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이재명의 커넥션, 사노맹·정진상·경기동부연합
[심층분석] 이재명의 커넥션, 사노맹·정진상·경기동부연합
  • 길도형  타임라인 대표
  • 승인 2023.01.10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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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8일 서울중앙지검으로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가면서 정진상 전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정무조정실장은 기자들에게 “군사 독재 정권보다 더한 검찰 독재”라고 일성을 터뜨렸다. 순간,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졌다. 뭐야? 저런 자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끼고 있었다고? 저렇게 생각이 80,90년대에 멈춰 버린 사람이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과 성남시장, 경기도지사, 거대 야당 대표의 최측근이자 장자방 노릇을 해왔다고? 그뿐인가? 정진상 전 실장의 워딩 자체가 이재명 대표를 대신해서 보고받고 결재한 최측근 장자방의 그것이라고 하기에는 심히 수준 이하였다.

그러면 뭘까? 정진상 전 실장에게 무슨 인사이트가 있어 이재명 대표가 끼고 있었던 것일까?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구속될 때도 겉으로나마 평정성을 잃지 않은 것으로 보였던 이재명 대표는 정진상 전 실장 구속이 확실시되는 순간, 뜬금없이 유시민 전 의원 앞에서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이재명 대표를 여기까지 추동(종북 주사파 그룹이 즐겨 쓰는 단어)해온 세력이 어디인지를 돌아봐야 한다. 1968년생 정진상은 부산 경성대 87학번 또는 88학번이다. 그는 학부 재학 중 사노맹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사노맹 지도부는 이정로(실명 백태웅, 서울대 법대 81학번), 박노해(실명 박기평, 시인), 은수미(가명 조명혜, 전 성남시장), 박창호, 김진주(이화여대 83학번, 박노해 부인) 등 서울대 중심의 80년대 초중반 학번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노동계의 급진 관념 좌파들이 결합하고 있었다.

문재인 정부 민정수석과 법무장관을 역임한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사노맹의 주요 인물로서 대학 재학 시절에도 그렇지만 대중 투쟁의 전면에 나서는 것을 꺼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노맹 조직원 활동 중에도 서울대 동기인 백태웅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 등과 직접 지도부 활동을 하지 않고 학술단체 타이틀을 내건 지하조직에서 이론적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사노맹은 자기 조직의 근거지이자 세 확장의 주 타깃을 대학가로 설정했다. 사노맹 등장 초기 그들의 혁명 이론의 기본은 철저히 마르크스-레닌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그 세계관은 국제주의를 표방했고 그런 만큼 민족적 종족적 관념을 토대로 하는 단일 국가체제를 부정하며, 소비에트 중심의 국제주의가 그들의 목표였다. 그런 한편으로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연속혁명론)까지 수용하는 입장을 보이는 등 자신들의 주장과 달리 이론적으로 통일되거나 완성되지 못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주로 서울 구로-가리봉 공단과 안양, 부천, 부평 등 노조 활동이 왕성한 공업단지 중심으로 투신하여 대중주의를 대중추수주의로 배격하는 대신 전술적으로 선도 투쟁을 채택했다. 그러나 그들의 방식은 노동 대중을 포섭하고 교화하는 데 실패할 수 밖에 없었을 뿐 아니라 파업 현장이나 집회 현장에 소수의 과격 분자가 난입해서 ‘재벌 재산 몰수’ ‘토지 무상 분배’ ‘민중위원회 설치’ 등의 슬로건을 외치고 찌라시를 뿌린 뒤 혼란에 빠진 집회장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식이었다. 사노맹의 목표는 그렇게 특공조가 총파업을 유도하고 결정적 시기에 일제히 봉기,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자는 것이었다.

11월 18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법원에 출석하는 정진상. 사노맹 활동과 이재명의 측근으로활동하는 동안 자신의 이력 뿐만 아니라 얼굴까지도 공개를 꺼리거나 철저히 숨겨 왔다. / 연합
11월 18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법원에 출석하는 정진상. 사노맹 활동과 이재명의 측근으로활동하는 동안 자신의 이력 뿐만 아니라 얼굴까지도 공개를 꺼리거나 철저히 숨겨 왔다. / 연합

이재명 변호사, 사노맹의 끈 떨어진 정진상의 손을 잡다

또 한 가지 전술적 목표는 대학가를 해방구,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진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의 소수의 그 특공조가 자기가 재학 중인 대학이나 지역 대학가에 직접 들어가 대학가 집회뿐 아니라 수업 중의 강의실, 모임 중의 서클 문을 열어젖히며 난입, ‘재벌 재산 몰수’ ‘토지 무상 분배’ ‘민중위원회 설치’의 당위가 적힌 찌라시를 뿌리며 주먹을 불끈 쥐고 앙칼질 목소리로 ‘아지’(agitation, 선동)를 하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자기들 나름 단단한 이론과 과학적 선도적 실천력을 겸비한 소수정예의 특공조 의식으로 무장한 사노맹 조직원들은 그런 만큼 운동권 내에서 자신들은 우월 또는 선민의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다른 노선이나 분파들이 보기에는 황당한 관념주의자들이자 무모한 모험주의자들로서 전체 운동권을 말아먹는 불순 과격한 분파주의자들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소위 말해 그런 ‘또라이’들 중에서도 ‘허접’ 상또라이가 사노맹의 언더에서 이론가를 자처한 조국이었다.

‘노동의 새벽’으로 운동권뿐 아니라 시민사회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사노맹의 상징이었던 박노해가 1991년 수배 중 체포되어 1심에서 검찰로부터 사형을 구형받고, 1992년 이정로란 가명을 쓰며 활동한 백태웅이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최종 15년형을 선고받는다. 그 밖에도 박노해의 부인 김진주, 은수미 등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어 재판을 통해 실형을 선고받음으로써 사노맹은 사실상 일망타진되며 와해되기에 이른다.

문제는 소위 ‘빵살이’를 시작한 지도부와 달리 선도 투쟁의 전위 특공대라는 자부심이 강했던 사노맹 조직원들은 지도부가 와해되며 그 존재감마저 유명무실해졌다. 특히 대학의 사노맹 조직원들, 대학을 갓 졸업한 조직원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대척점에 서 있던 NL 주사파 그룹에 급속히 흡수됐다.

그 부류들 중에 정진상이 있었다. 부산 브니엘고를 졸업한 그는 1987년 부산 경성대 행정학과에 입학한다. 대학 입학과 함께 학생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한 그는 3학년 무렵인 1989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출범에 함께하며 사노맹 활동에 본격 참여한다. 하반기에 구성된 새 학기 총학생회의 노동분과위원장을 맡았으며, 1990년경 사노맹 지도부는 학생위원회 위원장으로 경성대 노동분과위원장을 맡았던 정진상을 임명했다. 

조국 전 장관은 2019년 9월 인사청문회 당시 사노맹 관련하여 사상 전향 하였느냐는 질의에 답변하지 않겠다고 맞섰다.
조국 전 장관은 2019년 9월 인사청문회 당시 사노맹 관련하여 사상 전향 하였느냐는 질의에 답변하지 않겠다고 맞섰다.

당시 부산 지역 학생운동의 중심이 부산대였던 만큼 경성대 출신 정진상을 학생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즉 정진상의 사노맹 인연은 간접적인 게 아니라 조직의 핵심 인물로서 이정로(백태웅)와 박노해(박기평), 은수미, 조국 등과 동지적 관계로 엮여 있었던 것이다. 출범과 함께 안기부 등에 의해 수배, 체포령이 떨어진 사노맹은 지도부뿐 아니라 학생 조직원들까지 대부분이 수배된 상태로 그들의 활동 자체가 비합법 비밀 활동일 수 밖에 없었다. 학생위원장을 맡은 정진상 또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령이 떨어졌다. 90년대 초 박노해와 이정로가 차례로 체포되어 중형의 실형을 선고받는 가운데 정진상 또한 1991년경 체포되지만, 안기부와 검찰이 아니라 군 헌병대로 넘겨져 수사를 받고 군검찰에서 보완 수사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 제2군단 보통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기를 두고 92~94,95년 사이 군복무를 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으나 당시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노맹 관련 인원의 재판, 그것도 군사재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또한 정진상이 군사재판을 받았다는 것은 민간인 신분이 아닌 현역 복무 중이었거나 징집 영장이 나온 상태에서 수배 중 군 수사기관에 체포되었을 가능성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자 남한산성 군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을 가능성 또한 확인해 봐야 한다. 사노맹 조직원 정진상은 1996년 ‘이재명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며 장차 이재명과 조국, 이재명과 은수미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1995년 정진상은 전남 고흥군 나로도 출신 김인섭의 소개로 이재명을 소개받는다. 김인섭은 정동영 전 민주당 의원과 절친한 인물로 알려졌다. 나로도 출신 김인섭은 성남에서 나로도 횟집을 운영하며 호남계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후원한 만큼 정동영 전 의원과의 인연 또한 자연스러웠다. 이재명 변호사가 정동영 후보 선거운동을 도우며 정치권에 안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진상의 호가호위, 별정직 6급 실장을 두려워한 성남시 공무원들

김인섭의 소개로 이재명과 인연이 맺어진 정진상은 1995년 창립한 ‘성남시민모임’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며 역시 모임의 회원인 이재명 변호사와 더 가까워졌다. 이후 이재명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며 사무장까지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창립 10년 만에 성남시민모임은 ‘성남참여자치시민연대’로 명칭을 바꾸고 자발적 시민모임의 정치적 성격이 강화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정진상은 성남의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에도 적극 활동하며 친노 그룹의 핵심 유시민과도 함께 활동하게 된다. ‘참여민주주의와 생활정치연대(참정연)’ 활동을 일정 기간 같이했으나, 2003년 11월 정진상은 참정연 조직위원장 자격으로 낸 성명을 통해서 “유시민 의원 등 신당 올인파의 독선적이고 일방적 행태에 날개를 달아준 결과 개혁국민정당(개혁당)의 순수한 정치 실험만 팽 당하는 꼴이 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진상은 결국 신당에 올인을 선언하며 ‘개혁국민정당(개혁당)’을 내세워 독자 노선을 고집한 유시민의 행보에 반발하며 2003년 8월 개혁당과 갈라섰다. 친노 그룹이 분화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개혁당은 유시민, 문성근 등 친노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2002년 설립한 정당으로, 한 마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키기 위한 정치 결사체였다. 참정연, 즉 참여민주주의와 생활정치연대는 이러한 개혁당 소속 인물들이 모여 만든 전국 단위 모임이다. 정진상을 비롯한 성남 지역 인물이 핵심 멤버였고, 정진상은 영입 등의 역할을 맡았다. 정진상을 비롯한 참정연의 핵심 멤버들은 줄곧 개혁당은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본연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혁당과 갈라선 정진상은 2005년부터 2006년까지 오마이뉴스와 성남투데이 시민기자로 활동했다. 당시 정진상이 쓴 기사는 주로 성남 지역의 현안 문제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생활정치와 관련된 것이었다. 특히 이재명 변호사의 활동을 담은 기사들은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며 정진상을 사무장으로 데리고 있던 이재명이 본인의 블로그에 공유하며 홍보에 활용했다. 

2000년대 말 이재명 변호사가 민주당 경기 성남 분당갑지역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을 때 이재명은 정진상을 간사로 임명했고, 2010년 이재명이 성남시장에 당선되자 성남시 총무과 정책실장(별정직 6급)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정진상은 지역의 이름 없는 활동가이자 무명의 시민기자였다.

정진상이 정치권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재명이 성남시장에 당선되면서부터다. 그런데 묘한 일이 일어났다. 그래 봐야 별정직 총무과 6급 공무원일 뿐인 정진상이 성남시 공무원들의 상전으로 군림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정진상의 방자함은 이재명의 모든 것을 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무원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0여 년에 걸친 지역 시민운동을 통해 성남에서 인지도를 쌓은 이재명은 2006년 열린우리당 후보로 성남시장에 출마했다 낙선했고 2008년 총선에서 분당갑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했다 또 한 번의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두 번의 실패는 이재명으로서는 커다란 자산의 축적이었다. 그러는 동안 지역의 시민운동을 주도해오거나 상징적 위치에 있던 인물들과 동지적 유대를 쌓았다. 성남의 조직폭력배들을 변호해 주기도 했다.

사노맹은 1991년 박노해가 체포되고 1992년 리더인 이정로 등 핵심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하부 조직원들까지 거의 대부분 체포되며 와해 상태에 이른다. 특히 운전 중의 박노해를 안기부 요원이 체포할 당시 박노해는 행인들에게 ‘언론에 자신의체포를 알려달라’ 소리쳤고, 1심 재판에서 검사가사형을 구형하자 “영광입니다”라는 말로 허세를부렸다. 박노해가 노동자로서 현장 노동자들의 시편과 일기 등을 가필하고 자신의 시와 묶어 펴낸‘노동의 새벽’ 은 당시 100만 부 이상이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사노맹은 1991년 박노해가 체포되고 1992년 리더인 이정로 등 핵심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하부 조직원들까지 거의 대부분 체포되며 와해 상태에 이른다. 특히 운전 중의 박노해를 안기부 요원이 체포할 당시 박노해는 행인들에게 ‘언론에 자신의체포를 알려달라’ 소리쳤고, 1심 재판에서 검사가사형을 구형하자 “영광입니다”라는 말로 허세를부렸다. 박노해가 노동자로서 현장 노동자들의 시편과 일기 등을 가필하고 자신의 시와 묶어 펴낸‘노동의 새벽’ 은 당시 100만 부 이상이 팔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유시민의 개혁당 세력과 결별하고 경기동부연합의 손을 잡다

이재명은 2010년 마침내 민선 5기 성남시장에 당선된다. 이때 성남 시민운동단체들의 연합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시민운동단체 연합은 2012년 총선에서 ‘성남원탁회의’로 재등장한다. 이재명을 성남시장 후보로 올렸지만 열린우리당의 힘만으로는 당선이 결코 녹록지 않았다. 어떻든 좌익 운동권 세력이 성남시장을 가져와야 한다는 공감대 속에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후보단일화를 적극 추진했다. 

결국 야권의 세가 확실한 열린우리당 후보를 내세우고 여타 좌익 진보 정당들이 양보 협력하는 방식으로 결론을 도출했다. 열린우리당의 최대 걸림돌인 당시 민주노동당의 양보와 협력이 절대적이었다. 그 대신 민주노동당 김미희 후보가 양보하는 대신 선대본부장과 시장인수위원장을 맡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정진상이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유시민의 개혁당과 결별 후 기회만 있으면 유시민의 독단과 독선을 비난해온 정진상은 성남 참정연 활동과 성남투데이 시민기자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경기동부연합 주요 인물들을 알게 되고 동지적 관계로까지 발전한다. 그런 관계를 토대로 이석기 등 경기동부연합 핵심뿐 아니라 이재학, 박석운, 김상근 등 지역의 좌익 인사들까지 이재명을 지지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사노맹의 핵심 조직원으로서 경기동부연합 멤버들과 운동의 결이 완전히 달랐던 정진상이 종북 주사파의 입장을 수용했으며 그들과 동지적으로 연결되었음을 뜻했다. 이런 입장 변화는 사노맹이 완전히 와해, 해체된 이후로 그 존재감 자체가 없어진 데 원인이 큰 것으로 보인다. 사회운동이라는 것도 결국은 조직이 살아 있어야 그 정체성도 지속해 갈 수 있다는 원칙론으로 봤을 때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재명은 그렇게 정진상을 매개로 해서 사노맹과 관계 맺어진 데 이어 이석기의 경기동부연합과도 조직적, 이념적으로 결합됐다. 이재명은 재선 시장 8년 동안 성남시청과 그 산하 기관들을 좌파들의 학습장이자 돈벌이 공간으로 만들었다. 좌파 성향의 인문학자, 정치인, 사회운동가, 연예인들이 성남에 와서 강의와 강연을 했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와 김제동 씨도 주요 강사진이었다.

그 중에는 조국도 있었다. 종북 주사파 경기동부연합과 껄끄러운 관계일 것으로 여겨진 조국이 성남시 산하 문화센터 등에서 마련한 강좌와 토크쇼에 단골 강사 또는 강연자로 초빙됐다. 사노맹 동지 정진상의 역할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정진상은 재선 시장 이재명이 도지사 출마를 선언하고 차기 시장을 간택할 때 한 번 더 결정적 역할을 한다. 더불어민주당은 그들대로, 통진당 해산의 아픔을 겪은 경기동부연합 세력은 또 그들대로 다음 시장이 자기들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기동부연합은 이번에도 세에서 밀리며 대통령비서실 여성가족비서관 은수미에게 시장 후보를 양보해야 했다. 

부친이 해병대 중령 출신인 은수미는 당시까지만 해도 성남과 아무 인연이 없었다. 그러나 공천 과정에서 낙하산으로 성남에 낙점됐는데 이재명 시장의 강력한 추천이 결정적이었고, 막후에는 사노맹 동지 정진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물론 성남 시민단체 및 경기동부연합과의 조율에도 정진상이 적극 나섰다는 후문이다.

정진상, 옛 동지를 적극 활용했다

이렇게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한 사노맹과 유일 수령론을 표방한 종북 주사파의 맹주 이석기의 경기동부연합은 이재명과 정진상을 고리로 정치적 이익을 공유했다. 한 마디로 이익과 권력 앞에 잡탕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이석기의 경기동부연합은 자기 정체성을 지켜내며 정치적으로 최대 위기에 처한 이재명의 마지막 생명선 역할을 할지 여부가 주목된다.

결국 사노맹 핵심 조직원 정진상은 이재명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시장부터 도지사를 거쳐 대통령 후보로까지 옹립하는 데 있어 옛 동지들을 적극 활용했고, 결정적 순간 배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석기의 경기동부연합은 연합에 적극적이고 이재명과 연대해서 투쟁했지만 주체혁명노선의 지도이념을 우선하며 불가근 불가원의 원칙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켜갈 것으로 보인다. 2012년 통진당 해산 사태도 그들로서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이재명은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실형을 살 때 살더라도 최측근 장자방 정진상과 김현지, 전략적 제휴와 이념의 동지 이석기와 김미희, 나아가 민주노총 지도부와의 관계와 그렇게 해서 실현하려고 했던 세상이 무엇이었는지 고백해야 한다.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진학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를 거쳐 시장과 도지사, 대통령 후보에 이어 당대표까지 한, 소년공 출신으로서 대한민국이 제공한 최고의 은혜를 입었기에 그런 의무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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