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뷰] 이승만의 교육정책과 한강의 기적
[월드뷰] 이승만의 교육정책과 한강의 기적
  • 김현태  현경사회복지회장
  • 승인 2021.10.01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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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산업혁명으로 서구의 경제력이 급성장하면서, 서양의 열강들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식민정책을 펼치던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몰락한 양반 가문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6살 때 이미 천자문을 암송한 신동 이승만은 서당에서 중국의 유교 경전을 일찍이 터득해, 지적 기초를 단단히 닦았다. 또한, 개신교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하며 전 생애를 통해 큰 변곡점을 찍게 되었다.

서당에서 이루지 못한 청운의 꿈을 배재학당에서 이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결과 입학한 지 6개월 만에 초보 영어 교사가 되는 쾌거를 이뤘다.

이승만의 교육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그의 교육혁명에 대한 사고(思考)를 유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서재필의 미국 정치에 관한 강의를 들으면서, 신학문을 배웠고, 부패한 조선의 정치개혁에 관해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 이승만은 협성회를 통해 민주주의를 익혔고, 졸업식에서는 유창한 영어로 ‘한국의 독립’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졸업 후 독립협회를 통해 나라가 처한 현실이 국민의 무지에서 비롯되었음을 통감하고, 국민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강대국에 의해 노예 국가가 되는 길을 막는 데는, 국민의 눈을 뜨게 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절박감으로, 만민공동회에서 피를 토하는 강연을 이어갔다. 협성회 회보를 발간해서 조정의 무능과 탐관오리의 탐욕을 신랄하게 질타하고, 독립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모든 국민이 왕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왕정 체제 아래에서, 수천 년을 지낸 나라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 즉 인간해방을 외치는 이승만의 급진 논조가 조정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을 걱정한 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는 결국 회보 발간을 금지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최초의 한글 신문인 ‘매일신문’을 발간했다. 

한글이 아직 널리 보급되지 않아서, 당시에는 일부 양반계급을 제외하고는 거의 문맹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한글 보급 교육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순 한글로 된 신문을 발간했다.

그 후 ‘제국신문’을 발간해 꾸준히 한글을 보급하면서, 동시에 백성이 개명하도록 교육혁명에 매진했다. 한편,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청년 이승만에게 조선의 개혁과 독립에 대한 열정에 불을 붙였다.

서구가 문명의 꽃을 피우던 때 조선은, 시체와 다름없는 대륙 문명과 성리학의 영향으로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 : 중국 이외의 나라가 중화사상을 모방하는 현상)에 갇혀 있었고, 강대국들이 서로 빼앗으려고 경쟁하는 땅이 되었다.

만민공동회의 총대 위원으로 지도자가 된 이승만은 조선의 운명이 끝나감을 자각하고 더 개혁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근대 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사진은 1910년 6월 19일 프린스턴대 박사학위 수여식 때 이승만 박사.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근대 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사진은 1910년 6월 19일 프린스턴대 박사학위 수여식 때 이승만 박사.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며 신학문에 눈뜨다

그들의 과격한 논조에 놀란 고종은, 결국 만민공동회의 지도자를 체포하고, 이승만은 역모 대역죄인으로 한성 감옥에서 5년 7개월의 수형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고 자각했다.

그는 독립하려면 무지한 백성을 교육으로 개명(開明)해야 한다고 생각해, 자신의 주장을 신문에 기고하고, 편역도 하고, 저술도 하면서,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다. 그가 집필한 명저 ‘독립정신’에서 강대국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조선을 구하려면, 무지하고 우매한 백성을 교육으로 교화 개명시켜, 독립정신을 함양하고, 고취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독립정신 실천 6대 강령 끝부분에서 이승만은,

“지금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 하고, 썩은 데서 싹이 나게 하려고 한다면, 기독교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우리가 기독교를 모든 일의 근원으로 삼아…. 나라를 한마음으로 받들어, 우리나라를 영국과 미국처럼 동등한 수준에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이승만은 멸망 직전에 이른 대한제국이 다시 부흥해,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선진 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받아들여 기독교를 기본으로 하는 국가를 건설함이 마땅하다고 했다. 이때부터 기독교 입국론을 주장했던 이승만은 기독교 입국론과 교육 입국론을 동일선상에서 추구했던 한국 최초의 인물이다.

이승만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옥중학교를 개설해 무지한 죄수들을 가르쳐 개명시켰고, 옥중도서관을 개설해 죄수들에게 독서를 장려했다. 이런 일로 시정의 화제가 되면서, 외국인들도 격려와 함께 서적과 식품을 보내기도 했다. 한편 기독교로 개종한 이승만은 많은 죄수를 기독교로 개종시켜, 최초로 옥중에서 성경 공부와 예배를 드리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들 개종한 죄수들은 후일 조선의 기독교 전도와 독립운동을 통해 국가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이들의 기독교화(化)는 조선의 신분제도를 극복하고, 남녀평등이라는 혁명을 일으켰으며, 후일 YMCA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조선을 개화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승만은 제국신문이나 신학 월보에도 계속 글을 썼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으로, 정열적으로 가르치는 스승으로 본을 보여줬다. 그 결과가 명저 ‘독립정신’의 집필로 나타났다.

1904년 8월 9일, 약 5년 7개월의 모진 수형 생활을 끝내고 한성 감옥에서 출옥한 이승만은 즉시 상동 청년학원 교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1904년 11월호 ‘신학 월보’에 “사람이 사람 노릇 못하는 나라에서, 나라가 나라 노릇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나라가 나라 노릇 하자면, 사람이 먼저 사람 노릇을 하게 되어야겠고, 사람이 먼저 사람 노릇 하자면 가르치고 배우는 데 있으니, 대저 학교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요, 또한 나라를 만드는 곳이라고도 하겠사외다”라는 교육 입국론을 개진했다.

그러나 시세는 그를 조선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하도록 인도했다.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의 참화로 강대국의 대리 전쟁터가 된 조선의 독립을 위한 외교사절로 도미한 이승만은, 대미외교전에서 실패하자, 그는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최초로 조지워싱턴대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하버드대에서 석사학위를 그리고 1910년 6월에는 프린스턴대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귀국한 이승만은 YMCA에서 교육과 전도에 전념했으나, 일본 정부는 1912년 3월 26일, 그를 다시 망명의 길로 내몰았다. 이승만은 1913년 2월 3일 독립운동과 동시에 교포교육에 전념하기 위해 하와이에 정착했다.

그는 여기에서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활동했다. 먼저 교포사회에 독립정신을 심어주고,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학교를 세워 교포 자녀 교육을 하는 한편, 교회를 세워 전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한국교회 핍박’이란 책을 저술하고, ‘태평양 잡지’를 발간해 대내외에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하와이 ‘한인기독청년회’와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했다. 또한, 한인 교포의 한인 기숙학교를 인수해 ‘한인여학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후일 ‘한인기독학원’으로 발전해, 한국 역사상 최초의 남녀공학이 되었다.

이렇게 이승만은 후일 독립 한국의 인재 양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승만은 1919년 3·1 만세운동 직후 세워진 상해임시정부에서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 그해 4월, 제1차 한인 회의에서 ‘건국 종지(Aims and Aspirations of the Koreans)’ 안이 채택되었는데, 그 안에는 교육진흥책이 중요 과제로 포함되었다.

1923년에는, 분주한 독립운동 중에서도 이승만은 ‘한인기독학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모국방문단을 통해 부족한 운영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독립활동을 하던 때도, 소련공산당의 남진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알렸으나, 미국 내에 침투한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사람이 많아 늘 외면받았다.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승리하여, 조선이 해방되자, 귀국한 이승만 박사는 남로당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온갖 행패와 괴롭힘을 겪었으나,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당시 국민의 문맹률은 80%에 육박했다. 보통, 평등, 비밀, 직접, 자유 선거를 통한 국가건설의 어려움을 익히 알고 있었던 이승만 박사는 낙후된 교육 인프라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건국 이전인 1946년 2월 6일, 서울중앙방송을 통해 ‘모범적 독립국을 건설하자’라는 주제로 과도정부 당면과제 33개 항목을 발표하면서, 이 과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국민교육 진흥정책”이라고 역설했다.

그중 제17항에서 “강제 교육령을 발하여 학령에 참여한 남녀 아이는 학교에 안 가지 못 하게 할 것이며, 교육 경비는 정부에서 부담할 것입니다”라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건국헌법 제16조에는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초등 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 모든 교육 기관은 국가의 감독을 받으며, 교육 제도는 법률로 정한다”라고 명시했다. 

당시 국가 전체 예산의 20%를 교육에 투자했다. 이 모든 조치는 이승만 박사가 이미 한성 감옥에서 체득한 교육 입국론을 실천하는 데 있었다. 당시 국민 1인당 GNP는 50달러 정도에 불과했고, 국가 예산의 50%, 수입의 70% 및 외환의 80%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육 투자는 과감하게 시행했다.

이는 국가 발전의 토대가 교육에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1959년에는 문맹률이 20% 정도로 낮아졌으며 학교에 갈 나이의 아동 96%가 취학했다. 일제 시기에 어떤 형태로든 교육받은 사람이 14%에 불과하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점차 중등,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육까지 확대해 나갔다. 초등학교가 2800개에서 4600개로 약 1.6배 증가했으며 중학교는 10배, 고등학교는 3.1배로 증가했다.

대학 진학률 또한 4배 이상 높아져 해방 직후 19개였던 대학이 1960년에는 63개교로 대폭 증가했으며 학생 숫자 역시 8000여 명에서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라 외국 유학도 획기적으로 증가해 해방 전의 500명 수준에서 2만여 명까지 늘어나 교육의 선진화를 이뤘다. 군대 역시 고급인력화와 정예화로 튼튼한 국방력을 갖게 했는데 여기에는 문맹 퇴치 운동도 한 몫을 감당했다.

미국의 군사원조는 한국 교육의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가평고등학교 역시 전쟁기간 중 미군 40사단의 지원으로 만들어졌다./가평고등학교 제공
미국의 군사원조는 한국 교육의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가평고등학교 역시 전쟁기간 중 미군 40사단의 지원으로 만들어졌다./가평고등학교 제공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의 국가 기틀 마련하다

특히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공과대학을 설립하고 국제사회 진출을 위해 외국어 대학을 설립했다. 철강산업을 위한 압연공장 건설사업으로 독일과 외교의 물꼬를 터놓아 후일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에서 차관을 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산업의 뿌리인 전력의 필요성을 예감해 원자력 시대를 열었다. 이를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원자력산업 6위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지금 탈원전 정책으로 인한 원자력산업의 후퇴는 국력의 쇠퇴를 불러올 위험한 정책이다.

이렇게 이승만 대통령 당시 고급인력의 양성이 없었다면 1960년대 산업화와 근대화 즉 한강의 기적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교육열에 힘입어 변방, 약소, 최빈국이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산업화 역군들이 땀 흘려 일하는 동안 해방공간의 남로당 잔당은 물밑에서 세를 불려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왜곡했다. 이는 성공한 대한민국 역사에 대혼란을 일으켜 국가발전에 심대한 저해 요소가 되고 있다. 이와 함께 전교조 교육으로 학원이 좌경화되면서, 심각한 역사 왜곡과 친북으로, 젊은이들의 국가관이 흐려지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사상이 쇠퇴하여, 여간 염려되지 않는다.

신생 대한민국이 걸음마도 하기 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 김일성은 적화통일 야욕으로 남침을 강행했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유엔에 대한 뛰어난 외교술로 국가를 수호했다.

또한, 대학생들의 징집을 연기해, 고급인력을 보전하며, 전쟁으로 초토화된 국가재건에 크게 이바지했고, 1950년에는 대학의 교원과 학생 내부의 공산주의자를 척결하기 위해, 민족주의적 민주주의 즉, 일민주의를 주창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 미군의 인계철선으로, 북한이 침공하면 전방에서 북한의 공격을 가장 먼저 받게 되는 미군이 자위권을 발동하여 북한에 무력 행사를 하게 되므로, 북한의 남침 야욕을 막았으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이 경제도약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 오늘날 국부창출의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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