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청교도 신학의 관점에서 본 전염병
[논단] 청교도 신학의 관점에서 본 전염병
  • 박홍규  전 침신대 조직신학교수 
  • 승인 2021.06.22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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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말부터 시작된 코로나의 세계적인 확산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때이다. 비록 신속한 백신의 개발로 희망의 메시지가 몇몇 국가에서 들려오고 있지만 아직도 온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말미암아 신음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1년 이상 동안 지속되고 있는 정부의 고강도 방역조치에 따라 확산세를 막는 데는 비교적 선전했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위기와 피로도가 날로 높아가고 있다.

또한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높은 수위로 유지되면서 신앙적 차원에서 비대면 예배로의 전환, 예배 인원의 제한, 성가대 금지, 소그룹 모임 및 식사 금지 등 예배와 신앙생활에 다양한 제약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제약은 각 교회의 사정과 형편에서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의 사역과 신앙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신학과 신앙을 기초로 과연 지금의 위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 나가야 하는지 묻게 된다. 특히 어느 한 지역이나 국가를 넘어 온 세계가 고통을 받고 있는 전염병의 상황에서 우리가 서 있는 신학과 신앙은 어떤 해답을 줄 수 있을까?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한국 교회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청교도 신학의 전통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그 이유는 종교개혁 이후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후반까지 세워진 개신교 신학과 그 전통 속에 있는 청교도 신학 그 자체가 페스트, 기근, 전쟁과 같은 국가적이며 전 세계적인 재난의 상황 속에서 발전하고 수립된 신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에 선배들이 페스트와 같은 재난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1655년 런던 대역병, 1656년 런던 대화재 당시 청교도들은 찰스 2세의 통일령(Act of Uniformity)으로 말미암아 교회와 학교 강단에서 떠나 있는 상태였다. 또한 그들은 찰스 2세가 내린 국교회 밖에서 5인 이상 모임을 금지하는 집회금지령(Conventicle Article), 비국교도들은 자기가 살던 곳 5마일 내에서 살지 못하게 추방했던 5마일령(Five mile act)로 말미암아 런던에서 사역을 했던 청교도 목사들은 모두 런던에 머무를 수 없었다.

하지만 런던에 페스트가 돌자 거의 대부분의 국교회 목사들은 재앙 이후 도시를 재건할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귀족들과 부자들과 함께 도시를 떠났다. 런던의 강단은 비었고 가난한 백성들은 페스트가 창궐한 런던에 버려졌다. 

청교도 부흥을 만든 대역병

이런 상황에서 청교도들은 런던의 빈 강단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목사가 떠난 교회에 모여든 성도들을 위해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접조차 받지 못하고 매장되고 불태워지는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그들을 위해 설교하고 기도했다.

당시 악인과 의인이 함께 죽어가는 현장에서 그들은 영원한 천국의 소망이 있음을 설교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했다. 

그들은 비록 국가가 자신들의 목사직을 파면하고 강단에서 내쫓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목사직을 목숨을 걸고 수행했다. 그리고 그 결과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 시작했으며 회심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기적같이 페스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국교회 목사들 사이에서는 빨리 런던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나중에 자신들의 사역지가 다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돌기도 했다.

런던의 페스트가 잦아든 지 7개월 후 대추방령으로 런던에서 쫓겨나서 레이체스터에서 사역을 하던 사무엘 쇼(Samuel Shaw)는 <역병을 환영하라(Welcome the Plague)>라는 책을 통해 어떻게 대역병 이후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갈지 밝히고 있다. 쇼는 런던에서 피난 온 크리스천 친구들을 받았다가 자신의 가족도 감염되어 두 아이와 종과 누이와 친구의 자녀가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런던 대역병 당시를 묘사한 그림./위키피디아
런던 대역병 당시를 묘사한 그림./위키피디아

이런 고통 속에서 쇼는 과연 이 끔찍한 하나님의 의의 심판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비로우신가를 묻고 있다. 쇼는 비록 하나님은 자신의 이 땅에서의 위로를 빼앗아 가셨지만, “언제나 사랑과 선하심을 통해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순결하고 거룩하신 뜻을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쇼는 대역병과 같은 재난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본성과 선과 악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선한 의지를 가지고 계시며, 이런 의지는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고 무한하며 인간의 감정과 다르다. 그리고 하나님은 최고선이시며, 이 땅에서의 가장 큰 번영이 선이 아닐 수 있듯이 가장 큰 고통도 선일 수 있다”고 말한다.

쇼는 어떻게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거룩을 다 이해할 수 있는가 라고 묻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지금까지 육적으로, 비영적인 방법으로 사용한 것은 아닌지 부끄러워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쇼는 자신의 가족을 비롯 수많은 사람을 고통으로 몰고 간 대역병과 같은 국가적인 재앙과 관련해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기보다 하나님을 찬미하고,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며, 다시는 이런 재앙이나 이보다 더 큰 재앙이 내리지 않도록 우리의 신앙과 삶을 개혁할 것을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거룩하시며, 완벽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재앙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교훈을 배우고, 우리의 육적인 전염병보다 우리의 영적인 전염병이 더 심각하지 않은지 돌이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쇼는 이런 고통은 우리에게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과 단절되고 잃어버렸던 교제를 회복할 것을 촉구한다.

쇼는 이런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게 하며,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으로 충만하게 하고, 그 어떤 우리가 행한 외적인 의무들보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를 복종시키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들을 경험하게 하며, 눈물의 골짜기는 그 어떤 환상 골짜기나 의무나 규례들보다 하나님을 더 선명히 바라보게 하고, 우리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재앙의 상황 속에서 피조물의 본성이 허락하는 한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힘쓰라고 권면한다.

대역병으로 런던과 런던의 인근 도시들이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는 동안 존 번연(John Bunyan)은 베드포드 감옥에 찰스 2세의 통일령을 어기고 비국교도들 앞에서 설교를 했다는 죄목으로 수감되어 있었다.

번연은 비록 페스트와 같은 재앙이 일어났던 곳과는 거리만 중부지역에 있었지만, 그 자체로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번연은 이런 고통의 시간 속에서 기독교 역사가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인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를 썼다. 번연이 <천로역정>을 쓴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목회적인 동기 때문이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설교를 들을 수 없는 자신이 목회하던 가난하고 학식이 적은 성도들에게 우화 형식을 통해 기독교의 구원의 진리와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에 대해 쉽고도 기억하기 쉽게 가르치고자 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삶의 과정을 나그네로 묘사하고 있는 <천로역정>은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일 뿐 아니라 당시 고통받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과 용기를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나그네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은 중세 후기 둔스 스코두스가 신학을 “여행자의 신학(theologia viatorum, theology of travellers)”으로 이해했을 때 이미 제기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나그네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은 당시 고통 받은 자들에게는 소망을 주는 메시지였을 뿐 아니라 나그네로서의 삶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이 땅에서 영광과 부를 누리고자 했던 사람들에게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1660년대 런던 대역병 당시 매장된 유골이 2015년 런던 도심에서 발굴됐다. 당시 런던 인구의 20%인 10만명이 숨졌다. /BBC
1660년대 런던 대역병 당시 매장된 유골이 2015년 런던 도심에서 발굴됐다. 당시 런던 인구의 20%인 10만명이 숨졌다. /BBC

페스트 유행 속에서 탄생한 ‘천로역정’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편집했던 조지 오퍼(George Offor)는 이 책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생이 순례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주제이다. 우리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순례를 한다. 영혼은 시간을 넘어 끝이 없는 영원으로 순례를 한다… 모든 인간은 순례자이다. 모두가 이 세상을 지나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나라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여행이라고 기꺼이 생각한다. 그러나 더 큰 다수의 사람들은 시간이 영원을 위한 준비라는 것을 생각하기를 꺼려 한다. 그런 이런 무시의 결과로 그들이 저항할 수 없는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가 가까이 올 때 두려움에 떤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타난 나그네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단순한 현실도피적인 차원에서 피안의 세계만을 바라보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청교도들은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모토를 교회론까지 적용해 보다 철저한 종교개혁을 꿈꿨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원한 천국에 가기까지 삼대 원수, 곧 우리의 옛 본성과 세상과 이 모든 것을 통해 역사하는 사탄과의 영적인 싸움의 현장으로 여겼다. 곧 그들에게 이 땅에 있는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the militant church)”였다. 번연은 이런 사상을 그의 다른 책 “성전(The Holy War)”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자신들의 처한 현실을 복음으로 바꾸고, 신앙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며, 영원한 천국을 향해 순례하는 순례자들이자 그리스도의 군사들로 파악했다.

대역병이 런던을 휩쓸 때도 찰스 2세는 청교도들에 대한 핍박을 늦추지 않았다. 찰스 2세는 참수를 당했던 찰스 1세의 전철을 밟고자 철저하게 의회파를 견제하고 교회를 자신의 권세 아래 두고자 했다. 반면에 찰스 2세는 식민지 아메리카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썼다.

그리고 영국 내에서 왕권에 도전하고 분리주의를 주장하는 골치 아픈 존재였던 청교도들을 식민지 개척에 앞장세우자 했다. “신앙의 자유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식민지로 가서 개척하라. 이곳에 머물고 싶은가? 국교회 내에 머물러 있으라.” 이것이 당시 신앙의 자유에 대한 찰스 2세의 답이었다.

그리고 대역병과 대화재와 같은 국가적인 재앙 앞에서 그 원인에 대한 해석도 서로 달랐다. 

빈센트와 같은 청교도들은 찰스 2세의 억압정책에서, 펜들리와 같은 국교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청교도들의 반역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 했다.

찰스 2세는 1672년 2월 점점 악화 되고 있던 청교도들의 반감을 누그러트리려고 통일령과 집회금지령, 5마일령과 같은 종교탄압법으로 말미암아 구금되었던 사람들을 잠시 사면해 줬다. 하지만 다시 법을 어기면 엄격히 법으로 다스리겠다는 조항이 붙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번연은 잠시 풀려났지만 다시 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수감되었다. 1685년 찰스 2세에 이어 스코틀랜드 왕이었던 제임스 7세가 제임스 2세로 영국의 왕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그는 1687년 신교자유령을 내려 더 이상 양심에 따른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영국 내에서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10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신앙의 자유와 더불어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식민지 아메리카로 이주하는 길밖에 없었다.

청교도 신학은 영국 내에서 종교개혁이 성공하고 개신교회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발전하고 형성된 신학이었다. 이 과정에서 청교도들은 국가의 통제 아래 교회를 두고자 했던 통치자들에게 많은 핍박을 받아야 했다.

더욱이 청교도들이 신학을 수립하고 신앙 생활하던 시대는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과 같은 국가적인 재앙이 상수로 존재하던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청교도들은 종교개혁 사상을 이어받아 정통적이면서 실천적인 신학을 수립했다. 

특히 자신들의 시대에 거듭해 일어났던 페스트와 같은 역병의 상황 속에 그들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자 했다. 특히 찰스 2세의 종교탄압 정책이 최고조에 이를 때 일어난 런던 대역병은 여러모로 청교도 신학의 정당성과 효용성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게 했다. 

이런 상황 속에 청교도들은 대역병을 하나님의 의의 심판으로 이해하면서 개인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의 회개와 개혁을 촉구했다. 그러면서도 공적인 심판 앞에 개인이나 혹은 어느 특정한 사람이나 세력을 마녀사냥 하듯이 비난하고 그 책임을 전가하는 것에 대해 극히 경계했다. 

오히려 그들은 육적인 전염병에서 자신의 영적인 전염병을 치료하고자 했으며 가난하고 소외받던 백성들과 함께 하고자 했다. 또한 신앙의 자유를 향한 그들의 열망은 전염병도 찰스 2세의 탄압도 결코 꺾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천국을 향해 순례하는 나그네로서 이해했을 뿐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이해했다. 

이런 그들의 신학은 그들로 하여금 영국 내에서 교회와 사회와 국가의 개혁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향한 그들의 도전과 투쟁에 기여했다, 또한 신앙의 자유와 시민으로서의 자유에 대한 그들의 열망은 지속적인 식민지 아메리카의 개척과 새로운 나라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 본 기사는 지난 5월 ‘한국기독교학술원 제57회 학술 세미나’에서 발표된 박홍규 박사의 발제문을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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