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 노동운동가 전태일 이야기
[이슈분석] 노동운동가 전태일 이야기
  • 남정욱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8기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20.12.13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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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1986년 겨울 술자리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공장에 다니고 노동운동을 한다고 했다. 꽤나 비밀스러운 말투였고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노동을 하는 건 알겠는데 그게 어떻게 운동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노동자들과 눈높이 맞추는 일이 쉬운 줄 아느냐, 노동자 계급과 발맞춰 가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건지 아느냐며 한 시간 가까이 열변을 토했는데 그냥 듣고만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예뻤기 때문이다.

가명은 전태월이었다. 전태일을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그렇게 지었다고 했는데 나는 그냥 기생 이름 같아 좋았다. 이후로 만날 때마다 전태월은 내게 세계노동운동사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 대해 강의를 했고 역시 같은 이유로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눈이 정말 많이 내렸던 날 신촌에서 전태월과 눈싸움을 하며 놀았다.

눈만큼이나 하얀 그녀의 손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얘는 자기가 얼마나 ‘공순이’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긴 목에 아무리 감춰도 티가 나는 배운 흔적을 사람들이 정말 모를 것이라 생각했을까.

봄이 오고 꽃이 필 무렵 그녀와 연락이 끊겼다. 모르겠다. 공장일이 고달파 학교와 집으로 돌아갔는지 아님 정말 운동을 하기 위해 더 큰 공장이나 지하로 들어갔는지. 전태월뿐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나는 그런 식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 현장에 투신한 친구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1970년 전태일 사건을 계기로 대학생들이 노동 현장에 뛰어든 ‘존재 이전’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80년대까지도 이어졌다는 얘기다. 오늘날에도 노동 해방의 아이콘으로, 노동자의 살아 있는 불꽃으로 추앙받는 전태일, 그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약전(略傳) 전태일

전태일. 1948년 8월 26일생으로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다. 6살 때 가족이 서울로 올라왔고 17세에 평화시장 내 학생복 맞춤집에 견습공으로 취직했다. 당시 그의 월급은 1500원. 그러나 아버지가 봉제 노동자였던 까닭에 어릴 적부터 재봉에 익숙했던 그는 곧 미싱 보조로 승격되어 월급 3000원을 받는다.

작업장에서 전태일은 인기가 좋았다. 견습공들에게 친절했고 작은 일이라도 찾아다니면서 돕는, 요새말로 훈남이었다. 심지어 차비를 아끼기 위해 걸어서 출퇴근을 했는데 돈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월급이 적어 점심을 거르는 견습생들에게 풀빵을 사주기 위해서였다.

평화시장에 들어온 지 2년 만에 전태일은 재봉사 타이틀을 단다. 이는 일반적인 승진 기간보다 훨씬 빠른 것으로 그가 재봉 자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착한데다 의협심까지 강했던 전태일이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시들어가는 나이 어린 여공들의 비참함을 대충 봐 넘겼을 리 없다. 21살이 되던 해 그는 평화시장 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했고 그가 파악한 문제점들을 현실에서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1970년 11월 13일 자신을 산화하는 것으로 세상에 마지막 절규를 던진다. 그날 하루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고 끝났을 수도 있는 전태일을 살려낸 게 변호사 조영래다. 그는 전태일의 평전을 썼고 1983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내보낸다.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다가 너무 어려웠던 나머지 대학생 친구가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전태일의 일기가 공개되면서 수많은 대학생들이 산업 현장으로 뛰어든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도 그 중 하나였고 김문수 전 지사도 그 열기에 몸을 보탰다. 2008년 불편한 진실 하나가 드러난다.

사울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이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전태일 사건에서 누군가가 지워버렸던 흔적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울 알린스키는 누구인가. 그는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이 존경하는 미국의 급진적 사회운동가로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최측근이었다.
 

1969년 친구들과 함께. 맨 왼쪽이 전태일이다. / 전태일 재단
1969년 친구들과 함께. 맨 왼쪽이 전태일이다. / 전태일 재단

사울 알린스키 그리고 오재식과 양국주

알린스키는 1939년 시카고 빈민촌에서 주민들을 조직화하는 등 실천적 이론을 정립했는데 이중 주목할 것이 ‘지역사회이론’이다.

‘잠자는 민중을 깨워 리더를 양성한 후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는 내용인데 이전까지 활동가가 지역에 침투해서 직접 조직을 꾸리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현장에서 발굴한 리더를 통해 운동을 진행하는 방식으로 방법을 바꿔야 한다는 설명이다. 운동이 시작될 때 조직가는 그 바람을 타고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 되며 훈련된 조직가는 선택한 현장에서 3년 이내에 운동을 일으키고 운동이 일어나면 바로 그곳을 떠나라고 그는 가르쳤다.

1966년 알린스키에게 교육을 받고 귀국한 오재식(당시 한국기독학생총연맹 사무총장)은 1967년부터 학생사회개발단을 꾸려 빈민촌에 학생을 투입한다. 훈련받은 학생들은 두세 명씩 팀을 이뤄 현장에 투입됐고 이들은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스며들어 현장의 상황을 파악하고 ‘운동 인자’를 발굴했다.

누가 얼마나 현장에 들어갔는지는 지금도 알려져 있지 않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의 추천사를 쓴 오재식 씨의 추천사에 전태일의 이름이 언급된다. “현장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 선동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들을 조직하는 게 목적이었다.

이렇게 접근한 수많은 현장 가운데 하나가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이었다.” 수많은 현장이라고 했다. 전태일이 아니었더라도 당시 누군가는 또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던졌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슬슬 선뜩해지기 시작한다.

2009년에는 최보식 조선일보 기자가 양국주라는 인물을 인터뷰한다. 양국주는 한국기독교학생연맹 의장을 지냈던 과거 열혈 운동권이다. 그의 인터뷰에서도 전태일의 이름이 나왔다. 최보식이 물었다. “그를 압니까?” 양국주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그의 분신 현장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전태일의 교육을 담당했던 사람이 지금 미국에 있는 이승종 목사라고 밝혔다. 파문은 컸다. 대학생 친구가 없기는 커녕 전태일에게는 대학생 멘토까지 있었고 그들로부터 급진 사회변혁 교육까지 받았던 것이다. 신화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서’ 전태일의 진실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는 얘기다. 전태일을 의식화 교육을 받은 노동자로 포지셔닝하는 순간 많은 비밀이 풀린다. 전태일은 바보회 활동 중 ‘모범 업체’ 설립을 구상하면서 노동자들을 상대로 앙케트 조사를 했다.

오늘날에야 흔해 빠진 방식이지만 당시에는 대단히 선진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그런데 근로기준법의 조문도 이해하지 못해 머리를 싸맸던 사람이 이런 참신하고 과학적인 발상을 했다고? 그것은 영감의 영역의 아니라 학습의 영역이다. 누군가 전태일에게 그 방법론을 전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평전에서 사라진 것

1983년 출간된 전태일 평전은 대학가의 스테디셀러였고 80년대 후반 학번이라면 안 읽은 사람이 없었다. 이 책의 개정판은 2009년에 출간된다. 그런데 신판이 나오면서 내용에 변화가 생긴다. 1983년 초판 중 전태일의 분신 당일 장면을 보자. 준비했던 시위가 공권력에 의해 차단되자 전태일과 그의 친구들이 다음 행동을 계획하는 상황이다.

(전략) 약 10분 후 전태일이 내려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김개남의 옷소매를 끌어당기며 눈짓을 하여 그를 사람이 좀 덜 다니는 옆 골목으로 끌고 갔다. “아무래도 누가 한 사람 죽어야 할 모양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김개남에게 성냥불을 켜서 자신의 몸에 갖다 대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전날 저녁에 김개남은 전태일이 내일 “누구 한 사람 죽는 것처럼 쇼를 한 판 벌려서 저놈들 정신을 번쩍 들게 하자”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성냥불을 켜서 갖다 대어 달라는 전태일의 부탁이 심각하였기 때문에 불길한 예감이 퍼뜩 머리를 스쳐지나가긴 했으나,

“설마…”하는 생각에 그는 성냥불을 켜서 전태일의 옷에 갖다 대었다. 순간 전태일의 옷 위로 불길이 확 치솟았다. 친구들 보고 먼저 내려가라고 한 뒤, 그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한 되(一幷) 가량의 석유를 온 몸에 끼얹고 내려왔던 것이다. 불길은 순식간에 전태일의 전신을 휩쌌다. 불타는 몸으로 그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서성거리고 있는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나갔다. (후략)

- 전태일 평전 초판 p. 227 중에서 -

길지만 인용한 이유는 이 끔찍한 장면이 신판에서는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신판에서는 이 장면이 단축되어 오로지 전태일 혼자의 행동으로 묘사되고 있다.

(전략) 약 10분 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을 가슴에 품고 내려왔다. 전태일이 몇 발자국을 내딛었을까. 갑자기 전태일의 옷 위로 불길이 확 치솟았다. 불길은 순식간에 전태일의 전신을 휩쌌다. 불타는 몸으로 그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서성거리고 있는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나갔다.(후략)

- 전태일 평전 신판 p. 300 중에서 -

김개남이 사라졌다. 전날 전태일에게 성냥불 이야기를 들었고 당일 현장에서 전태일의 몸에 불을 붙인 인물이 증발해버린 것이다. 이상한 게 아니라 무서운 일이다. 아무리 부탁을 받았더라도 친구 몸에 성냥불을 갖다 대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게다가 석유는 무색무취의 맹물이 아니다. 옷에 조금만 묻어도 금방 표시가 난다. 그리고 그 옷에 불을 붙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예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에 붙을 붙였다고? 빤히 결과가 보이는데? 신판을 내놓은 사람들도 그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건 좀 문제가 되겠다. 빼자. 위험한 궁금증이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대체 김개남은 누구인가. 시위 현장에 다시 나타나기 전 전태일은 누구와 함께 있었는가. 그리고 분신이라는 최종 결정은 누구의 몫이었는가. 어쩌면 이 일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모쪼록, 이 이야기가 70년대 노동운동의 성과를 자신들의 것으로 하고 싶었던 운동 세력의 증명불가능한 회고담이기를 바랄 뿐이다. 사실이라면 김지하가 말한 죽음의 굿판은 이미 70년대부터 펼쳐지기 시작한 셈이니까. 그것은 인간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너무나 무서운 발상이니까.
 

1995년 개봉작‘,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포스터. 이창동이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1995년 개봉작‘,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포스터. 이창동이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신화와 아이콘

앞서 전태일의 생전 사진을 두 장이나 올린 것은 이유가 있다.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나 평화시장 노동자들과의 야유회 사진을 보면 전태일이 어떤 스타일의 남자였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간다.

아마도 굉장히 도전적이고 멋부리기 좋아하는데다 튀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을 것이다(사진에서 혼자만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데 소심하고 얌전한 인물은 절대 이런 짓 못 한다). 양국주 역시 인터뷰에서 전태일이 과격하고 다혈질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 알고 있는 전태일의 이미지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1995년에 개봉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 속의 전태일은 속 깊고 예의바른 청년이다. 한완상은 그의 저서 ‘민중과 지식인’에서 대자적 민중과 즉자적 민중을 구분했는데 대자적 민중은 의식화 되지 않은 즉자적 민중의 반대편에 서 있으며 사회의 아픔을 공감하고 진실을 증언하며 즉자적 민중을 의식화된 대자적 민중으로 승화시키는 일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민중이다.

그러니까 깨어 있으며 계급 모순을 몸으로 담보하고 언제든지 투쟁에 떨쳐나설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영화 속 전태일의 이미지가 그렇다. 이미지는 사실을 넘어 존재하고 나중에는 사실 자체를 압도한다. 감독인 박광수는 조영래가 추상한 전태일의 이미지를 가져오면서 거기에 70년대 선각(先覺)한 노동자의 모습을 덧씌웠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 전태일이다. 만들어지고 조작된 전태일이다. 반면 전태일이 과격하고 다혈질이었으며 충동적인 부분이 있었다는 증언에 따라 읽으면 평전의 몇몇 대사가 자연스러워진다. “한 두 목숨 없어져야 근로조건 개선이 이루어진다.” 평전에 나오는 김개남 등과 바보회를 결성할 당시의 발언인데 이런 유의 발언은 평전의 후반부로 가면서 더 자주 등장한다.

여기서 그는 그의 죽음이 어떤 성과를 거두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 무렵 그는 친구들에게 간간히 지나가는 말처럼, “나 하나 죽어지면 뭔가 달라지겠지…”하고 말하는 일이 잦아졌던 것이다.

- 전태일 평전 초판 p. 223 중에서 -

이미지가 허구임을 밝힌 것은 전태일의 행동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절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전태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장기표는 “인간의 명석함이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얻어지고 깨달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태일은 자신의 처지를 분개한 것이 아니라 여공들의 참담한 삶에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그 원천은 사랑이었다. 동대문 평화시장에 가면 모녀식당이란 음식점이 있다. 반계탕, 감자탕 등을 파는데 생전 전태일의 단골집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전태일을 이렇게 기억한다. “일 끝나고 와서 감자탕 한 그릇 먹고, 참 맘이 좋았어요.

시다들 데리고 와서 자기는 안 먹고 애들 사줄 때도 있었어. 그래서 내가 한 그릇 슬쩍 더 주니까 끝까지 배부르다고 안 먹어. 그래서 난 정말 밥 먹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사람도 저녁 먹은 게 아니었어요. 시다 애들한테는 자기는 밥 먹었다고 그랬는데 (내가) 준다고 덥석 받아먹으면 애들 무안해 할까봐 그랬다는 거야, 나중에...그래서 내가, 에이 바보야, 그랬거든.” 아주머니는 전태일이 분신하던 날도 뼈다귀를 다듬고 있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건 알았어요.

걱정도 되고 그래서 태일이가 왔길래 앉혀놓고 이야기를 했지요. 야 이 바보야, 네 일이나 걱정해라, 하고 타일렀어요. 그러니까 밑도 끝도 없이 내일이면 결판이 난대요. 결판은 뭔 결판? 그러고 말았는데 다음날 점심 끝나고였나? 누가 와서 태일이가 죽었다고, 불타 죽었다고 엉엉 울더라고요. 난 그때 불타 죽었다는 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어요. 그냥 공장에 불이 나서 죽었나 했지요.” 김형민 씨가 쓴 ‘썸데이 서울’에 나오는 내용이다. 전태일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들이 전태일을 선배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이유

1970년 전태일의 월급은 2만3000원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GDP가 8만7000원이었으니 전태일의 연봉 27만6000원은 그 세 배 쯤 된다. 쉽게 말해 잘 먹고 잘 사는 수준이었다(참고로 당시 남성 기자의 월 평균 임금은 2만2700원, 남성 교원의 월 평균 임금은 3만7200원으로 학력 격차 등을 감안할 때 대단히 고임금이다).

그런데도 그는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써가며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쳤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행동이었다. 심지어 월급이 높은 미싱사를 포기하고 그보다 월급이 낮은 재단보조공으로 자리를 옮긴 적도 있는데 나만 잘 살 수 없다는, 평화시장 여공들에 대한 인간적인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비되는 것이 2020년 현재 노조가 결성되어 있는 귀족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평균 1억 원 가까운 연봉을 받으며 그 반에도 못 미치는 급여를 받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그다지 동료라고 생각하지 않는 동시에 그들의 생존권 보장 외침에 태연히 귀를 닫는다.

심지어 자신들의 직장을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주려는 간악한 발상도 현실에서 구현해보겠다고 난리다. 이기주의, 다 이해한다. 그러나 백번을 이해해도 그들의 입에서 전태일의 이름이 나와서는 안 된다. 그들이 하는 ‘짓’과 전태일이 했던 행동은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태일을 욕보이는 일이다. 세상을 기만하는 짓이고 턱도 없는 화장(化粧)이다. 전태일은 당신들 같은 후배를 둔 적이 없다.

아쉬운 이야기 두 개

전태일 평전에서 또 하나 흥미 있는 부분은 그가 구상했던 모범업체 프로젝트다. 전태일은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그런 공장을 만들고 싶었다. 계획에 따르면 그는 미싱사의 월급을 1만 원에서 3만 원으로, 시다는 1000원에서 8000원으로 대폭 올린 공장을 설계했다.

교사까지 고용해서 노동 후 공부까지 책임질 생각이었다. 전태일의 계산은 대충이 아니었을 것이다. 업계와 시스템을 꿰뚫고 있었으니 그 정도 배분을 해주고도 공장이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그 계획은 현실에서 이뤄지지 못했다. 당시에는 ‘자본’에 비해 ‘노동’이 너무 많았고 노동의 권리는 빈약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전태일의 ‘기업가 정신’을 읽는다면 너무 많이 나간 것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위험한 세력과의 접점 없이 개선과 모험으로 현실을 바꿔 나갔다면, 물량을 수주하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일을 성사시켜 나갔다면 어쩌면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 ‘기업가’ 전태일을 만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태일 분신 얼마 뒤인 11월 25일 조선호텔 하급직 이상찬이 분신자살을 시도한다. 1971년에는 아시아 자동차 노동자들이 노조 결성을 방해하면 집단으로 자살을 하겠다고 나섰고 2월에는 식당 종업원 김차호가 가스통을 껴안고 자살 소동을 벌였다. 목숨을 담보로 세상에 발언권을 신청하는 극단적인 방법이 열병처럼 번졌다. 이것은 전태일이 남긴 부정적인 유산이다. 이 죽음의 행렬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중이다.

전태일 이후 1990년대 후반까지 44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끊었고 숫자는 줄었지만 행렬은 여전하다. 그러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얻어야 하는 세상은 없다. 자기가 있고서야 세상도 있는 법이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평소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태일이의 죽음을 따르지 말고 살아서 싸워야 한다.” (미래한국) 

남정욱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숭실대 겸임교수
한국영화기획프로듀서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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