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오세훈은 박원순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다
[논단] 오세훈은 박원순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다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21.05.07 19: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월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국민의힘 오세훈 38대 서울시장이 지난 4월 22일 취임식을 가졌다. 장소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화상스튜디오였고 비대면 온라인이었다.

취임식에서 오세훈 시장은 ‘공정과 상생의 가치’를 화두로 삼았다. 이를 ‘오세훈의 약속’이라고 명명했다. ‘청년 서울이 다시 뜁니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다. 

새로운 것은 없었다. 하지만 새로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오세훈 시장은 취임 후 옳은 것을 두 가지 했다. 하나는 전 박원순 시장으로부터 성추행 피해를 입은 여직원에게 서울시를 대표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업무 복귀를 약속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박원순 전 시장의 장례를 법규에도 없는 서울시장(葬)으로 결정한 담당 국장을 좌천시킨 일이었다. 

서울시 담당 책임자는 ‘가이드라인을 따랐고 유족의 입장을 고려했다’고 하지만 국민들의 분노와 피해자 여성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박 시장의 성추행 사실관계가 문제라면 이미 그의 자진(自盡)이 증명한 것이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원인은 박원순 전 시장의 문제 때문에 치러진 것이다.

따라서 오세훈 시장의 이러한 회복적 결단은 정의롭다. 시민이 주인이라는 정치적 사고와 권력(權力)과 권한 (權限)은 다른 문제라는 도덕적 결단은 오세훈 시장의 취임을 더 의미 있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 시장이 가야 할 길은 험난하다. 불과 1년 앞으로 다가온 대선도 그렇지만 대선과 3개월 간격으로 치러지는 지방선거에서 오세훈 시장은 국민의힘은 물론이거니와 야권 전체, 그리고 방향을 잃은 보수 정치세력의 방향타가 되기 때문이다. 

박원순의 ‘소통’,  ‘지배의 정당성’

따라서 오세훈의 의미는 단지 보궐선거로 선출된 서울시장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가 가는 길이 보수가 가는 길이고 그의 정무와 행정에 대한 서울 시민과 국민의 평가가 어쩌면 야당인 국민의힘의 수권 능력에 대한 평가가 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세훈 시장에게 몇 가지 우려와 방향을 제안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오세훈 시장은 보수 정치집단의 통치능력이 진보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 통치란 행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영혼을 불어 넣는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이 문제를 옳게 알아봤다. 그는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헬라 제국의 등장으로 황혼기를 맞아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서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을 얻었다.

그가 얻은 답은 ‘폴리스의 시민됨’에 있었다. 시민정신이 와해되면 정치가 존재하는 폴리스도 와해된다. 

그러한 와해의 배경에는 자신의 삶만을 자각하고 추구하는 자연인(Zoe)이 정치적 영혼을 가진,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영원한 삶을 사는 폴리스의 시민(Bios)으로 더 이상 스스로를 자각하지도 못하며 그렇기에 정치적으로도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근대의 정치적 세계는 이러한 자연인과 시민의 두 경계에서 분열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 대한민국, 특히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로 상징되는 폴리스에서도 뚜렷하게 등장해 있다.    

‘내 집’으로 상징되는 부동산 폭등은 분명하게도 문재인 정권의 정책적 실패에 기인한 것이 크지만 그 이면에는 서울이라는 정치적 폴리스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더 이상 시민은 없고 자연인만 넘쳐나는 상황들에 기인하고 있음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 서울에 사는 가?’라는 질문에 서울에 거주하는 이들로부터 ‘폴리스의 시민’이라면 해야 할 답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박원순 전 시장은 옳든, 그르든 그 답을 스스로 제시했던 것이다. 

그가 서울 시정의 모토로 삼은 ‘소통과 참여’, ‘도시재생’과 같은 아젠다는 충분히 폴리스적이었다. 그렇기에 박원순 시장은 9년이라는 장기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박원순 시장은 서울을 정치가 발생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Polis라는 점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여기에 자신이 조직한 Bios(시민)들을 내세워 거주자에 불과한 서울의 자연인(Zoe)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고 참여시켰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행위들이 바로 ‘마을가꾸기’와 같은 행정들이었고 이를 통해 ‘박원순표’ 브랜드 시정을 창출했다. 그 힘으로 박원순은 서울시장을 넘어 대권을 바라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물론, 박원순의 그러한 폴리스 아젠다(Polis Agenda)는 옳을지는 몰라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 결과 서울은 잃어버린 10년의 시간 속에서 정체됐다.

선거 유세장의 오세훈 후보.
선거 유세장의 오세훈 후보.

세계 경제 규모 10위권의 나라의 수도 한복판에서 분변을 수거하는 집들이 ‘도시재생’이라는 이름으로 보존됐고 50년이 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주택의 벽에 낙서 같은 그림을 그려놓고는 ‘문화마을’이기에 개발하면 안 된다는 논리가 정당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렇게 박원순 시장이 9년의 기간을 통치하는 동안 보수 정치세력은 이에 상대가 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박원순이 서울 시민들에게 불어넣은 영혼이 있었던 것이다.

서울 시민들은 ‘박원순이 옳다’라는 가치 판단을 적어도 그가 성추행 사건으로 스스로 몰락하기 전까지 유효하게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한다면 틀린 것일까. 만일 박원순 시장이 살아 있고 성추행 사건이 없었다면, 문재인 정권의 서울 집값 폭등에 과연 박원순 시장이 속수무책 당하고 앉아서 ‘내 책임’을 인정했겠냐는 것이다. 

당연히 박원순 시장은 서울 집값 폭등의 원인을 탐욕스러운 부동산 투기 세력과 손잡았던 보수 정치세력의 후과(後果)로 치부하고 더 강력한 부동산 억제 정책을 내놨을 것이 틀림없다. 그랬어도 서울 시민들이 ‘내 집’ 아젠다로 지금처럼 분노하며 이를 정치적 이슈로 삼았을 것인지 의문이 해결되지 않는다.

보수는 이를 ‘선동’이라는 한 단어로 무시하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현실은 정치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어서 그러한 정치적 소통이 얼마든지 지옥 같은 현실을 천국으로 만들 수도 있고,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에는 정치란, 그리고 통치란 언제나 ‘지배 정당성’의 논리에 종속된다는 원리가 자리한다. 

지배의 정당성을 얻은 정치 세력과 지도자는 아무리 통치가 실패해도 그 정당성이 유지되지만, 지배 정당성을 잃은 정치 세력과 지도자는 아무리 왕도정치, 민주정치를 해도 거부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폴리스에서 일어나는 통치의 근본 원리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세훈 시장에게 당부하게 되는 것이다.

행정이 아니라 통치를 해야 하며 그러한 통치는 언제나 정치적 정당성을 담보한 시민과의 소통인 것이다. 국민의힘은 이를 잃었기에 국민으로부터 거부되었던 것이며 따라서 이를 회복하지 못하는 한, 국민으로부터 지지받지 못하리라는 것은 이미 민주당과 문재인 정권이 스스로를 통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혼자 뛰는 오세훈의 서울이 아니라 시민이 뛰는 서울이 되어야 한다. 서울의 문제는 서울의 시민들이 가장 잘 알고 있고 그 해결 방법도 서울의 시민들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