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분석] 조선총독부의 볍씨 품종 개량과 보급 사업
[역사분석] 조선총독부의 볍씨 품종 개량과 보급 사업
  • 길도형 도서출판 장수하늘소 대표
  • 승인 2020.12.04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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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군산항의 모습. 일제의 조선 쌀 수탈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조선에서 생산된 쌀을 고가에 매입하면서 식민조선의 농민과 지주들은 조선에서의 거래보다는 일본 수출에 더 열을 올렸다. / 본문중
일제시대 군산항의 모습. 일제의 조선 쌀 수탈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조선에서 생산된 쌀을 고가에 매입하면서 식민조선의 농민과 지주들은 조선에서의 거래보다는 일본 수출에 더 열을 올렸다. / 본문중

1965년생인 나는 어린 시절을 강원도 홍천과 횡성, 경기도 가평 산골 마을에서 살았다. 산골 마을의 경작지는 대부분 산비탈에 있었고, 심지어는 화전민 이주 사업이 있기 전까지는 산에 불에 질러 경작지로 조성한 화전도 흔했다.

그런 곳이다 보니 논(畓)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어린 기억을 더듬어 보면 논을 많이 가지고 있는 집이라야 여남은 마지기(1마지기당 200평), 평균적으로는 대여섯 마지기 정도였다. 미곡 소출량은 볍씨 기준으로 마지기당 4~5가마니(1가마당 80kg)였고, 정미를 하면 잘 나와야 두 가마니 겨우 넘는 쌀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단위 면적당 나락 소출량이 형편없을 뿐 아니라 정미를 해도 절반에 훨씬 못 미치는 쌀이 나올 뿐이었다. 그러니 논이 열대여섯 마지기 정도는 되어야 쌀 30가마니 정도를 확보해 놓고 1년 내내 쌀밥 좀 먹는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여섯 마지기 정도의 평균치 농사꾼들은 대식구(당시 시골은 가구당 식솔이 10명이 넘는 경우가 흔했음)가 쌀 여남은 가마 가지고 잡곡을 섞어 먹고 나면 다음해 이른 모내기를 할 무렵 쌀이 다 떨어졌다. 그마저도 자기 논이 없는 농사꾼들은 지역의 상대적 부농 지주들의 논을 소작했는데 논의 소작료는 보통 7할이 지주의 몫이었다.

2010년대 중반 기준으로 한국 농촌의 벼농사는 모내기부터 벼베기, 탈곡, 정미까지 다 기계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벼의 생육 과정에서의 시비와 방제, 벼베기부터 탈곡, 정미까지 한 공정으로 이뤄지고 있다. 소출량은 200평 한 마지기당 정미 후 미곡 기준으로 4.5~5가마니가 생산된다.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더욱이 70년대의 집약농업이 지금은 기계화 영농으로 최소의 노동력으로 생산되는 만큼 투입 노동력 대비 생산량을 산술적으로 계산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한 세대 전인 70년대의 미곡 소출량이 지금에 크게 못 미치는 이유는 영농 합리화의 문제도 있겠지만 품종의 문제가 가장 컸다.

당시 강원도 산골 등지에서 주로 재배한 재래벼 품종은 늦게까지 서리가 내리는데다 일찍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어는 지역 특성상 조생종 벼를 주로 심었다. 재래 조생종 벼의 특징은 이삭이 패서 고개를 숙일 무렵 잘 나타나는데, 키가 큰 반면에 대가 가늘고 약해 풍수해와 병충해에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낟알 개수 또한 80~90개로 100개에도 못 미쳤다. 지금의 120~130개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또 낟알마다에는 보리나 밀 이삭에서 보는 ‘까락’이 달려 있어 수확 후 가마니 부피만 키웠고, 냉해에 약한 만큼 찬물이 나는 곳에서 자라는 벼는 제대로 여물지 못하고 쭉정이가 되어 버렸다.

이런 이유들로 평균 다섯 가마니의 볍씨가 정미 후 미곡 두 가마 남짓 건지면 잘 건졌다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식량증산운동과 ‘통일벼’

강원도 산골짜기의 체념과도 같은 벼농사가 극적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1970년대 후반 ‘통일벼’의 보급이다. 통일벼는 위에서 열거한 재래종 벼 품종의 단점을 대부분 보완한 것으로서 굵고 짧은 줄기에 이삭당 낟알 개수도 재래종에 비해 30~40개가 더 달렸다.

물론 단점도 있었다. 여문 벼이삭의 낟알들이 작은 충격에도 잘 떨어진다는 점과 특히 문제가 됐던 것은 흔히 안남미로 불리는 인디카와의 교배를 통한 개량 품종이라 찰기가 떨어져 한국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들은 이후 각 지역별 현지 풍토에 맞는 지속적인 개량 등에 의해 극복되어 지금은 국내 생산 벼 품종들 대부분이 적당한 찰기와 함께 소비자 입맛을 충족시키고 있다.

이러한 성과의 바탕에는 대통령 박정희의 어릴 적 경험과 지도자로서의 집념이 있었다.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권력을 잡았지만 대통령 박정희 앞에 놓인 현실은 온 국민이 공통적으로 겪어야 했던 궁핍과 흔히 보릿고개라 불리는 춘궁기의 기아였다.

박정희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목표가 성공적으로 달성된 것에 힘입어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포커스를 만성적 가난과 궁핍, 그로 인한 기아에 시달리던 농촌에 맞췄다. 1970년 ‘잘 살아 보세’라는 기치 아래 새마을운동이 시작됐다.

박정희는 더 많은 농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각종 인센티브를 제시했고, 노력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자 새마을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전 국민의 운동으로 퍼져나갔다. 마을길도 넓히고 초가집은 기와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징검다리와 섭다리는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어 나갔다.

그런 중에도 국민적 식량 문제는 박정희 정권이 해결해야 할 핵심 이슈였다.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시행과 함께 벼 품종 개량 사업에도 적극 나섰다.

벼 품종 개량 사업은 약 7년의 노력 끝에 풍수해와 병충해, 냉해에 강하고 수확량도 비약적으로 늘어난 ‘통일벼’의 성과로 이어졌다. 몇 가지 통일벼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통일벼는 단점을 보완하는 등에 힘입어 이후 지역별, 경작지별 다양한 품종으로 개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면 박정희는 벼 품종 개량과 보급 사업을 어떻게 구상 또는 아이디어를 어디서 가져왔을까? 물론 지도자의 덕목 중 국민의 식생활 향상과 개선을 위한 고민이 벼 품종 개량 사업이란 아이디어를 불러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10년 전후, 즉 한일합병 전부터 이미 일본인들에 의해 일본의 우량 벼 품종들이 도입되어 재배되기 시작했고, 그 벼 품종들은 조선의 풍토와 환경에 맞게 지속 개량되어 1920년대에는 미곡의 획기적인 증산이 이뤄졌다.

처음에는 왜놈들 벼라고 해서 파종을 꺼리던 농민들이 1910년대 중반 무렵부터는 소작농뿐 아니라 지주들까지 나서 경쟁적으로 개량 볍씨 공급을 요구했다. 박정희는 식민지 시기의 이런 경험들을 간과하지 않았음을 간파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박정희 구상 또는 아이디어의 모티브라고 할 수 있는 일제의 ‘볍씨 품종 개량과 보급 사업’에 대해 알아보자.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한국의 근대화에 초점을 맞춘 수많은 정책사업들 중 두드러진 것으로 품종 개량을 들 수 있다. 식민지 정책 중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부분임에도 일제에 의한 식민지 한국에서의 품종 개량 사업은 대한민국 건국 후 역대 정부 모두에서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외면되거나 부정되어 온 게 엄연한 사실이다.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한국의 근대화에 초점을 맞춘 수많은 정책사업들 중 두드러진 것으로 볍씨 품종개량이었다. 사진은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 / LIFE 기록사진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한국의 근대화에 초점을 맞춘 수많은 정책사업들 중 두드러진 것으로 볍씨 품종개량이었다. 사진은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 / LIFE 기록사진

조선총독부의 볍씨 품종 개량 및 보급 사업

특히 품종 개량을 통한 식량 증산과 식민지 민중의 식생활 개선은 식민지는 ‘절대 악’이라는 전제하에서는 검토 자체가 불가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 나름 평가를 한다고 해도 특정 세력에 의해 일제의 품종 개량 사업이 수탈을 위한 정책일 뿐이라고 폄하해서 설명하는 것이 고작이다. 이는 곧 일제시대와 관련해서는 그만큼 왜곡과 날조로 점철된 편견이 많다는 것의 반증이다.

조선총독도 식민지 개발을 통해서 성과를 거둬 정치적 사회적 평가를 받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아무리 식민지 정부라고 해도 식민지 민중을 탄압과 무력만으로 치안을 유지할 수는 없다. 그 나름대로 국민을 위한 정책을 시행했음에는 틀림없다. 다만 후에 모든 것을 식민지 한국을 일제의 병참 기지로 삼고자 한 것이라든가, 수탈을 위한 또 다른 방편에 불과할 뿐이라고 폄하해도 그 지도자들 또한 그들 나름대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했던 것이다.

여기에 긍정적인 식민지 정책이라고 여겨지는 정책 하나를 소개한다. 비록 식민지 통치를 위한 조선총독부 정책이지만 ‘지방개량운동’의 하나로 시도된 ‘벼종자개량사업’이 그것이다. 메이지유신을 전후로 육종학을 발전시켜 온 일본은 근대 과학의 힘으로 벼의 종자를 한국 기후에 맞게 개종했다.

이러한 품종 개량의 성과는 벼농사 북방한계선을 크게 끌어올려 짧고 선선한 여름에, 길고 혹독한 추위가 이어지는 중국 동북지방의 북쪽 흑룡강성(헤이룽장 성) 일대에서도 벼농사를 지을 수 있게 했다.

열대부터 온대 지역에서만 생장 가능한 벼가 북위 50도에 이르는 아한대 지역에서까지 생육이 가능해진 것이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에 기고된 사키사카 키사부로(向坂幾三郞)의 ‘조선에 있어서 우량 벼종자의 보급의 성적’을 여기에 번역 소개한다. 그는 일본 ‘도쿠시마 농사시험장’의 소장을 지낸 다음 1907년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에서 근무했다.

수원에서 정성 들여 가꾼 벼 품종이 지금에 이르러 조선 농민들에 의해서 널리 재배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훌륭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것을 보니 감개무량하다. 벼의 품종은 ‘조신력’, ‘곡량도’, ‘일출’, ‘다마금’, ‘석백’, ‘금의’까지 여섯 종이다.

1918년 조선의 벼 품종별 재배 상황을 보면 조신력(早神力)은 25만 3천 정보, 곡량도(穀良都)가 20만 1천 정보, 일출(日出)이 3만 5천 정보, 다마금(多摩錦)이 11만 1천 정보, 석백이 1만 6천 정보, 금이 2만 6천 정보로 합계 64만 2천 정보에 달한다.

그 후 다마금이 평판을 얻으면서 재배 면적이 증가해 지금은 조선의 논 면적 총 150만 정보의 반에 해당하는 거의 75만 정보에 다마금 단일 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그것을 1단보(段步)당 벼 1석이 증산(평균 3할 정도 단별당 벼 1석의 증산)된다고 볼 때, 벼 1석의 시가를 15원으로 하면 1억 1,250만 원의 이익이 수원에서 개량해서 보급한 우량벼 품종인 다마금 재배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조선 농가에서는 해마다 다마금 품종 재배 확대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품질만이 좋아진 것이 아니고 쌀값이나 볏짚의 값도 재래의 것에 비해 오른 것을 생각하면 훨씬 수익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우량종이라고 장려한 6종의 품종 가운데 조신력과 다마금은 나가사키 현, 곡량도는 후쿠오카 현, 석백은 도쿠시마 현에서 시험 결과 우량으로 인정된 것이고 또 일출과 금의 2종은 조선에서 인정된 품종이다. 즉 조신력, 곡량도, 다마금, 석백 4종은 내지에서 점차 그 특성이 평가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장려할 만하다.

예를 들면 조신력은 물 관리가 좋은 땅이 아니면 안 되고 도열병에도 약하지만, 다마금은 한발에 강하며 땅을 가리지 않는다거나, 곡량도는 수해에 강하며 좀 비옥한 곳이 좋다는 식으로 장단점이 조선에 이미 알려져 지역별 품종 선정에도 활용되고 있다. 이로써 이들 품종이 어떤 식으로 보급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친일과 반일의 문화인류학> pp.151~161
 

역사를 보는 올바른 관점

일본에서 지역적 특성에 맞게 품종 개량에 성공한 벼 품종들을 도입, 수원 종묘시험장 등에서 한국의 지역, 기후 특성에 맞게 개량함으로써 일제, 즉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민중의 식생활 개선과 증진에 이바지했다. 또한 1920년대 중반부터는 군산항 등을 통해서 대일본 미곡 수출이 활성화되며 농민들이 자본 이득을 취하는 등의 유사 이래 처음의 경험을 하기에 이른다.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은 한 국가 안에서의 거래인 만큼 통관세가 없었고 상거래 상의 차별이 없었다. 오히려 조선 땅에서 생산된 쌀에 더 높은 값을 매겨 사들이는 특혜를 제공함으로써 식민지의 농민과 지주들은 조선에서의 거래보다는 일본 수출에 더 열을 올렸다.

시장경제의 생리상 더 남는 장사를 하고, 비싼 값에 사겠다는 곳에 물건을 파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을 왜곡해서 일제의 수탈과 착취라는 억지 주장과 논리가 파생된 것은 단지 ‘식민’과 ‘피식민’이라는 이유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즉, 이러한 벼 품종의 개발과 개량, 그에 힘입은 증산과 수출에 대해서도 ‘식민지 수탈을 위한 과정’일 뿐이라며 일본과 식민 당국의 복리 정책과 노력을 폄하하고 호도하는 것이 또한 ‘한국적’ 상황이다. 그러나 그런 해석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실제로 그런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아온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역사를 바로 보는 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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