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보수의 주류 교체, 미룰 수 없다
[심층분석] 보수의 주류 교체, 미룰 수 없다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20.12.10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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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보수’라는 명칭은 부정적 인식을 넘어 적폐를 상징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정치적 보수(保守)라는 개념을 넓게 해석해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헌정체제를 수호하려는 신념’에 동의할 수 있다면 ‘보수를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청산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보수를 내세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정치 세력을 응징하자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그러나 최근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두 논객 유시민과 진중권의 자유주의에 대한 경쟁적인 담론 전개를 보면, 우리 사회의 진보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헌정체제를 변혁하자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방향으로 자유에 대한 가치를 보다 확장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진보 내 ‘포스트 문재인’과 관련한 주도권 경쟁임은 부정할 수 없다.
 

변화해 온 보수의 정체성

문제는 이 주도권 논쟁에서 기존의 보수 논객들과 정치 세력은 전혀 국민과 언론들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보수에 2017년 ‘3·10 탄핵’을 기점으로 정체성의 변화라는 시대적 요구가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고, 그 변화란 ‘안보’와 ‘반공’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모든 것을 해결하던 한국 보수의 정체성에 ‘자유’와 ‘민주’라는 헌정 개념의 진화된 각성과 수용이 요구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의 보수는 해방 후 건국의 주도세력이었고 북의 남침을 극복한 자유민주체제 수호세력이었으며 산업화의 역군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보수 주도의 시대적 흐름에는 보수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킨 세 번의 큰 역사적 사건들이 등장했다. 그 첫 번째는 1960년 봄이었고 두 번째 사건은 1980년 봄이었다.

이어 대통령 직선제가 이뤄진 1987년 6월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그때마다 우리 헌법정신이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에 새롭게 진화된 해석을 가하면서 정치권의 주류를 교체시켜 왔다. 당연히 보수 내에 저항과 반동이 있었고 보수의 정체성은 새로운 외연을 가지면서 주류 교체를 통해 분화되는 양상이 심화됐다. ‘보수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시대정신의 변화가 분화시킨 보수의 양상을 일컫는 것이었다.

가장 극적인 양상은 반공 이념에서 아무런 차별성이 없었던 김영삼 문민정부를 반공 보수가 자신의 정체성의 진화로 수용하지 못하는 현상이었다. 당시 보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헌정개념을 역사적 경험의 반공과 등치시키고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을 자신의 청·장년기적 성공세대 경험으로 수용하면서 YS와 같은 리버럴 정치세력을 통치 권위에 도전하는 불순세력으로 인식하는 프레임을 스스로 만들어 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YS가 충분한 숙고 없이 내세운 세계화와 이를 바탕으로 한 글로벌 스탠더드에 역행하는 관치 경제로 IMF 위기가 온 것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를 비난하는 보수에게 자유시장경제의 가치관이나 이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YS는 93년 집권 초부터 한국 경제의 뿌리를 위협하는 노동문제에 개혁을 시도했지만, 김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야당의 반대에 직면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렇다고 YS 문민정부를 비난하던 보수가 YS의 노동개혁을 지지하고 힘을 실어 준 것도 아니었다. 당시 보수는 TK와 PK로 갈려 정국의 주도권 다툼에만 골몰했을 뿐 변화된 시대정신을 보수의 미래 청사진으로 삼으려는 노력이 없었다. 이러한 양상은 이회창이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더 심화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이회창의 영욕을 되돌아보는 것은 보수의 시대정신 배반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성찰을 준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3당합당을 공동발표했다. 3당합당은 중도 민주세력까지 포용하는 보수우파 정치사에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 한국사진기자협회 보도사진연감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3당합당을 공동발표했다. 3당합당은 중도 민주세력까지 포용하는 보수우파 정치사에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 한국사진기자협회 보도사진연감

이회창과 보수의 영욕

YS 문민정부와 함께 했던 신한국당은 보수 정당이었으나 그 내부는 YS의 3당 합당으로 권위주의, 반공주의 일색의 민자당 그룹에 변화된 정체성을 가졌다. 보수의 정체성에 자유주의 그룹과 민주주의 그룹이 수혈되면서 당에는 오히려 활력이 넘쳐났다. 이러한 분위기가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이회창의 둥지 역할을 했다.

1993년 2월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이회창은 감사원장에 임명됐다. 당시 이회창의 행보는 충격적이었다. 그는 “현 정권에 관련된 정치적 비리라 하더라도 성역을 인정치 않고 엄정한 감사활동을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청와대비서실, 국방부, 국군기무사령부 등 권부의 핵심부서가 모두 감사원의 감사 도마 위에 오르는 초유의 상황이 됐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평화의 댐, 율곡사업 감사를 하면서 서면조사를 받아야 했고, 수많은 전 현직 장성들과 고위관료들이 구속되었다.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 처음으로 무소불위의 권력기관 국가안전기획부에 대한 감사까지 진행하면서 안기부는 이회창을 비롯한 감사원 간부들의 뒤를 캐거나 협박을 하기도 했다.

이후 국무총리 시절, 권위주의에 빠진 YS의 실세들과 맞서다가 스스로 ‘허수아비 총리는 못 한다’며 자진 사임했을 때 국민은 이회창을 다음 대통령 후보로 기정사실화했다. 이른바 대쪽이라는 그의 별명이 회자된 배경도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이회창은 97년 보수의 대권 주자로 등장하면서 시대정신 경로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1997년 3월 이회창은 한나라당 대표직을 유지한 채 경선에 참가했다. 당 대표직에서 사퇴하라고 촉구한 다른 후보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불공정과 권위주의가 도마에 올랐다. 이러한 이회창의 태도는 그가 킹메이커라는 김윤환 등 5공 민정계와 손을 잡으면서 자기 정체성에 균열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당시 경선 구도는 민정계와 민주계의 대리전 양상이었으며 이인제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계는 비록 단합은 이루지 못했으나 5공 청산을 지지한 국민들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회창은 이러한 시대정신의 경로를 벗어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약속했고 그들로부터 감사와 지지를 표명 받았다. YS는 이러한 점 때문에 이회창과 갈등을 빚었고 이회창은 YS 화형식 퍼포먼스를 했다.

결국 아들 병역비리 의혹은 이회창에 실망한 개혁적 보수 세력에게 이회창을 거부하는 명분을 만들게 된다. 이인제의 단기필마 출마로 500만 표를 얻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했다. 이 표는 새롭게 변화한 대한민국 보수가 이회창을 거부하는 표였다. 이후 이회창의 몰락은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 박근혜 영입과 경쟁 세력의 DJP연합으로 보수를 공략한 민주당과 노무현의 등장으로 예고되어 있었다.

노무현·이명박의 리버럴적 균형

DJ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의 등장은 당시 반공 보수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한 이후 부시 미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북한에 대해 노골적으로 압박 공세를 폈다. 11월 9일 볼턴 차관보가 북한이 이라크에 무기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고 마침내 2002년 1월 29일 부시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DJ 정부의 햇볕정책은 사기였다는 평가가 우세했다.

2002년 대선은 노무현과 대권에 재수하는 이회창 간에 대결이었다. 하지만 이 대결 구도는 이미 YS 문민정부에 유입된 리버럴 보수의 이회창에 대한 거부로 장담할 수 없는 형국이었다. 이회창과 노무현의 대결이 박빙의 승부였기에 대한민국 보수가 건재했다는 평가는 전혀 정치적인 해석이 아니다. 보수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왜 노무현 바람이 일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언론의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이라는 해석은 본질을 회피하는 것이다. 한국의 대중 언론들은 대중들의 인식을 반영할 뿐이다. 그렇기에 이명박, 박근혜 정권도 탄생한 것이라 해야 한다.

‘국민이 어리석어 선동된 것’이라는 해석은 더 빗나간 것이다. 노무현의 바람은 시민들이 가진 대한민국 주류에 대한 관념이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고졸 출신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법조인 노무현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은 그후 샐러리맨 신화를 만든 이명박에게 그대로 투영됐고, 자신의 사업에서 성과를 이룬 안철수에게 전이됐다.

3김 이후 시민들은 대통령으로 표상되는 인물에 대해 우리 헌정의 가치인 자유와 민주를 진보적이 아니라 보수적으로 적용하며 그렇기에 비정치적 삶의 업적을 주요한 평가 잣대로 삼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 국민은 헌정의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정파성에 함몰되는 정당 내부가 아니라 정치 바깥의 삶의 현장으로부터 소환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해석은 시민들이 박근혜에 대해서는 시대정신이 된 자유·민주의 가치적 권위를 부여하는 데 소극적이었을 것이며 이 때문에 통치에 지배받는 정당성에 대한 저항감이 다른 정치 지도자들에 비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YS 문민정부 이후 DJ-노무현-이명박으로 이어진 집권의 정당성에는 진보 이념의 우세가 아니라 보수 정체성의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의 중요한 흐름은 권위주의에서 자유주의에로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물론 그러한 자유주의는 개인을 바탕으로 하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의 흐름은 아니었다.

이 문제는 한국적 자유주의의 계보를 점검해 봐야 이해가 될 수 있는 부분이며 아직 학계에서도 제대로 된 연구는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국적 자유주의, 리버럴의 흐름이 분명히 한국의 정치사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었다는 점을 이승만, 박정희 시대의 민주화 운동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흐름은 한때 주사파와 같은 종북 성향에게 주도권을 내주기도 했지만 조국 사태 이후 진보 진영 내에서 일고 있는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에 대한 성찰적 비판은 대한민국 진보의 흐름이 반드시 보수가 생각하는 좌경성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자유주의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서두에서 지적한 것처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헌정’을 지지하는 세력이 보수라면 오늘 대한민국 보수의 정체성은 정파를 넘어 스펙트럼이 넓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자유주의 세력의 기원에 대해 거칠게나마 회고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제기된다.

보수우파의 세대교체는 언제 가능할까? 사진은 정치적 세대 교체의 상징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좌), 트뤼도캐나다 총리(우)
보수우파의 세대교체는 언제 가능할까? 사진은 정치적 세대 교체의 상징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좌), 트뤼도캐나다 총리(우)

한국 보수의 정체성은 ‘자유와 민주’

천부인권과 기본권에 관한 정치적 자유주의가 한국인에게 지적 유희가 아닌 현실 정치에 투사된 초기의 사건들은 1919년 3·1만세운동과 그해 상해에서 선언된 임시정부의 헌법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우파의 독립 운동가들에게는 민족자결주의라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된 사상적 실천이 있었다.

이러한 경로에 의해 48년 건국헌법은 1919년 임시정부의 헌법의 5차 개정에서 공산주의 요소를 털어낸 상태가 그 원형이 됐다. 당시 임시정부 헌법은 민권을 자유권적 기본권면에서 유감이 없을 정도로 제대로 구현해냈다. 흔히 해방 후 미국의 영향으로 한국에 자유주의가 도입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한국의 정치 세력에게 자유주의는 이미 민족자주라는 개념과 결부되어 독립운동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원은 구한말 개화파로 소급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대표적인 것이 서재필 등이 주도한 독립협회 활동이었다. 당시 개화파는 근대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입헌공화제를 대안적인 정부 모델로 삼고 있었고 이승만은 고종을 폐위하고 입헌 공화제를 실시하려다 투옥됐다.

갑신정변은 그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자유주의는 해방과 건국에서 우파의 정치철학적 토대를 형성하면서 공리주의 영향을 받아 사민주의와 타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6·25를 계기로 반공이 국시로 강력하게 자리잡게 되면서 극우성을 띤 민족주의 세력들이 이승만 정권의 하부 토대를 형성하게 된다.

이 때문에 우파 내에서도 이승만 세력은 민족주의적 자유주의 세력들과 갈등을 빚게 되는데 당시 젊은 정치인들로는 이철승, 김영삼과 같은 청년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4·19를 통한 민주화의 기대가 군사혁명으로 좌절되면서 박정희 군부에 저항하는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종북이나 반체제 인사들은 아니었다. 모두 대한민국 헌정인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의지에 충만했고 결국 이러한 흐름은 80년 서울의 봄과 87년 6월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YS의 3당 합당은 변절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반공 보수의 자유주의적 외연 확대에 따른 정체성의 변화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87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가 다름 아닌 보수의 결단으로 수용되었다는 점이 그렇다. 이후 92년 문민정부의 등장은 국민 축제로 성사됐다.

오랜 군부 통치가 문민정부로 이양되는 과정에서 내전이 없었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흔치 않았다. 다만 이러한 과정에서 광주 5·18은 민주화 이후 역사적으로 재평가된 사건이었으며 그 배경에 YS 문민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진 5공세력의 반동적 위협을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방어적 민주주의의 아젠다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들에게는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은 등가로 수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치의 주도 세력들은 바로 이 자유주의 그룹 내에서 분화된 흐름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헌정적으로 이단적인 사회주의 세력들과 종북 세력들이 기생적으로 얽혀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헌정 가치가 자유민주주의라면 사상적 자유에 의해 공산주의자든, 페미니스트든 그 정치적 활동을 금지할 수는 없으며 국민의 선택에 맡겨야 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숙명이라면 숙명일 것이다.

이러한 다원적 가치에서 보수의 정체성도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결국 보수의 정체성이 다시 ‘친미반북’에 국한되는 반공주의로 회귀할 것인지, 아니면 보수의 결단으로 성취된 민주화를 수용하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로서 개인과 시장경제의 발전이라는 책임적 자유주의로 진화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반공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보수의 주류 교체에 달려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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