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뷰-미래한국 공동기획] 왜 우리는 조만식을 기억해야 하는가? 上
[월드뷰-미래한국 공동기획] 왜 우리는 조만식을 기억해야 하는가? 上
  • 박명수 서울신학대 명예교수 ·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 승인 2021.02.0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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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사람, 고당 조만식

지금 대한민국은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이념의 갈등, 지역적인 갈등, 세대 간의 문제, 국제 질서의 변화 등 수많은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일수록 기독교인들은 사회가 어디에 기초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회의 기초가 분명하지 않으면 그 위에 건강한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 가운데 생각나는 인물이 고당 조만식이다. 

고당(古堂)조만식 선생(1883~1950), 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고당(古堂)조만식 선생(1883~1950), 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그는 구한말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일제시대에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민족운동을 했으며, 해방 공간에는 지독한 혼돈 속에 자유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소련과 김일성에 의해 희생을 당했다. 극심한 혼란 가운데 있는 지금 조만식을 다시 생각하면서 우리 사회가 어디에 서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조만식이 태어난 서북(西北)지방은 조선시대에 차별받는 지역이었지만 기독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이다. 당시 기독교의 중심은 서울이 아니라 평양이었다. 이곳의 기독교인들은 서구 근대 문명을 받아들여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그 중심에는 도산 안창호가 있었다. 그러나 안창호는 주로 해외에 있었고 1930년대 중반 세상을 떠났다. 이런 가운데 국내에서 서북지역의 기독교를 대표해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가 바로 조만식이었다. 그의 진가는 그가 해방 공간에서 보여준 태도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남한에는 수많은 정치지도자가 나서서 정당을 만들고 자신들의 정치적인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북한에는 오직 한 사람 조만식 장로가 있었다. 


조만식의 제자였던 함석헌은 하나님이 “이북은 다섯 도를 조만식, 단 한 사람에게 맡으라고 하였다”라고 말했다. 사실 해방 직후 북한에는 조만식과 대등한 지도자가 없었다. 그래서 소련도 처음에는 조만식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따라 준다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회유했다. 하지만 조만식은 눈앞의 이익에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조만식은 1946년 1월 소련의 요청을 거부하고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어 있다가 1950년 10월 조국 통일의 제단 위에서 목숨을 바쳤다. 


자유민주국가로 통일된 한반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조만식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온건한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인들이 일제 치하에서 신앙을 지키고, 실력을 양성하고, 경제력을 갖게 하고자 했다. 동시에 일본을 향해 독립 만세를 부르며 3·1운동에 가담했고, 주기철 목사와 함께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믿음을 지켰으며, 일제 말에는 그들의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가 해방을 기다렸다. 이런 분명한 자기 소신은 해방 이후 소련과의 대결에서 더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이북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 소련군의 만행을 비판했으며 소련 편에 서서 신탁통치를 찬성하기보다는 오히려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반탁 운동에 나서 끝까지 소련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다가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만식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그의 신앙이다. 1883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갓 열 살이 넘었을 때, 후에 한국 장로교 최초의 목사가 된 한석진의 아들과 함께 서당을 다니면서 기독교를 처음 접했으나 당시에는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다음 해 갑오개혁이 진행되자 조만식은 서당을 그만두고 평양에 가서 장사를 배웠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장사에 성공하면서 술과 노름에 빠졌다. 이런 가운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세상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였다. 조만식은 장사 동료 한정교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조만식은 새 문명을 배워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1905년 어느 날 평양에 새로 세워진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숭실학교에 입학하기 전, 그는 지금까지 사귀던 술친구들을 모아 놓고, 실컷 술을 마시고는 “오늘까지는 과거의 조당손(조만식의 아호)이고, 내일부터는 조만식이다”라고 선언했다. 조만식은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조만식의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었다. 그는 숭실학교 교장인 베어드 선교사로부터 철저한 기독교 신앙을 물려받았다. 조만식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가 서울에 오면 조선일보 사주인 방응모의 집에 머물렀는데 방응모는 자신의 손자 방일영으로 하여금 조만식을 시중들게 했다. 어린 방일영은 조만식이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모습을 봤다. 조만식은 일본 패망의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뒷산으로 올라가 나라의 미래를 위해 기도했다. 아마도 조만식은 한국 교회가 가장 사랑하는 기독교 민족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일 것이다.


그는 항상 기독교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일본에서 유학할 때 그는 도쿄의 YMCA를 중심으로 한인연합교회를 설립하고, 한국에서 파송된 한석진 목사와 함께 이 교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 교회는 장감연합교회로 조만식은 여기에서 초교파적인 연합 운동을 했다. 바로 여기에서 2.8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장이 된 그는 지리나 역사를 가르쳤지만 동시에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오산학교의 교사 겸 교목이었다. 조만식은 특히 오산학교에서 자신의 기독교적인 삶을 통해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의 제자 가운데 함석헌, 한경직, 김홍일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 

한국 교회와 함께 한 기독교 신앙인

당시 오산학교에는 유명한 소설가 이광수가 교사로 있었는데 그는 처음에는 신자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를 떠났다. 이 당시 이동휘나 여운형도 기독교 신자였으나 나중에는 기독교를 떠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조만식은 끝까지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켰다. 많은 기독교인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기존 교회와 거리를 뒀는데 조만식은 항상 한국 교회와 함께 일했다.


3·1운동 이후 그는 오산을 떠나 평양으로 가서 산정현교회 장로가 되었다. 그는 이곳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기독교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1920년대 조선 사회에 일본과 서구로부터 잘못된 물질주의가 들어오자 교회는 절제 운동을 통해 이런 세속주의와 대결했다. 조만식은 당시 한국 교회가 강조하던 절제 운동에 큰 힘을 실어 줬다. 그는 평생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고 검소하게 생활했다. 일제 말 조만식은 산정현교회 장로로서 담임목사 주기철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지켜 줬다. 원래 주기철은 조만식의 오산학교 제자였다. 조만식은 그를 산정현교회로 초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제 말 산정현교회는 대표적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본거지였는데 여기에는 주기철 목사뿐만이 아니라 조만식 장로도 있었다.


이런 분명한 기독교 신앙은 해방 후 공산 치하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종종 조만식을 요릿집으로 초청해 대화를 나눴다. 이들은 조만식에게 술을 권했지만 그럴 때마다 조만식은 자신은 기독교 장로이기에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조만식은 10월 14일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대회에서 연설한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입이 마르도록 소련군을 찬양했지만 조만식은 오히려 오늘의 해방을 가져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독립을 기도했고, 이에 하나님이 조선 민족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독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조만식을 비과학적인 인물이라고 비판했지만 조만식은 자신의 신앙을 공산주의자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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