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베트남전 참전용사들 “민간인 학살 있을 수 없었다”
[이슈] 베트남전 참전용사들 “민간인 학살 있을 수 없었다”
  • 전경웅  미래한국 객원기자
  • 승인 2023.03.23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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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7일 서울중앙지법은 “베트남전에서 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주장을 인정,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어 같은 달 23일 강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베트남 학살 민간인 피해보상에 관한 특별법’을 25명의 다른 의원들과 함께 발의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베트남전 참전용사의 목소리는 빠졌다. 지난 2월 16일 만난 이화종 월남전참전자회 회장은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 또한 참전용사들의 목소리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불공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제 제기 시작은 ‘한겨레21’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것이 언론에 나온 것은 1999년 5월 ‘한겨레21’을 통해서다. 당시 한겨레21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절에 쳐들어가 스님들을 성폭행·학살했다. 농촌 마을에 가서는 사람들을 끌어내 한 곳에 모아놓고 무차별 학살했다. 이때 폭격기를 동원해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독가스를 살포하기도 했다”는 내용을 실었다. 나중에는 학살한 민간인 시신 수백여 구를 매장한 곳을 불도저로 밀어버렸다는 주장도 했다.

이 주장은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의 반박을 받았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은 미군의 지휘를 받지 않고 주월사령부(사령관 채명신 중장)가 독자적으로 지휘했다. 작전 구역도 미군이나 호주군 등과 달리 남베트남에 국한했다. 파병 초기 한국군의 장비는 매우 빈약했다. 소총도 M1을 썼고, 기갑장비 등은 아예 없었다. 만약 공중화력지원을 받으려면 미군에 100% 의존해야 했다. 이 때문에 작전을 할 때마다 화력지원을 위한 미군 연락병도 함께 나갔다. 즉 한겨레21의 주장과 달리 당시 한국군에는 폭격기도, 화학무기도 없었다. 불도저와 같은 중장비도 없었다. 

이런 ‘사실’로 반박을 당했지만 한겨레21과 그에 동조하는 좌파 진영은 주장을 꺾지 않았다. 결국 아마추어 역사가들과 군사 마니아들이 거듭 반박했고 이 주장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2018년 4월 좌파 진영은 이 문제를 다시 끄집어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을 주장해 온 사람들이 만든 ‘한국-베트남 평화재단(이하 한베재단)’은 2018년 4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하 민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과 함께 ‘시민평화법정’을 열었다. 세 단체는 시민법정을 열기 위해 2017년 11월부터 준비했다고 한다. 시민법정은 철저히 ‘학살’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소위 ‘한국군 학살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베트남인들이 나왔고, “한국 해병이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주제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었다. 베트남전 상황이 어땠는지 하는 사실 설명이나 참전용사나 한국군, 당시 정부 관계자의 목소리는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시민법정 이후 민변은 익명으로 등장했던 베트남인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할 경우 법률대리인을 맡겠다고 밝히고 ‘베트남 TF’까지 구성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20년 4월 민변은 ‘한국군 학살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응우옌티탄 씨의 법률대리인을 맡아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을 개시했다. 

민변 베트남 TF는 먼저 1969년 11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당시 ‘베트남 민간인 학살’ 용의자로 몰린 청룡부대 1대대 1중대 소대장 3명을 조사했다면서 해당 기록을 공개하라고 법원에 청구했다. 대법원은 2021년 3월 민변 측 요구를 받아들여 국정원에 기록을 공개하라고 명령했다.

2020년 5월 국정원은 “해당 사건 기록은 이미 원고인 응우옌 티탄의 소송 대리인에게 제공했다”며 “추가사항은 공공기관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 처리함이 타당하다고 사료돼 송부해드릴 수 없음을 양해해 달라”며 기록 완전 공개를 거부했다. 한계에 부딪힌 민변 베트남 TF는 이후 좌파단체들과 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여론을 조성하는 데 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노력의 결과 중 하나가 지난해 8월 KBS가 방영한 다큐멘터리다. KBS는 이때 ‘시사멘터리 추적’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일방적인 주장을 보도했다. ‘베트남전 학살’ 재판이 한창 진행 중일 때였다. 

베트콩 게릴라를 생포한 파월 국군 / 자료 사진
베트콩 게릴라를 생포한 파월 국군 / 자료 사진

KBS “베트남전 당시 국군이 민간인 학살” 주장 일방적으로 방송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은 분노했다. 월남전참전자회, 고엽제전우회 등은 KBS 앞에서 대규모 항의 집회를 가졌다. 국가보훈처도 KBS의 공식사과와 반론보도를 촉구했다. 하지만 KBS는 사과는 커녕 참전용사 측과의 대화에도 응하지 않았다. 결국 9월 5일 박민식 보훈처장이 KBS에 공식사과와 함께 반론보도를 요구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박 보훈처장은 “참전용사들은 학살자가 아닙니다”라는 글을 통해 “KBS가 한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월남전 참전용사 모두를 학살자인 양 매도하는 편파적인 방송을 했다”고 비판했다.

박 처장 부친은 1972년 월남에서 전사한 고(故) 박유근 중령이다. 자신이 월남전 참전용사의 아들임을 밝힌 박 처장은 KBS를 향해 “아버지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늘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돌아가신, 저의 영웅이셨다”면서 “제가 학살자의 아들이 아니라 참전영웅의 아들이듯, 대한민국 32만5000명의 젊은 장병들도 국가의 부름에 한 번뿐인 청춘을 바친 영웅들임을 잊지 마시라”고 강조했다. 

보훈처장까지 나섰음에도 KBS는 사과와 반론보도를 거부했다. 당시 KBS 측은 “관련 재판 1심 선고가 올해 안에 내려질 예정”이라며 “1심 선고가 나오면 그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과 참전자회 입장을 담아 후속편을 제작할 예정”이라면서 사과를 거부했다. 

한편 좌파 진영은 KBS와 별개로 “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여론 조성에 열심이었다. KBS 사건에 앞서 2021년 6월 말에는 서울시교육청이 중·고교에 배포한 교사용 참고서가 논란이 됐다. 
소위 ‘평화교육책자’라는 명분 아래 배포한 ‘동아시아, 평화로 다시 읽다’라는 책자는 2017년 8월부터 준비한 것이었다. 모두 5개 장(章)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중에서 제5장 ‘한국사의 거울, 아직 끝나지 않은 기억의 전쟁, 베트남 전쟁’을 보면,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민간인을 무참하게 학살했다고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이유를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깎아내렸다. 이를 본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우파진영의 비판이 거세지자 서울시교육청은 같은 해 8월 책자를 새로 배포했다. 5장을 아예 빼버렸다. 

베트남전 참전용사들, 허위사실 유포에 분노 

이화종 월남전참전자회 회장은 1971년 베트남에 파병돼 퐁니·퐁넛 마을 일대에서 3개월간 교전한 경험이 있었다. 이화종 회장은 인터뷰에서 “당시 작전 절차로는 ‘민간인 학살’이 불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우리 군은 대민 선무작전→포격→적진 투입 순으로 작전을 실시했다. 특히 적 점령지에서 작전을 할 때는 1주일 전부터 해당 지역에 ‘○월 ○일 ○시 이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지니 민간인은 대피하라’는 전단을 살포하는 등 민간인 피해가 생기지 않게 노력했다. 그 다음 여단 또는 사단 사령부에 작전을 펼칠 지점을 알려 병력 진입 전 포격을 실시했다.

병력을 투입할 때도 우리 군 단독이 아니었다. 미 해병대 소속 ‘앵그리코(ANGLICO·Air Naval Gunfire Liaison Company, 해군공중지원연락중대)’ 요원과 남베트남 정규군이 동행했다. 앵그리코는 적과 조우 시 신속한 화력지원을 위해, 남베트남 정규군은 지형지물을 고려한 경로 안내와 함께 교전 시 민간인 피해를 막기 위해서 동행했다. 이들은 교전과 같은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자기 부대에 실시간으로 보고했다. 이들이 즉각 보고를 하는데 한국군이 혼자서 어떻게 적진에서 움직이고 민간인을 학살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즉 작전 절차를 봐도 그렇고 작전 때 동행한 미 해병대, 남베트남 정규군이 민간인 학살을 그냥 보고 있지 않는다는 게 이 회장의 설명이었다. 이 회장은 “실제로 작전을 나갔을 때 가축 한 마리만 죽어도 주민이 난리를 치고, 거기에 덩달아 남베트남군도 즉각 피해 보상을 권유했다”면서 “한번은 야간 매복을 위해 대나무를 잘라서 위장했다가 이튿날 대나뭇값으로 쌀 한 가마니를 물어준 적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당시 현지 분위기에서 ‘학살’이 발생했다면 남베트남 정부가 가만히 있었겠느냐”고 그는 반문했다.

또한 그에 따르면 문제가 된 퐁니·퐁넛 마을과 그 일대는 넓은 개활지다. 우리나라 시골과 다르게 민가가 수백 미터마다 한두 채씩 띄엄띄엄 있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런 지역에서 좌파 주장대로 학살하려고 70~80명의 주민을 모으려고 했다면 중대 병력으로는 하루 만에 불가능하다. 수백 명을 동원해도 몇 시간 넘게 걸렸을 것”이라고 이 회장은 설명했다. 게다가 한국군 작전은 당시 중대급 단위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 회장을 비롯해 고엽제 피해자 등 참전용사들이 입을 모으는 대목은 “베트남전 당시 우리 군의 기강이 엄정했다”는 점이다. 당시 우리 군은 채명신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베트남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 채명신 장군은 당시 “100명의 베트콩(남베트남 인민해방전선·NFL)을 놓치더라도 1명의 민간인 사상자는 만들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화종 회장은 “저를 비롯한 32만여 명의 월남전 참전자가 50년 넘게 지난 지금도 그 명령을 기억한다”고 했다.

예전 사이공 시에 있었던 주월한국군사령부 모습. 한국은 월남전에 약 32만 명의 병력을 파병했으며5000명이 전사했다. / 군사편찬위원회
예전 사이공 시에 있었던 주월한국군사령부 모습. 한국은 월남전에 약 32만 명의 병력을 파병했으며5000명이 전사했다. / 군사편찬위원회

참전용사들의 증언 “대부분 베트콩 소행이었다”

실제로 베트남전 당시 우리 장병이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면 군법으로 엄중하게 처리했다. 1968년 4월 비둘기 부대 소속 소대장 한 명이 매복 작전 중 베트남 민간인을 베트콩으로 오인해 사살했다. 그는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이 외에 현지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다 군법으로 처리된 한국군 장병은 40명이 넘었다. 하지만 좌파가 주장하는 ‘학살’을 저질러 처벌받은 장병은 없었다.

재미있게도 베트남전에서 우리 군이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한겨레와 좌파 진영의 근거는 대부분 “누구에게 들었다”는 소문이나 베트남전 때 어린아이였다는 현재 공산당원의 주장, 베트남 공산당이 만든 선전물이다.

참전용사들은 재판의 대상이 된 1968년 2월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 당시 남베트남 정부가 발칵 뒤집혔다고 회고했다. “베트남 사람들이 불같은 성격인데 이 사건을 접하자 굉장히 화를 냈고, 즉각 꽝남성 행정기관과 군 수사기관을 동원해 조사했다”면서 “하지만 조사 결과 한국군의 학살이라고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이들은 설명했다.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은 대부분 베트콩(NLF·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저질렀거나 남베트남 특수부대의 소행”이라고 반박했다. “특히 베트콩은 한국군과 현지 주민을 이간질하려는 심리전 차원에서 한국군으로 위장해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일이 잦았다”고 이들은 강조했다. 베트콩이 현지 주민과 한국군 사이를 분열시키고 서로 적개심을 품게 하려고 베트콩이 한국군 군복을 입고선 민간인들을 공격하거나 학살했다는 것이다.

참전용사들은 “민간인을 살해한 사람을 잡았는데 한국군 위장복을 입었지만, 실은 베트남 사람이었다”면서 “그들은 한국군 군복을 입고 자기 동족을 무차별 살해했다”고 기억했다. 이들은 한 자료를 보여주며 “이게 당시 전투 상보인데 퐁니·퐁넛 사건 나흘 전에 한국군 복장을 한 베트콩들을 발견했다는 대목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곳에서는 부대 마크도 군복 무늬도 틀린데 한국군이 범인이라는 경우도 있었다. 

이 말은 ‘맹호부대’ 관련 사건과 흡사하다. 베트남전 당시 빈딘성 고자이 마을에서 맹호부대가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베트남 공산당이 조성한 추모시설을 보면, 학살자는 오른쪽 팔에 오각별 중앙에 표범이 울부짖는 부대 마크를 달고 있다. 당시 남베트남군 특수부대 ‘레인저’가 입던 군복이었다. 반면 맹호부대를 비롯한 우리 군은 부대 마크를 왼쪽 팔 부분에 달고 철모에는 부대 마크를 새기지 않았다.

참전용사 목소리 외면한 더불어민주당, 특별법 발의

남베트남 레인저의 행동에도 오해를 살 부분이 있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베트콩에 대해 극도의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베트콩으로 의심되면 무조건 죽이는 일이 많았다. 다만 이들은 고온다습한 곳에서 시신 부패를 늦추기 위해 내장을 모두 제거하고 시신을 보관하는 베트남 풍습을 따랐다. 이런 이유로 시신의 내장을 빼낸 것을 한국군이나 미군 등이 보고 ‘오해’를 했다는 지적도 최근 나온다.

이화종 회장은 베트콩과의 싸움이 매우 힘들었다고 기억했다. “겉으로 보면 민간인인데 총을 쏘아야 베트콩으로 인정하니 현실적으로 피아 식별이 매우 어려웠다”고 그는 설명했다. 특히 어린 여성이 베트남 전통 복장을 입고 겨드랑이 속에 자동소총을 숨기거나 꽝 가인(Quang Ganh·베트남 전통 지게) 속에 수류탄을 숨기고 접근하면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참전용사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좌파 진영과 언론만이 아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여기서 더 나아가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 특별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지난 2월 23일 강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 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을 대표 발의했다. 여기에는 민주당과 정의당을 비롯해 기본소득당, 무소속 등 의원 25명이 동참했다.

법안은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발생한 현지 민간인에 대한 폭력·학살·시신훼손 등을 조사해 진실을 규명함으로써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강민정 의원은 법안 발의 후 기자회견에서 “역사를 왜곡하는 군국주의 일본과는 다른 수준의 나라가 돼야 하지 않겠나”라며 “베트남전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강 의원을 비롯해 특별법을 발의한 의원들은 그러나 베트남 정부가 1993년 이래 지금까지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조사와 사과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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