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의 물소뿔(水牛角)과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
조선(朝鮮)의 물소뿔(水牛角)과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
  • 서정순 가톨릭상지대 교수
  • 승인 2021.06.25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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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물소뿔과 대한민국 국가보안법의 공통점은 동 시대에 국가안보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활(角弓)은 조선시대 가장 일반적이고 중요한 개인 병기로 활을 만드는 데 물소뿔(水牛角)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재료이다. 활의 안쪽에 물소뿔을 덧대야만 활의 강도를 높여 활이 부러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사거리를 연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소뿔을 덧대지 않은 활은 탄력이 약해 쉽게 부러지며, 시위를 많이 당길 수 없어 사거리가 짧을 수밖에 없다.

한편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은 해방 직후부터 시작된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을 막고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정책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12월 제정되어 현재까지 시행되고 있다. 지금까지 전쟁을 억제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국민들의 반공의식과 애국심, 대한민국 국군과 한미동맹, 국가보안법 등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국가보안법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오고 있는 것이다.

세조 때부터 시작된 조선의 물소 사육은 자주국방의 일환으로 명나라로부터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였으며,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은 공산주의 침투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제정된 법률이었다.

활은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개인 병기로 각궁 한 장을 만드는 데 물소뿔 2개가 필요하다. 그러나 물소뿔은 조선에서 생산되지 않아 전량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전략물자의 하나였다. 세종 17년 4월 13일 좌의정 최윤덕은 비변사의(備邊事宜)를 올릴 때 “평안도로 하여금 금법(禁法)을 범하여 몰입(沒入)된 잡물(雜物)을 가지고 요동(遼東)에 가서 물소뿔[水牛角]과 진사(眞絲)를 무역하여 각궁(角弓)을 만들게 할 것. 제용감(濟用監)의 포물(布物)을 가지고 요동에서 물소뿔과 진사(眞絲)를 바꾸어 군기감으로 하여금 각궁(角弓)을 제조하게 할 것” 등을 주청하고 있다.

물소는 아열대 또는 열대지방에서만 서식이나 사육이 가능한 동물이어서 조선은 활을 만들기 위한 물소뿔 전량을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중국은 이러한 조선의 약점을 이용해 물소뿔 금수조치 등으로 조선을 통제했으며 특히 북벌론이 팽배하던 조선 초기에 더 강경했다.

활을 만들기 위해 켜서 가공해 활에 붙인 것(검은색이 물소뿔)
활을 만들기 위해 켜서 가공해 활에 붙인 것(검은색이 물소뿔)
물소뿔을 가공하지 않은 상태
물소뿔을 가공하지 않은 상태

조선은 북벌론에 대한 중국의 오해를 풀고 물소뿔을 획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조정에서 고민하는 모습이 조선왕조실록에 수시로 등장한다. 조선은 물소뿔을 구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은사나 사신을 보내거나 국가 주도로 밀수를 시도했다. 사은사나 사신을 보내면 단지 50개 정도만 보냈으며 밀수를 시도하다가 적발되면 참수해 압록강 변에 효수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과도하게 비싼 값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중국의 압력과 통제, 횡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조 때는 물소를 직접 사육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즉 조선의 물소 사육은 자주국방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명나라로부터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였다.

세조 7년(1461)에 유구국(琉球國, 현 오키나와)은 조선에 조공으로 물소 한 쌍을 바쳤는데 물소는 추위에 약하므로 조선에서는 남해안 웅천현에서 겨울을 나게 한 후, 이듬해 봄 창경궁으로 옮겨와 사육을 시작하게 된다.

세조는 사복시에 물소 사육 관원을 임명하고 물소 사육에 관한 책을 펴내는 등 물소 번식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며 어느 정도 번식이 되자 민간에 분양해 국가 통제 하에 사육토록 했다. 창경궁에서 물소를 사육한 이래 15년 동안 번식된 소가 70여 두에 불과하자 성종은 각종 포상 제도를 만들어 물소 번식을 장려했다.

성종의 물소 번식 장려정책으로 민간에 물소가 급격히 증가하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물소는 꼴을 많이 먹을 뿐 아니라 사나워 경우(耕牛)로 부리기에는 문제가 있었으며 함부로 도살을 하거나 죽게 하는 경우에는 엄벌을 받아 민가에서 사육을 꺼리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물소 사육을 장려하기 위해 성종은 노력을 했으며 성종 후기부터는 물소뿔 자급자족이 어느 정도 이뤄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은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 등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형법보다 먼저 제정된 법으로 만일 국가보안법이 없었다면 공산주의 혁명투쟁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해방 직후부터 수많은 폭동을 일으켰던 공산주의자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적화통일을 위해 셀 수 없을 정도의 간첩을 남파시켰으며 대한민국 전복을 위해 여러 차례 지하당 구축을 시도했다.

국가보안법이 없었다면 간첩의 남파나 지하당 구축은 성공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아마 현재의 대한민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국가보안법이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 검거가 가능했고 국민들의 강한 안보의식도 유지될 수 있었다.

조선 중종 이후 물소에 대한 인식은 각궁용 물소뿔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닌 농사용으로 변질되었으며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은 자유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국민의 인권을 탄압하는 법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연산군 폐위 후 반정으로 집권한 중종 이후 물소에 대한 인식은 세조∼성종대의 수우각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농사용(耕牛)으로 변질되었으며 사나워 농사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물소를 섬으로 추방하기 시작했다.

중종 4년(1509) 7월 병조판서 등은 왕에게 “물소가 비록 우리 땅의 소산이 아니지만 각 고을에 나누어 기르게 한 것은, 자식(孶息) 시켜서 우리나라 인민으로 하여금 경종(耕種)에 쓰도록 하고자 하여서였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소용이 없다 하여 해도(海島)로 추방하였으니, 필시 주리고 얼어서 모두 죽었을 것입니다.

이는 선조의 뜻이 아니니, 청컨대 민간에 나누어 주고, 만약 물고(物故)하더라도 그 치사(致死)케 한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백성은 능히 길러서 점차 경종(耕種)을 익혀 백성이 그 이익을 입을 것입니다"라고 고했다.

즉 이미 섬으로 많이 보내 죽었을 것이니 앞으로는 민간에 나눠 주되 어떻게 처리하더라도 죄를 묻지 말라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그해 11월부터 원하는 민간인에게 죽거나 잃어버리더라도 죄를 묻지 않는 조건으로 나눠 주기 시작했다.

이러한 조건에도 물소 기르기를 원하는 백성이 많지 않아 섬으로 보내 방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듬해인 중종 5년 물소를 섬으로 보내지 말고 백성에게 나눠 주자는 상소가 있었으나 왕은 윤허하지 않았으며 이후 조선왕조실록에서 물소에 대한 기사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물소가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조정은 물론 백성들 사이에서도 안보의식이 이완되기 시작했으며 왜구와 오랑캐의 침탈이 더 빈번해졌다.

한편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은 안보수호법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역할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이후 존폐 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특히 진보세력이 집권한 경우 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들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권안보용 인권탄압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 중에 ‘국가보안법 때문에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고 있다. 인권을 탄압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실제 국민 대다수는 2000년대 이전까지는 국가보안법이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살아왔을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전복을 기도하거나 최소한 동조하는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선전 선동에 속아 국가보안법 폐지에 동조하는 국민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2000년대 초 어느 대통령의 “이제 한반도에서 전쟁은 없다”는 말 한 마디가 이들의 주장에 기름을 부었는지도 모른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동조하는 국민들이 증가할수록 대한민국의 안보의식은 비례해 해이해질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조선의 물소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섬으로의 퇴출·방치는 국가안보 의식 해이로 이어져 임진왜란을 초래했다. 국가보안법이 인권탄압법이라는 인식이 확대되어 폐지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병장기인 활을 만드는 데 필수 재료인 물소뿔을 얻는 물소를 퇴출시킴으로써 당연히 활의 제작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병조판서마저도 물소를 군용이 아닌 농사용으로 인식했다는 것은 당시 안보의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 국경지역과 해안 일대에서 오랑캐와 왜구의 노략질이 극심했음에도 체계적인 대비책을 갖추지 못했다. 이러한 인식은 선조 때까지 이어졌으며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민족 역사상 가장 처참한 전쟁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국가보안법이 존치되느냐 폐지되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다. 존치론자들과 폐지론자들이 두 진영으로 나눠 싸우고 있으며 청와대로 국회로 각각 국민 청원에 참여하고 있다.

만일 국가보안법이 폐지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김일성의 왜곡된 역사관과 김일성 우상 숭배 사상이 각급 학교에 급속하게 전파될 것이다. 보편적 사회질서와 도덕이 파괴되고 한 세대가 지날 때쯤 되면 공산주의와 김일성 주체사상이 이 사회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 전복을 위해 북한과 공산주의자들이 지향했던 과거의 지하당 구축 전술은 정당법에 의해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게 될 것이다. 일정한 요건을 갖춘 정당은 정당법에 의해 국민의 세금을 지원 받는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에게 대한민국 국민의 세금을 지원하는 참담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이다. 즉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결국에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 이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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