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역사문화 기행②] 주민 없는 지역축제, 이제는 그만
[용인 역사문화 기행②] 주민 없는 지역축제, 이제는 그만
  • 고성혁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21.05.06 17: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간혹 일본을 여행하다보면 길거리에서 거대한 행렬을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마츠리(祭り)라고 하는 일본의 지역축제입니다. 축제라고 해서 서양식의 페스티벌은 아닙니다.

제(祭)라는 의미에는 종교적 기원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마츠리(祭り)는 지역 신사(神社)하고 연결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흥청망청 놀며 마시는 놀이가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신(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신사에서 유래한 마츠리가 지역 공동의 마츠리가 되면서 대중 속에 녹아들게 되었습니다.

풍작, 풍어, 사업 번창, 학업 성취 등 소망도 기원하면서 마을의 한바탕 잔치처럼 된 것입니다. 짧게는 이틀, 길게는 한달 가까이 이어지는 마츠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알려진 마츠리는 매년 11월 첫째 주 일요일 오사카 나니와궁터에서 열리는 ‘사천왕사왔소 마츠리’입니다. 흔히 ‘왔소 왓소 마츠리’로 알려지는데요,

‘내가 왔다’라는 말 그대로의 '왔소 마츠리'입니다. 왕인 박사가 일본 문화를 전해준 것을 비롯해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문화 교류를 재현하는 일본 오사카 지역 축제입니다.

왓소 왔소 마츠리는 일본의 다른 것과 비교할 때 역사가 길지는 않습니다. 1990년 故 이희건 신한은행 명예회장(1917∼2011) 주도로 창설했는데 현재까지 이어오면서 재일동포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도 일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의 3대 마츠리 중 하나인 교토 기온 마츠리.
일본의 3대 마츠리 중 하나인 교토 기온 마츠리.

일본의 마츠리(祭り)와 한국의 지역축제 , 용인의 포은문화제

일본 마츠리는 지역의 대표축제가 되면서 경제에 기여하는 바도 큽니다. 교토의 기온 마츠리 (祇園祭) 시즌이 되면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오니까요.

기본적으로 일본 역사는 우리와 달리 상당히 지역분권적이었습니다. 지방마다 영주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지역마다 마츠리도 각양각색입니다. 당연히 그 역사도 오래되었죠. 오사카에서 매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열리는 아이젠 마츠리(愛染まつり)의 경우는 쇼토쿠(聖德) 태자(574~622) 때부터 했으니 무려 1400여 년이나 오래됐습니다.

쇼토쿠 태자는 백제 아좌 태자가 초상화를 그려 줬다고 해서 우리 역사에도 알려진 인물입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3개의 마츠리가 있습니다. 교토의 기온 마츠리(祇園祭)와 오사카의 텐진 마츠리(天神祭), 그리고 도쿄의 칸다 마츠리(神田祭)인데요,

직접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규모가 엄청납니다. 참가 인원도 많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 마츠리의 특색은 주민들의 참여도가 매우 높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동네마다 참가하면서 일종의 경쟁까지 덧붙여지기 때문입니다. 가령 꽃가마 마츠리라고 한다면 동네마다 꽃가마를 이고 나오는데, 어느 동네 꽃가마가 더 예쁜지, 어느 동네 목소리가 더 큰지 하는 것을 평가하면서 한바탕 축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역사가 깊은 제(祭)가 있기는 합니다. 대표적으로는 단오제  (端午祭)입니다.

음력 5월 5일이 단오  (端午)입니다. ‘높은 날’ 또는 ‘신 날’이란 뜻의 수릿날이라고 하는데 양기의 숫자 5가 두 번 겹치는 날을 특별히 여기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어쨌든 단오는 농경사회에서 농업의 시작을 축제일로 승화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연장선 상에서 일종의 추수감사제 성격의 한가위 추석 역시 우리 민족의 대표적 축제일입니다.

그 외 우리의 대표적 민속절이라고 한다면 정월대보름이나 청명·한식날 정도가 있습니다.

이러한 몇몇 날을 제외하면 역사 깊은 전통 축제일은 별로 없습니다. 특히 지역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것은 그야말로 손에 꼽을 만합니다.

정월 대보름날 안동차전놀이라든가, 아니면 동래지신밟기, 강강술래 정도입니다.

유럽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는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와 문화 속에 살다 보니 지역 특유의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영향도 있습니다.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옛날에는 지방마다 봉건 영주가 직접 다스렸으니 우리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리고 보면 지역문화는 정치제도와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지역마다 문화축제 붐이 일어난 것도 지방자치제하고 관련 깊습니다. 1991년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지역마다 특색 있는 축제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많습니다. 전국 220여 개 지자체에서 만든 지역축제가 2020년 10월 기준 무려 968개나 됩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예산도 엄청납니다. 문화체육관광부도 ‘문화관광축제 지원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뿌리내린 지역문화제나 축제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관(官) 주도 축제로 전락하거나 예산만 낭비하는 모양입니다.

지역민, 민간인의 참여가 저조하다는 것이 공통 사항입니다. 물론 성공한 축제나 문화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작년과 올해 2021년에는 코로나 때문에 열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경기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용인시에도 대표적인 문화제가 있습니다. 매년 열리는 포은문화제와 처인성문화제입니다.

처인성대첩 기념 용인 시민의날 퍼레이드 모습/용인시
처인성대첩 기념 용인 시민의날 퍼레이드 모습/용인시

그래도 용인의 문화제는 나름 역사와 전통이 있습니다. 포은문화제는 고려 충신 정몽주 선생을 기리는 문화제이고 처인문성화제는 몽골 침략을 물리친 처인성 전투 승전을 기념하는 문화제이니까요.

포은문화제가 시작된 배경과 의미 등은 포은문화제 홈페이지(http://www.poeun.co.kr/s01/s04.php)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1회 포은문화제는 2003년 6월 20일과 21일 이틀 동안 열렸습니다. 포은 정몽주 탄생 666주년에 해당하는 날입니다.

1회 포은문화제는 용인시와 정부보조금 1억5000만 원, 찬조금 4000만 원 합계 1억9000만 원으로 용인시와 용인문화원이 주관하고 종약원이 협찬하는 방식으로 개최되었다고 합니다.

포은 선생 관련 학술대회도 열고 전국시조백일장, 전국청소년국악경연대회, 경기도청소년사생대회 등 지금까지 매년 알차게 개최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용인에서 포은문화제가 열리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정몽주 선생의 묘가 용인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들 알다시피 포은 정몽주 선생은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의 손에 죽었는데 말이죠. 그리고 정몽주 선생의 고향은 경북 영천입니다.

전해오는 말은 그래요. 포은 선생이 순절한 후 개성 인근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 영천으로 이장하러 가는데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앞의 명정(銘旌: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져 그곳에 묘를 썼다고 합니다.

전해오는 말을 그렇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속사정이 있었겠지요.

이미 이성계 이방원의 세상이 된 마당에 포은 선생의 죽음이 정치적으로 힘을 받을 수는 없었겠죠. 흔히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바글바글하지만 정승이 죽으면 그렇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죠.

어쨌든 당시 권력에서 밀려난 죽음이니 그 장례길 역시 힘을 얻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현실적으로 추측해본다면 개성을 떠나 상여를 메고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 도중에 상여 행렬이 명정이 바람에 날려 떨어졌다는 구실로 지금의 산소 자리를 잡은 것 아닌가 하는 현실적인(?) 추측을 해 봅니다. 

포은문화제보다 처인성문화제는 역사가 더 오랩니다. 사실 처인성문화제는 용인의 정체성과 관계 깊습니다.

용인이라는 지명 자체도 용구현과 처인현이 합쳐져 용인이 되었으니까요. 게다가 몽골 침략에서 조국을 구한 전투가 바로 처인성입니다.

그러니 처인문화제는 용인의 대표 문화제라고 봐야 할 겁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포은문화제는 독립된 문화제로 자리매김한 반면에 처인성문화제는 용인시민의 날 부속 행사로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료를 찾아도 1회 처인성문화제 관련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인문화원에 전화를 걸어봤습니다. 관계자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처인성문화제의 원래 이름은 ‘용구문화예술제’였다는 겁니다. 1986년부터 용인군 시절부터 개최한 행사였는데 2008년 무렵 지자체인 용인시에서 용인시민의 날로 명칭도 바꾸면서 처인성 전투 승전을 기리는 행사 예산도 줄었고 그 과정에서 몇차례 행사가 취소된 적도 있다는 내용입니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개최가 불투명하다고 합니다. 처인성문화제는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2012년에는 용인 경전철 관련 예산 투입등 문제로 처인성문화제는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해인 2013년에는 반대로 대규모로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처인대첩 782주년 기념식도 열리고 용인에 있는 55사단 봉화부대의 군악대의 축하 공연과 대첩 기념 퍼레이드도 성대히 진행됐습니다. 

지역 축제나 문화제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체계적인 홍보나 사업의 지속성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자체 단체장이 바뀌거나 또는 예산 문제가 생기면 행사가 없어지거나 축소되는 등 행사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후죽순 생겨난 지역 꽃축제가 어느 순간 없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일본 마츠리와 같은 깊은 역사성이 없이 탁상행정으로 진행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보다 지역 주민의 참여도가 현저히 낮습니다. 성공한 지역축제라는 것도 지역민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관광사업 목적이 더 크다 보니 지역문화제는 지역의 주민과는 별개 사항일 경우가 많습니다. 

용인을 대표하는 포은문화제 포스터/용인시
용인을 대표하는 포은문화제 포스터/용인시

시민의 참여가 지역문화제 성패 관건

지역 문화제나 축제를 지방자치단체의 단체장이나 관이 주도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단체장이 바뀌면 방침도 바뀌니까요.

지역 주민들이 축제의 주체로서 참여해야 지속가능합니다. 자치단체가 주민들의 욕구와 참여를 배제하고 지역 발전이라는 구호 아래 인위적인 축제를 남발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주민들을 축제의 단순한 구경꾼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지역축제는 명맥을 유지하기 쉽지 않습니다. 지역축제의 또 다른 문제점은 일부 정치인들의 업적 과시나 홍보용으로 장식물이 되는 경우입니다,

일부 업자들을 위한 행사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용인에는 역사성이 있는 포은문화제와 처인성문화제가 있다는 것은 다행입니다. 타지역 문화제와는 차별성을 갖고 더 발전을 시킬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아쉬움은 남습니다. 용인시에 20년을 넘게 살았지만 포은문화제나 처인성문화제에 한번도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언제 하는지도 몰랐으니까요. 100만이 넘는 용인시라는 규모에 비한다면 여전히 과거 용인군 시절의 문화제처럼 그야말로 지역문화제처럼 진행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100만 특례 용인시라면 지역문화제도 걸맞는 행사로 격상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좀 더 다채로워져야 합니다.

과거와 같은 백일장 수준으로는 곤란합니다. 승전 퍼레이드처럼 볼거리가 풍부한 모습은 더 확대할 필요도 있습니다.

가까운 수원시의 화성문화제는 볼거리와 사업, 그리고 지역 전통을 모두 살린 문화제라고 평가받습니다. 용인시도 이것을 롤모델 삼을 필요가 있을 겁니다. 

용인에는 백남준 아트홀도 있습니다. 일렉트릭 아트의 선구자가 백남준입니다. 미래를 열었던 열쇠와도 같은 예술입니다.

용인에는 SK반도체 공장까지 대규모로 들어섭니다. 그렇다면 용인은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는 허브와 같은 고장이 됩니다.

용인의 문화제 역시 미래를 여는 시민의 문화축제로 거듭나야 합니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