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뷰] 배트맨 비긴즈가 반사회주의 영화인 이유
[월드뷰] 배트맨 비긴즈가 반사회주의 영화인 이유
  • 김수인  서울대 대학원·고교 영어교사
  • 승인 2021.09.10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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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2008)’에서 조커의 악함이 더 강력하게 그려졌다면, ‘배트맨 비긴즈(2005)’에 나타난 배트맨은, 전후의 많은 시리즈 중에서도, 대중들에게 가장 ‘배트맨’다운 미국적 영웅의 캐릭터를 보여줬다고 평가받는다.

배트맨 비긴즈에서의 배트맨은 더 고전적이고 인간적인 영웅의 특성이 있다. 배트맨 비긴즈는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인물의 탄생 과정을 서사적으로 그려나간다.

그는 극 중에서 자신도 지독한 내면의 잠재된 트라우마와 힘겹게 싸워감과 동시에, 어둠 속에 자신을 은신하며 사회를 잠식하려는 거대한 악에 고독하게 맞선다.

어린 시절 겪은 개인적 트라우마의 극복과 고담시를 악으로부터 구해야 하는 두 가지 갈등이 함께 중첩된다. 배트맨이 내면적으로는 트라우마형 공포에 대면하여 고군분투하고, 외면적으로는 고담시를 ‘공포’로 잠식시켜버리려고 하는 악의 세력에 대항하고 있다. 많은 관객은 이러한 인물의 양면적 갈등에 크게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그는 ‘정의’라는 한 가지 해결책을 따르고 있다. 배트맨 비긴즈의 배트맨은 주인공을 억압하는 ‘갈등’과 ‘성장’ 그리고 ‘극복’이라는 전형적인 영웅적 서사의 과정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또 현대 사회, 특히나 미국 사회가 바라보는 사회적 딜레마와 그에 대한 대안적 관점들을 담아내고 있다.

영화 전반에 ‘보이지 않는 적’인 ‘공포’의 감정은 무엇을 의미하며,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정의’의 모습은 무엇인가? 배트맨의 선택과 갈등은 보는 이에게 전혀 낯설지 않고 깊은 공감을 끌어낸다. 배트맨은 일찍이 성경 속 인물들이 겪었던 갈등과 내면을 그대로 체험하고 있다.

 ‘공포’와 ‘불의’를 대면하는 과정에서 매우 인간적이면서도 영웅적 면모를 잃지 않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반응과 선택을 통해, 미국식 대중문화 속 저변에 자리 잡은 기독교적 도덕률과 가치관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나, 군중들에게 공포를 조장하여 사회를 삼키려는 악의 세력들에게 맞서는 배트맨은,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는 ‘사회갈등’과 ‘계급’이라는 사회주의적 세계관과 그의 대안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반사회주의적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재벌 아빠의 무고한 희생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는 고담시의 가장 큰 기업가이다. 그는 고담시 사람들의 안전과 복지를 생각하며 늘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선한 부자였다.

우리 주변에는 선한 부자들이 존재한다. 부는 자본을 기준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사회적 기여’라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화폐와 자산이라는 보이는 가치로 환산하게 된다.

부유함 그 자체를 악으로 보는 일련의 왜곡된 시선은 인간의 인식을 비관적이고 파괴적으로 만든다. 아들에게는 누구보다 다정한 아버지였고, 위험에서 자신을 구해주던 영웅이었던 재벌 아빠는 사회적으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던 매우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는 서민들의 삶의 개선을 위해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고 빈민들을 돕던 선한 지도층이었다. 그는 의사이면서도 선조들의 유산을 전문 경영인에게 위탁함으로, 배트맨의 자본주의적 세계관을 드러내 보였다.

그런데 브루스의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고담시의 뒷골목에서 목걸이를 주지 않는다고 분노한 강도에게 총을 맞고 죽게 된다. 사실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탐하는 것은 재벌이 아니라 바로 이 강도였다. 강도가 될 수 밖에 없는 사정이야 있겠지만 가난하다는 것이 언제나 피해자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고귀한 가문의 혈통을 가진 브루스가 자신의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희생으로 인한 고통을 겪었지만 그의 개인적 상실과 분노는 사회적 정의를 바르게 잡아가는 것으로 승화된다.

배트맨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양의 신비로운 사원을 찾아 듀커드라는 스승 밑에서 무술 수련을 하게 되지만 악의 심판자로 살인을 종용하는 이들을 떠나게 된다. 이에 듀커드와 적이 되고, 배트맨은 자신을 죽이려는 듀커드를 죽일 수 있었지만, 도리어 생명을 구해준다.

배트맨은 고담시로 돌아와 부패와 범죄로 파멸되어 가고 있는 고담시 상황을 보고 진정한 어둠 속의 사도가 되어 활약한다.

무술과 무기로 적을 제압할 힘을 기르고, 고담시의 새로운 정의의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었는데, 듀커드는 고담시를 공포가스로 통제하려는 거대한 계획을 세워 배트맨과 적이 된다. 다시 배트맨과 듀커드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 사이가 되었지만 배트맨은 그 순간에도 자신의 손으로 적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는다.

브루스는 성경의 다윗과 너무나 닮았다. 사울이 다윗이라는 잠재력 있는 인물을 발굴하고, 자신의 딸까지 주며 키웠지만, 결국 사울은 심판자가 되어 다윗을 위협한다. 브루스와 같이 다윗도 평생 복수심이라는 감정과 싸워야 했지만,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적, 사울을 살려주어야 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임을 숨기려고, 일부러 지적장애인에 얼간이 흉내를 내는 모습도 비슷하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에 배신을 당하고, 정면으로 싸우게 되지만, 마지막 적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칼자루를 쥐고 있던 순간에도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심판의 권한을 위임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 12:19).”

인간을 끊임없이 악에 대해 심판자의 자리에 오르도록 유혹하는 것은, 내 손으로 복수를 했을 때 지금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줄 것이라고 예상한다. 복수로 지난날 나의 상처와 분노가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로 생각한다.

듀커드는 자기 생명의 은인인 배트맨의 턱밑까지 쫓아와 배트맨의 목숨을 위협한다. 배트맨은 다시 배신당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도 스스로 복수의 심판자로 행하지 않는다. 악에 대한 심판과 집행 절차마저도 절차적 정당성을 충족시킬 때야만 비로소 정의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집행하는 선과 악의 기준은 불완전하며 어느 순간에는 매우 자의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주의 사상에서는 악에 대한 절대적 심판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그 자리에 오르려고 한다. 그리고 공포를 이기기 위해 스스로 공포가 되라는 듀커드의 말처럼 두려움을 주는 역사의 심판자가 되려고 한다.

인류 역사의 많은 비극은 악을 악으로 갚으면서도 스스로 악이 되어 가는지 자각하지 못하는 데서 일어난다. 과거 역사의 억울한 피해자는 또 다른 역사의 순간에 가해자로 등장한다.

그것이 인류 역사의 끊을 수 없는 슬픈 굴레이다. 정의가 짓밟힐 때가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그에 대항하는 불의한 방법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 역사의 피해자를 대변한다고 하며 혹은 불의에 대한 심판이라고 시작된 많은 사회 운동들이 나중에는 그러한 악을 오히려 답습하는 모순을 우리는 흔히 본다.

어린 시절부터 고아가 되어 의지할 데 없는 브루스를 돌보아 온 알프레드라는 인물이 있다. 언제나 곁에서 충성스럽게 브루스를 수종하는 알프레드는 단순한 집사 그 이상의 직업의식을 가지고 있다.

알프레드는 고아와 같은 브루스를 보살피고 지켜주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다. 가장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부상을 당한 영웅 배트맨을 구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엄마처럼 돌보아 주며 그의 부상을 치유하기도 한다.

브루스 이상으로 알프레드는 웨인가의 선조들의 뜻과 유산을 묵묵히 함께 지켜내는 단순한 집사, 그 이상의 존재다.

사회주의자들의 머릿속에는, 이 세상이 단순화된 계급과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강조하고 비판하지만, 현실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들은 정작 그 구조 속에 개인들이 어떠한 의미와 책임감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간과한다.

단순한 구조와 갈등 그 이면에 우리 사회는 보이지 않는 직업의식, 윤리와 같은 정신적으로 지탱되는 부분이 훨씬 더 크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구조를 뛰어넘어 그 속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어떤 의미와 역할로 남아 있느냐 하는 것이다.
 

권위와 질서 아래 형성된 구조는 사회를 구성하는 뼈대가 되고, 그 뼈대가 무너지면 사회는 붕괴하기 시작한다. 그 구조를 부정하면 그 속의 관계들까지도 왜곡된다. 다만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진정성을 가지고 일할 때, 우리는 언제나 배트맨에게 대부이자 영웅이었던 알프레드처럼 영웅의 영웅이 될 수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지적하는 세계는 언제나 평면적이고 1차원적인 갈등의 연속일 뿐이다.

덴마크가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동상. 하나님의 구원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은 무기력하게 공포와 두려움의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덴마크가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동상. 하나님의 구원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은 무기력하게 공포와 두려움의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포, 사회주의의 가장 큰 무기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공포와 두려움의 감정을 실존적 고민으로 풀어냈다. 하나님의 구원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은 무기력하게 공포와 두려움의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실존주의에서는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에 일어나는 감정을 실존적 불안이라고 한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는 이를 ‘공포’라고 부른다. 

실존주의자들은 이러한 불안을 잠재적인 존재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본다.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불안함을 인정할 때, 자신의 존재 자체에 회의를 느낀다. 그리고 이 존재 자체에 대한 절망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

어린 시절의 브루스도 박쥐라는 미지의 것에 직면했을 때 지금껏 자기가 알고 있던 안정된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박쥐라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주었던 아버지를 잃었을 때도, 그는 극도의 공포를 경험했다. 

그러나 브루스의 아버지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난다. 극 중에 배트맨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가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악의 세력들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

그리고 그들은 공포 가스를 도시 상수도에 풀어 도시 전체를 공포에 몰아가고, 도시를 손에 넣기를 시도한다. 프랑스 사회심리학자 귀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은 사회주의를 단순한 사회 유형이 아닌, 하나의 믿음 체계로 정의하며, 사회주의 뒤에 숨겨진 군중의 심리학을 분석했다. 그는 사회주의는 도덕과 종교에 대한 기존의 체계를 대체할 수 있는 강력한 신념 체계라고 경고했다. 

공포라는 기제는 사회주의자들이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 귀스타브는 프랑스 혁명에서 분노한 대중들이 타락한 군주에 대해 분노하고 심판을 자행했지만 그를 통한 권력의 찬탈이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c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와 같은 또 다른 폭군을 낳았다고 평가한다.

말로만 떠드는 어설픈 인도주의가 역사의 또 다른 비극을 낳는다고 경고한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이 말하는 인간의 힘으로 지상에서의 행복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 결코 실현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예측했다.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도 사회주의의 결말을 독재정권이라는 비극으로 보고 있다. 공포시대와 코뮌(Commune) 같은 격변이 사회주의가 사회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집단주의적 공포가 풀어지고 불의에 대한 심판이 독점되는 사회는 공포 가스에 취한 고담시처럼 위험하다.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두려움 그 자체가 되어라.’ 박쥐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박쥐가 되었던 배트맨의 선택처럼, 인간의 두려움의 끝은 인간을 더 두려운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절대자 하나님께 대한 의뢰함이 없다면, 공포 속에서 공포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인간의 본능을 따라, 수많은 투쟁적인 환경에 놓인 인간은 더 두려운 괴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불의에 대해 심판을 외치는 그 사람이 곧 정의로 정의되는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사회의 사회주의는 끊임없이 우리의 인식의 불완전함을 이용한다.

세상의 불의를 외치는 사람이 정의가 되어버리는 시대, 정의의 기준이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되어가는 요즈음, ‘배트맨 비긴즈’를 다시 보며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정의’의 기준이 무엇이고 어디서 멈추어 서야 할지를 아는 겸손함에서 인간의 정의가 완성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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