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경기 남부를 얻었던 신라, 포기했던 백제의 운명
[기획연재] 경기 남부를 얻었던 신라, 포기했던 백제의 운명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21.08.30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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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를 가다   

‘아쌀하게 붙어 부러!’ 

2003년 영화 ‘황산벌’의 포스터 문구다. 영화 황산벌은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을 각각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방언권으로 단순화시킨 코미디다. 벌교에서 차출된 백제 병사들의 걸쭉한 ‘욕설 무공(?)’에 신라 병사들이 귀를 막고 쓰러지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런 과정에서 ‘백제는 호남 세력’이라는 메시지가 그렇게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더 확실하게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은 영화 황산벌과는 사뭇 다르다.

백제의 본류는 남하한 부여계 또는 고구려계 세력과 한강 이남, 보다 정확하게는 경기 남부의 토착세력 간의 결합이다. 송파구의 석촌동 고분군이 이를 증명한다. 이 고분들은 전형적인 고구려식 돌무덤이면서도 고구려와는 다른 내부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한성백제의 도읍인 위례성으로 사실상 확인된 풍납토성. 성곽의 흔적만 남아 있다.(송파구)
한성백제의 도읍인 위례성으로 사실상 확인된 풍납토성. 성곽의 흔적만 남아 있다.(송파구)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석촌동의 고분들이 기존의 토착세력의 묘제에 고구려식 묘제가 입혀졌음을 알아냈다. 이 시기가 바로 하남 위례성을 수도로, 그 역사가 500년 가까운 한성백제((BC 18년~AD 475년) 시대이며 한성백제는 한강 이남과 용인에서 발원해 평택을 지나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안성천 이북의 경기 남부 세력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한성백제의 위상은 대단했다. 한반도의 가장 풍요로운 지역에 자리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다져왔다. 그 결과 고대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백제를 최고의 전성기로 이끌었던 이는 13대 근초고왕(?~375)이었다.

근초고왕은 왕위에 올라 한반도 북부지역과 중국의 동북지역을 지배하던 고구려와 전쟁을 했다. 당시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큰 나라로 백제보다 3~4배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

하지만 백제는 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또한 마한의 남은 세력들을 백제에 편입시키고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가야에까지 진출해 명실상부 삼국 중 가장 강한 나라를 이룩했다.

근초고왕은 한반도에서 백제의 안정을 바탕으로 대외적으로도 국력을 팽창시켰다. 중국 대륙에서 통일왕조가 무너지고 북중국이 혼란해진 상황을 틈타 요서지역으로 진출했다는 기록이 중국의 사서에도 등장한다.

요서 진출에 관해서는 정복이냐 해상 활동을 위한 거점의 확보냐 또는 사실무근인가에 대해서 논란이 있으나 진출 시기에 관해 백제의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근초고왕 무렵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전쟁에서의 승리뿐만이 아니라 근초고왕은 중국의 동진, 일본열도의 왜국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동북아시아 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어떻게 한성백제는 북방의 강국 고구려와 신라의 견제를 이겨내고 이런 번영의 역사를 가질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이 최근 경기 남부의 철기 유적지로부터 들려온다.

최근 발굴된 고고학적 성과에 의하면 용인에서 발원하는 탄천(炭川) 수계를 따라 경기 남부에서 상당히 발전된 형태의 초기 철기 유적들이 등장한다.

이제까지 역사학계의 해석은 한반도 남부의 철기 문화는 경기 남부가 아니라 가야 세력의 본원지였던 김해, 부산 등이 가장 선진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의문이 있었다. 금속 문화에서 선진적이었던 고조선의 위만 세력이 남하해 정착한 금마군이 지금의 전북 익산이 아니라 용인 일대를 포함한 경기 남부의 광주라는 가능성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역에서 청동기나 철기의 이른 흔적들이 나와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 증거들이 등장한 것이다.

고고학적 조사를 위해 절개된 풍납토성. 높이 15미터 정도의 대규모 판축기법으로 조성된 것이 확인됐다.
고고학적 조사를 위해 절개된 풍납토성. 높이 15미터 정도의 대규모 판축기법으로 조성된 것이 확인됐다.

한성백제의 영광이 시작된 곳

경기 남부의 수원·화성·용인·오산시를 범위로 하는 하천 수계를 따라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고고학적 유적들이 발굴되기 시작했다. 2017년 발굴 조사된 화성 수영리 유적은 경기 서해안 지역에서 발견된 인천 검단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과 더불어 경기도를 대표하는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이다.

화성 기안리 유적에서는 대규모 철기 생산시설이 확인됐다. 특히 용인 수지 유적에서는 낙랑이나 북방에서 수입한 철기를 모아 뒀다가 다시 제련해 제작하는 특성을 보였다.

그만큼 철기를 다루는 기술이 고도화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철기 제작에 필요한 목탄과 철괴들의 운송에 하천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고 탄천(炭川)이라 이름 붙은 경기 남부권의 수계 명칭도 이러한 철기 제련과 연관되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처럼 경기 남부의 이른 시기의 청동기와 철기 유적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이 韓에 들어와 정착한 곳이 경기 남부 일대라는 설을 지지한다.

경기 남부권에는 부여계(고구려계) 온조 세력이 남하해 도착하기 약 100년 전에 이미 철기 문화에서 선진적이었던 고조선계와 융합한 범 마한 세력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들보다 선진적인 철기 제작 기술을 가진 온조계가 다시 결합하면서 한성백제의 철제 농기구 사용으로 인한 농업 생산력과 무기 제작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것이 바로 한성백제가 번영할 수 있었던 국력의 토대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성백제의 영화(榮華)는 그러나,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수도 한성이 파괴되고 백제의 개로왕이 아차산에서 전사하자 급하게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기고 이어 다시 사비(부여)로 재천도하면서 근본적인 국운 몰락의 구조를 생산하게 된다.

한성백제의 경기 남부권을 사실상 포기하고 웅진과 사비의 새로운 지역 세력이 백제의 중앙에 진출하면서 500년 가까운 세월의 한성백제라는 정체성에 균열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538년 성왕이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다시 옮기는 과정에서 백제의 중흥을 꾀한다며 국호를 남부여라고 개칭했던 점이 말해준다.

남부여라는 국호가 과연 이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쓰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일본서기>를 비롯 기타 중국의 사서들이 남부여를 백제의 개칭된 국호로 삼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후대 사서들에서 성왕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으며 그가 귀족과 백성들로부터 협조를 구하지 못했다는 점, 특히 나제동맹으로 한강 이남 유역의 경기 남부 10군현을 고구려로부터 회복했다가 신라에 빼앗기는 상황에서 자포자기하고는 관산성 전투에 패해 백제 몰락이 시작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백제가 경기 남부를 포기하고 천도하면서 한성백제의 위대한 역사를 만들었던 이 지역의 세력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간에 치열한 한강 유역 쟁탈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구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성계가 李氏조선을 개국할 때 한양을 수도로 삼은 것은 어쩌면 한성백제 이후 통일신라이든 고려이든 관계없이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문화와 농기술을 발전시켜온 경기 남부인들의 정체성이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이의 기호학파 성립지가 경기 남부를 핵으로 하는 이유도 이러한 한성백제의 문화적 유산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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