이 소득불평등을 초래했을 수도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금리·통화 정책이 직접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악화 또는 완화하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소득과 자산의 분배에 일정 수준 이상의 영향을 미친다”고 적었다. 같은 시기에 파이낸셜타임스는 “양적완화는 빈곤층을 희생양 삼아 부유층을 도운 정책이었다는 지적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역시 칼럼을 통해 “양적완화 정책은 자산을 많이 가진 이들의 주머니만 불렸다”고 전했다. 양적완화가 자산과 부채를 많이 가진 이들만 혜택을 보고 연금생활자 같은 이들이 손해를 봤다는 주장은 일본과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했다.

이를 한국은행의 이번 양적완화에 대입해 보면 어떤 프로세스가 등장할까. 먼저 한국은행의 18조 원을 넘는 양적완화 혜택의 1차 수혜자는 다름 아닌 부실화된 33개 금융회사들이 된다. 이들이 먼저 한국은행으로부터 유동성 공급을 받게 되면, 이들은 감원이나 임금동결과 같은 구조조정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더구나 경영실태 개선으로 보너스까지 지급받게 된다. 이어 이들이 보유한 부실 채권에 대한 회수가 유보되고 투자나 융자가 계획대로 집행되면 이 금융회사와 거래했던 부실 기업들이 2차 수혜를 입게 된다. 결국 이 기업들도 한국은행의 양적완화가 아니었다면 채권회수에 의해 구조조정을 하거나 감원을 했어야 하지만 이런 자구행위들이 유보되게 된다. 바로 독일 헌법재판소가 ‘양적완화가 좀비기업들을 양산했다’는 평가를 내리게 된 이유다. 양적완화의 부작용으로 도덕적 해이, 즉 모럴 해저드가 발생하게 되는 이유다.
 

한국은행의 18조원을 넘는 양적완화 혜택의 1차 수혜자는 다름 아닌 부실화된 33개 금융회사들이 된다.
한국은행의 18조원을 넘는 양적완화 혜택의 1차 수혜자는 다름 아닌 부실화된 33개 금융회사들이 된다.

3000조 원, 일본 양적완화 실패가 의미하는 것

일본은행(BOJ)은 1차 양적완화 직전인 2013년 3월말 137조8026억 엔(약 1378조 원)이었던 일본의 본원통화량을 2016년 441조3720억 엔(약 4413조 원)으로 무려 303조 엔(약 3030조 원)이나 늘렸다.

4년간 불어난 통화량은 양적완화(QE)의 원조격인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단행했던 QE1·QE2를 능가하는 규모였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 그 자체였다. 디플레 탈출의 지표인 소비자물가는 양적완화 초기 엔저로 인한 수입물가 상승 덕에 잠시 오르는 듯했으나 마이너스 금리를 시행한 2016년에는 물가 상승률은 목표치인 2%는 커녕 -0.1%를 기록했다. 코로나 영향이 없던 2019년 기준으로도 물가상승률은 0.5%를 밑돌았다.

1990년대 일본 기업들은 은행 부실에도 불구하고 사내유보금이나 자산 매각 등을 통해 투자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경제가 장기간 저성장한 것은 총요소생산성이 하락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들이 제시됐다. 실증분석 결과 일본 전체 산업의 생산성은 1980년대 3.7%에서 1990년대 2.3%로 둔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특유의 온정적, 연공서열적 노동정책구조에 대한 개혁 실패와 IT산업에 대한 투자 부진과 같은 뼈아픈 지적들이 나왔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의 이자율과 소비세에 대해 원칙 없는 단기 땜질식 처방이 일본 기업들과 가계에 투자나 소비보다 부채를 청산하는 디레버리징을 불러왔다는 지적이 있다. 이렇게 되면 정부의 유동성 공급이 효과를 잃는다. 돈이 다시 은행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부 실패가 일본 경제의 오랜 불황의 늪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 이의를 제기하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이와 관련 2015년 국회예산처가 발간한 <일본경제 장기침체 특성과 대응정책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는 중요한 지적이 있다. 일본의 장기침체 극복 노력이 한때 성과를 보였던 시기에 대한 분석이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에 의하면 1990년 초 일본의 부동산 버블 붕괴 이후 금융권의 자금지원 확대가 기업부문의 구조조정을 지연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상업은행들은 버블 붕괴 이후 자본적정성 훼손을 우려해 정상 기업에 대한 여신은 축소한 반면 부실기업에 대해서는 오히려 대출기간 연장 및 이자면제 등을 통해 자금을 추가적으로 지원했다.

이에 따라 금융지원을 받는 좀비기업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버블 붕괴 이전 4 내지 6%에서 1990년대 후반에는 14% 수준으로 급격히 증가해 부실기업의 퇴출이 지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즉, 금융지원을 받는 기업이 증가할수록 정상기업의 고용 및 투자가 위축되었으며 생산성이 낮은 기업의 퇴출을 저해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경제 전반의 생산성과 역동성이 저해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자산버블 붕괴 이후 부실채권 처리 지연도 경기회복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에 고이즈미 총리는 공공개혁, 금융개혁, 규제개혁과 민영화 등 과감한 제도개혁을 추진했다. 간소하고 효율적인 정부를 목표로 행정기구를 축소(1부 22성청 → 1부 12성청, 국가공무원 수 : 5년간 5% 이상 감소, 공무원 인건비 축소 등).개편하고 국가자산을 매각해(10년 간 1/2수준으로 감축계획 발표) 국가채무상환 계획을 발표하는 등 재정정책의 방향을 경기부양에서 재정건전화로(공공투자의 70%에 달하는 지방양여금을 대폭 삭감)전환했다. 부실채권 처리와 정책금융을 축소하기 위해 국영은행의 민영화를 추진했고, 기업의 자금조달 환경 개선, 노동시장의 유연성 강화, 각종 규제 철폐 등을 통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여 설비투자 증가를 촉진했다.

최저 자본금 규제 철폐, 유한책임사업조합 도입, 출자이익에 대한 비과세 등을 통해 창업을 활성화하고 수도권 집중을 억제하기 위한 수도권 지역의 투자 규제 등 기업활동을 가로막는 1000건 이상의 규제를 3년 동안 철폐했다. 우정사업을 공사화하고 민간참여를 확대해 자금(우편저금 360조 엔)이 공공부문에서 민간부문으로 전환되도록 해서 금융 및 재정의 효율화를 도모했다. 2003년 이후 고이즈미 개혁과 세계경제가 회복되면서 일본경제도 활기를 보였다.

2003~2007년 중 일본의 실질경제성장률은 1.9%로 1997~2002년(0.1% 성장)보다 성장률이 크게 개선(1.8%p)되었다. 동기간 중 세계경기 호조로 총수출의 성장기여도가 연평균 0.4%p에서 1.3%p로 상승(0.9%p)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고이즈미의 구조개혁 정책이 경제성장률 제고에 적지 않게 기여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자산거품 막으려면 생산성 높여야

대한민국도 일본과 같은 구조적 장기침체로 이행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다. 조윤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은 최근 국회의원 연구모임인 ‘우후죽순’에서 발표자로 참가해 “한국 경제가 일본처럼 장기침체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지금과 같은 추세로 가면 10년 내 0%대 성장이 될 수 있다”라며 “한국 경제의 지속발전을 위해서는 사회 전반적 혁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6월 한은이 화폐를 발행해 시장에 공급한 ‘본원통화’는 1년새 28조1361억 원(15.7%)이 늘어났지만 통화승수는 사상 처음으로 15배를 밑돌았다. 돈이 회전하는 속도, 즉 ‘통화속도’가 사상 최대로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돌지 않은 돈들은 은행이나 금융상품, 부동산과 같은 자산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유동성과 자산 인플레이션 간에 인과관계가 성립한다는 점은 한국은행을 비롯, 여러 학자들과 기관들의 실증적 분석들로 제시됐다.

한국은 지금 구조적 불황속에 양적완화와 재정확대로 자산 거품이 형성되고 있다는 시그널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이런 거품은 반드시 시장에 의한 조정 과정을 거치게 된다. 따라서 일본식 장기침체에 접어들지 않기 위해서는 늘어난 유동성이 실물경제로 흘러갈 수 있게 규제를 풀고 투자 유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지만 문재인 정부가 反시장적, 親사회주의 제도적 이념을 고수하는 한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에 집권 여당인 민주당은 귀 기울여야 한다. 그것도 너무 늦지 않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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