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긴즈버그 대법관 죽음이 불러올 美사법부 변화
[심층분석] 긴즈버그 대법관 죽음이 불러올 美사법부 변화
  • 조평세 미래한국 편집위원·트루스포럼 연구위원
  • 승인 2020.09.30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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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겨울 워싱턴DC에서 펼쳐지는 생명의 행진. 미국 보수 기독교계가 중심이 되는 낙태반대 행진
이다.

대통령 선거일을 불과 45일 남긴 지난 9월 18일, 미국 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1933~2020)가 사망하면서, 이미 한창 뜨거워진 미국 대선 경주에 새로운 기름이 끼얹어졌다.

미국 민주당과 대부분의 주류 언론은 4년 전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이 오바마가 지명한 대법관 후보 인준을 끝까지 거부했던 것을 지적하면서, 이번에도 최소 대선이 끝날 때까지 트럼프 대통령의 대법관 후보 인준을 미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당시 공화당은 스칼리아 대법관이 사망했을 때 오바마가 후임으로 지명한 메릭 갈랜드 판사의 인준청문회를 의회가 폐원할 때까지 300일 가까이 거부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취임 즉시 스칼리아의 후임 대법관으로 닐 고르서치를 새로 지명했고 상원은 54대 45의 표결로 이를 인준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동성결혼 및 낙태 지지 등으로 유명한 진보·좌파의 영웅이자 ‘페미니스트 아이콘’이다. 2013년에는 연방대법관으로는 처음으로 동성 결혼식의 주례를 맡기도 했고 2015년에는 한국에도 방문하여 김조광수-김승환 동성애 커플, 트랜스젠더 하리수,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 등을 직접 만나 격려하기도 했다.

2018년에는 그녀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와 전기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원제: On the Basis of Sex)이 개봉되어 일반 대중에도 널리 알려졌다. 미국 리버럴 주류 언론은 물론이고 한국의 언론들도 긴즈버그의 삶과 이념을 미화하며 ‘영웅 만들기’에 나서고 있지만 보수주의자에게는 결코 영웅일 수 없는 인물이다.

사실 그녀의 행적을 놓고 보면 그녀는 차라리 운동가나 정치인이라면 모를까 과연 법관으로서 마땅한 인물이었는지도 의문이 남는다.

어쨌든 긴즈버그의 죽음으로 보수 유권자들에게는 고르서치의 임명과 지난 2018년 극심한 논란 끝에 임명된 브렛 캐버노에 이어 또 한명의 보수 대법관을 앉혀 연방대법원의 이념적 균형을 뒤집을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확실한 보수주의자인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를 지명할 예정이다.

그러나 대선을 코앞에 두고 공화당이 대법관 임명을 강행하는 모습은 선거에 불리하게 작용할 위험 부담이 매우 큰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긴즈버그는 사망 전 손녀에게 “나의 간절한 소원은 다음 대통령이 내 후임을 정하는 것”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고 알려져 공화당에 안겨진 정치적 부담은 더 커진 상황이다.

하지만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은 분명하다. 바로 보수주의 대법관 한명의 임명이 공화당 대통령의 재선이나 공화당 의원 당선보다 더 중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보수 유권자는 이런 때를 위해 공화당에 권력을 위임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33-2020) / 위키피디아
미국 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1933-2020) / 위키피디아

‘사활이 걸린’ 미국 진보좌파

낙태시술을 제공하는 가장 큰 업체인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의 알렉시스 맥길-존슨(Alexis McGill-Johnson) 회장대행은 지난 6월 바이든 대선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이번 선거는 문자 그대로 사활이 걸린 선거”라고 했다.

실제로 수백만의 생명을 잔인한 죽음으로 몰아온 업체의 대표가 ‘사활(life and death)’을 이야기하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지만 사실상 트럼프 대통령 재선은 낙태업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긴즈버그의 ‘때 이른’ 죽음으로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대법원이 뒤집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런 위기 의식을 대변하듯이 민주당과 좌익세력은 거의 발작 수준으로 반응하고 있다. 사회주의 성향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지오 코르테즈는 SNS 등을 통해 “[긴즈버그가 죽은] 이 순간이 여러분을 과격하게 만들길 바란다(let this moment radicalize you),” “집단운동이 답이다,” “긴즈버그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주어야 한다”고 말하며 추종자들을 선동하고 있다.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대법관 수를 늘려버리겠다(pack the court)”고 협박하기도 하고 또다시 대통령 탄핵절차에 들어가겠다고 겁박하기도 한다. CNN의 어느 앵커는 뉴스 방송에서 격분에 차서 “현 체제 전체를 폭파시켜버려야 한다(blow up the entire system)”고까지 말했다가 발언을 철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헌법에 따르면 이번 대선 전 공화당의 대법관 임명은 절차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단 미국 헌법은 대법원에 공석이 생기면 현직 대통령이 대법관 후보를 지명하고 상원이 이를 인준해 최종 임명할 것을 매우 간결하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2016년 오바마가 대법관 후보를 지명할 때 긴즈버그 스스로 말했듯이,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해에는 대통령이 아니라는 말은 헌법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대법관의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 후임 대법관 선택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내용도 물론 헌법에 없다.

만약 긴즈버그가 자신의 이념 성향과 가까운 대통령이 자신의 후임을 지명하기를 원했다면 그녀는 오바마 임기 때 대법관 자리를 양보했어야 했다. 긴즈버그는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2009년에 처음 췌장암 진단을 받았으니 그럴 기회가 8년 동안 있었다.

선례를 따져봐도 이번에 공화당이 트럼프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 인준을 강행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미국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나 레임덕 기간에 대법관 공석이 생긴 경우는 미국 역사상 총 29건이 있었다. 이런 상황을 맞은 22명의 미국 대통령은 모두 어김없이 새로운 대법관 후보를 지명했다. 그중 19건의 경우에는 대통령과 상원의 다수가 같은 당이었고 이중 17건에서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 후보가 인준이 되었다.

반면 대통령과 상원이 서로 다른 당이었던 나머지 10건의 경우에는 2건에서만 대통령의 후보가 인준이 되었다. 결국 민주당 대통령과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이 있었던 2016년에 대통령의 후보가 인준을 못 받은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고, 대통령과 상원의 다수(100명 중 53명)가 같은 공화당인 이번에는 대통령의 후보가 인준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인 셈이다.

선거일이 임박하기 때문에 인준 절차를 가질 시간이 충분히 없다는 민주당의 주장도 어불성설이다. 긴즈버그는 1993년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후보로 지명된 지 42일 만에 상원 인준이 되었고 첫 여성 대법관인 산드라 데이 오코너는 1981년 33일 만에 인준이 되었다. 1975년 포드 대통령이 지명한 존 폴 스티븐스는 단 19일 만에 인준되었다. 법무부와 FBI 등의 후보 검증과정 절차가 없었던 이전에는 대통령의 지명과 상원의 인준이 단 하루 만에 이뤄지기도 했었다. 아직 11월 3일 대선까지 한 달 이상을 남겨놓은 공화당은 보수 대법관을 인준할 충분한 시간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22일 라스무센 여론조사에 의하면 83%의 공화당 유권자들이 트럼프가 새로운 대법관을 선거 전에 임명하기를 원한다고 응답했다. 폭력 선동과 정치적 협박에 굴복해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것은 보수 유권자들에 대한 유례없는 심각한 기만행위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공화당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을 임명한다고 해서 보수진영의 입장을 만족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8년 임기 중 가장 큰 실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딱 두 번의 실수를 했는데 그 두 실수 모두 지금 대법원에 앉아 있다”고 대답했다.

그가 임명한 얼 워런 대법관은 공공학교에서 기도를 못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레이건과 부시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들도 결정적인 순간에 보수주의적 입장에 반하는 스탠스를 취하곤 했다. 그래서 더 민주당의 협박에 굴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보수주의적 신념이 가장 확실한 대법관을 임명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트럼프 임기 중 연방대법원의 이번 공석 발생이 매우 뜻깊은 이유는 바로 반세기 동안 무려 6000만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낙태를 다시 불법화하고 막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기 때문이다. 낙태를 사실상 합법화한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 이후 가톨릭을 포함한 미국 기독교 진영은 꾸준히 낙태 반대 목소리를 키워왔다.

1974년부터 매년 겨울 미국 전역에서 워싱턴DC에 모이는 ‘생명행진(March for Life)’에는 이제 수만 명이 모이고 있으며 이들 ‘프로라이퍼(pro-lifer)’들은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단일이슈유권자(single-issue voter)’ 세력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사실상 이들 기독교 세력은 1980년 강력한 태아생명 옹호자인 레이건 대통령을 배출해내고 이어 두 명의 부시 대통령과 2016년 트럼프 대통령까지 당선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50년 가까운 ‘프로라이프(Pro-Life)’ 투쟁의 열매

특히 미국 기독교가 2016년 트럼프를 지지하게 한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다름 아닌 ‘프로라이프’ 대법관을 임명하겠다는 그의 약속이었다. 실제로 미국 복음주의 목회자의 대선 투표 동기 중 1위가 ‘대통령의 대법관 지명권’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 공약대로 지금까지 낙태에 확실히 반대하는 대법관을 지명했을 뿐 아니라 역대 가장 강력한 ‘프로라이프’ 대통령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그가 지명한 200명 이상의 연방 지방법원과 항소법원의 판사들도 대부분 낙태 반대론자이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 등의 낙태시술기관에 흘러가는 연방 자금을 모두 중지했다. 그리고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올해 열린 ‘생명행진’ 현장에 직접 나와 연설하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23일 낙태과정에서 살아남은 태아를 의료제공자가 의무적으로 보호하도록 책임을 묻는 ‘낙태생존자 보호법(Born-Alive Abortion Survivors Protection Act)’에 서명했다. 이제 트럼프 대통령을 통해 입장이 분명한 연방대법관들이 세 명이나 세워져 ‘로 대 웨이드’ 판결마저 뒤집을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대한민국은 반면 대법관과 헌법재판관 교체를 앞둔 중요한 시기에 갑자기 정권이 교체되어 사법부가 심각하게 기울어졌다. 결국 대한민국도 올해 안에 낙태죄 법안을 개정하지 않으면 내년 1월 1일부로 낙태죄가 자동 폐지되어 사실상 낙태가 합법화될 예정이다.

정부와 여당은 개정안으로 ‘낙태 전면 허용’과 ‘14주 내외 허용’을 고려 중이다. 교회를 비롯한 여러 프로라이프 단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여당의 일방적인 입법을 막을 묘책이 없다. 생명보호를 위해 지난 반세기 동안 꾸준히 진행된 미국 기독교의 연합과 집요한 공세를 보고 이제라도 적극 배워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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