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여순 반란사건과 제주 4·3사건은 일란성 쌍둥이
[심층분석] 여순 반란사건과 제주 4·3사건은 일란성 쌍둥이
  • 길도형  타임라인 대표
  • 승인 2023.04.17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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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희생자추념일을 넘기는 2023년의 한국 사회는 예년에 비해 훨씬 더 격렬한 이념 대결의 현주소를 여실하게 드러냈다. 야권은 윤석열 대통령이 추념식에 불참했다는 이유를 들어 4·3 희생자와 유족들을 폄하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비난은 야권과 좌파 시민사회단체들에만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은 4·3사건의 본질을 벗어난 양민 희생을 성역화하는 행태가 점입가경이다.

“제4·3폭동이 북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고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이 발언했다.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대통령이 보통 3·1절과 광복절 정도는 참석하는데, 4·3 기념일은 이보다 조금 격이 낮은 기념일 내지는 추모일”이라며 “무조건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은 것을 공격해대는 자세는 맞지 않다고 본다”고 했다. 이어 “과거에도 4·3 기념일에 대통령이 관례적으로 무조건 참석했던 것이 아닌데, 이번에 4·3 유족을 폄훼한 것처럼 야당에서 일제히 공격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더 나아가 마치 대통령이 불참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현대사의 비극인 4·3 기념일을 맞아 대여 비난의 빌미로 삼는 것 아닌가”라며 “오로지 정쟁으로 정파적 이익을 얻는 수단으로 이 기념일을 활용하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조금 격이 낮은 기념일 내지는 추모일’이라는 부분만 똑 떼서 4·3 유족과 제주도민들을 모독한 발언이라며 ”최고위원에 걸맞은 격을 갖추기 바란다“(김웅 국민의힘 의원)는 말로 훈계했다.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의 주동자 김지회는 함흥농고 출신의 엘리트였다. 그의 연락책은 제주 남로당원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의 주동자 김지회는 함흥농고 출신의 엘리트였다. 그의 연락책은 제주 남로당원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제주 4·3사건 관련 태영호의 김일성 발언은 팩트다

홍준표 대구시장도 김재원 최고위원 비난 대열에서 빠지지 않았다. 홍준표 시장은 4월 4일 페이스북을 통해 ‘제주 4·3은 국경일보다 격이 낮은 추모일이라서 대통령이 참석 안 해도 된다? 그러면 서해수호의 날은 추모일 아니었나? 서문시장 100주년 행사도 국경일이 아니다’는 식으로 김재원 최고위원 발언의 본질을 벗어난 반박을 했다. 

홍준표 시장은 ”정작 비극의 시작은 난을 피해 한라산 중산간에 숨어 있던 제주도 양민들을 남로당 폭도들과 한패로 간주하고, 그해 7월경부터 무참히 학살하기 시작하여 제주도민 수만 명을 계엄군이 학살하였다는 것입니다“며 제주도민 수만 명을 계엄군이 학살했다고 기정사실화했다. 이것은 당시 제주도 4·3사건 상황에 대한 인식의 오류를 바탕으로 한 주장이자 좌익들의 일방적 주장을 그대로 되뇌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좌익과 제주도의 4·3 관련 단체들은 4·3사건이 3·1절 기념식 행사와 이어진 행진을 경찰이 저지하면서 물리적 폭력이 발생함으로써 비롯했다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엄연한 것은 그 3·1절 행사를 좌익들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좌익 세력이 주도한 행사는 독립운동과 광복 기념이라는 본질을 벗어나 있었다. 3·1절 기념 행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 방해 저지 투쟁을 위한 선전선동의 장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제주 4·3사건의 촉발에 대해 나무위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1948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 남로당,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주주의청년동맹, 부녀동맹, 인민위원회에서 동원한 17,000명의 군중과 기타군중 8,000명 등 총 3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3.1절 기념식을 열었다. 

제주 4·3사건 주동자 김달삼은 1948년 8월 월북하여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및 주석단에 선출되어북한의 인민공화국 창건에 참여하였고,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
제주 4·3사건 주동자 김달삼은 1948년 8월 월북하여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및 주석단에 선출되어 북한의 인민공화국 창건에 참여하였고,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

제주 경찰 330명과 육지에서 파견된 응원 경찰 100명 등 430명의 경찰 병력이 주변 경비 활동을 하고 있었고, 기념식을 마친 3만여 군중은 가두 시위에 들어갔는데, 이때에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여 작은 소란이 발생하였다. 기마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몰랐는지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3만여 군중들이 ”애를 치어놓고 사과도 없이 어디 가는 거냐“며 몰려들어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고,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하는 바람에 6명이 사망하고 6~8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미군정 당국은 이를 경찰의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사건을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지어 3·1절 기념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김달삼은 남로당 제주도당책에 임명되었고 본격적인 지휘부를 구성하여 군사부장까지 겸임하였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여 명의 남로당 무장대가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를 공격했다. 이것은 경찰관과 서북청년단,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 우익 단체 요인들의 집도 습격하였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가 예정하면서 당의 존립이 위협받게 된 상황에서 남로당 중앙당과는 아무런 협의도 없이, 김달삼 등이 독단적으로 감행한 무장폭동이자 제주 4·3 사건의 시작이었다.>
 - 나무위키

인용한 나무위키뿐 아니라 대부분의 백과사전과 주류 학계 관련 논문들이 제주 4·3이 남로당계 좌익들의 준동으로 시작된 무장폭동으로 규정한다.

2월 13일 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 후보는 제주4·3평화공원에서 ”제주 4·3은 명백히 북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제주의 좌익 시민단체와 유족 단체들이 일제히 태영호 의원을 공격하며 사퇴를 요구했다.

제주 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여 일으킨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었다. 따라서 정확히는 ‘제주 4·3폭동’으로 명명해야 한다. 5·10 총선거를 통해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건국을 선포할 예정인 남한 지역에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남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공산 폭동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남로당 수괴 박헌영의 지시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졌으나 결국은 태영호 최고위원의 발언대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한 것이다.

해방 직후 한반도는 공산당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남한은 조선공산당(이후 남조선노동당)의 박헌영, 북한은 북조선공산당(이후 북조선노동당)의 김일성 영향력 하에 놓였다. 그러나 남한의 박헌영은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1946년 9월 북한으로 탈출하여 김일성에게 의탁하는 처지가 된다. 그때부터 박헌영은 김일성의 ‘식객’ 노릇을 하며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을 조종한다. 당연히 여기부터 박헌영에게 김일성의 입김이 작용하는 것은 당연했다.

1948년 9월에는 북한 정권이 수립되었다. 김일성은 수상, 박헌영은 부수상 겸 외무상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49년 6월에는 남북한 공산주의자들이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이 창당되었다. 여기에서도 김일성은 당위원장, 박헌영은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정치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박헌영은 월북하는 1946년부터 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김일성의 휘하에 있는 신세였다. 당연히 김일성의 지시를 받는 처지였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그런 박헌영의 지령에 따라 움직였고 박헌영의 지시는 곧 김일성의 지령이었던 것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해방과 대한민국의 건국 전후 남한의 혼란에는 늘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 물론 그 최종적 배후는 소련의 스탈린이 있었고 스탈린의 지시를 받아 김일성을 움직인 스티코프가 있었다. 

1946년 대구 10월폭동은 소련 - 조선공산당 박헌영으로 이어지는 체계가 있었지만 김일성이 1인자로 나서는 1948년부터는 박헌영은 항상 2인자였다. 그래서 그때부터 남한 지역의 공산 폭동에는 소련 - 조선노동당 김일성 - 2인자 박헌영으로 이어지는 서열에 따라 북한의 지령이 남한에 작용하는 것은 당연했다.

태영호 최고위원은 북한 엘리트 외교관 출신으로 제주 4·3사건과 김일성의 직접 연관성에 대해 누구보다 확실한 정보를 쥐고 있는 사람이다. “제주 4·3사건은 김일성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태영호 의원의 발언은 그 자체로 팩트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민주당을 향해 “자신들의 정치적 반사이익을 위해 기념일을 악용하고 있다”며 “그런 면에서 저는 국민들에게도 좋지 않은 그런 인상을 심어 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고 한 김재원 최고위원의 발언도 정당성을 갖는다.

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말한“ 제주 4·3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결정으로 일어났다”고 말했다‘. 북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는 것은 분명한 팩트다.
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말한“ 제주 4·3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결정으로 일어났다”고 말했다‘. 북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는 것은 분명한 팩트다.

당시 제주도민 대다수는 이승만 편이었나, 아니면 김일성 편이었나

스탈린⇒스티코프⇒김일성⇒박헌영으로 이어지는 지령 체계는 제주도 태생이자 남로당 제주도당책과 군사부장을 겸하고 있던 김달삼에게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총선거 방해 및 저지 투쟁에 나서라’고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렇게 김달삼이 주도한 제주도 4·3사건이 성공하거나 최소 수개월 내란 상황으로 이어졌으면 5·10 총선거 자체가 없었고, 그에 따라 제헌국회도 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헌국회를 구성 못 했으면 당연히 대한민국 헌법도 없고 8·15 정부 수립 및 건국도 없었다.

김달삼은 북조선노동당 지령을 받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및 건국을 방해하기 위해 제주도를 점거했고 그의 고향 사람들인 제주도민 다수가 지원하는 가운데 내란을 촉발시켰다. 양민 학살? 솔직히 말하자.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당시 제주도민 대다수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이승만 편이었나, 김일성 편이었나?

제주도에서의 양민의 직접 역시 이번 추념일에도 4·3사건의 본질인 5·10 총선거 방해와 무산을 위한,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 폭동은 철저히 외면됐다. 사실 제주 4·3사건은 제주도 공무원과 경찰 그리고 그 가족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도민이 남로당과 직간접 연계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내전이었다. 당시 제주도 인구는 27만1379명으로 통계되어 있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과 좌익 시민단체, 그리고 국민의힘 소속 홍준표 시장과 김웅 의원 등이 주장하는 ‘양민 학살’은 내전적 상황에서 불가피했다. 더욱이 무장 폭동을 주도한 김달삼이 제주도가 군경에 의해 포위된 상태에서 3개월 좀 넘은 시점에서 섬을 탈출하여 북한으로 도주하고, 그런 상태에서도 내전은 7년여 동안 지속된다. 이러한 상황은 해당 지역 토착 원주민들의 절대적 지원과 비호 없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런 제주도 토착 원주민들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 제주도 대정 출신 김달삼이 있다. 1923년 출생한 김달삼은 일제시대 제주도가 낳은 천재이자 촉망받는 엘리트로 성장한다. 당시로서는 큰 키라고 할 수 있는 170cm의 키와 핸섬한 얼굴, 지적인 용모는 당시 전형적인 공산주의자의 표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전통 사회의 대표적 특성 가운데 하나가 그 고장의 인재에 대한 큰 관심과 전폭적인 성원이었다. 일본 주오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김달삼은 일본제국 육군 복지산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제국군 소위로 임관한다. 그리고 해방 후 월북하여 강동정치학원을 수료했다.

김달삼은 제주도에서 그렇게 촉망과 성원을 받는 인재로 성장했으나 결국 공산주의자의 길로 들어서 해방 후 남로당의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고향인 제주도와 제주도민을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는 내전의 동조자 또는 부역자로 몰아세운 것이다.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까지 모두를 놓고 봤을 때 제주의 비극은 스탈린과 김일성, 박헌영의 지령을 받고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기 위해 내전을 촉발시킨 제주의 아들 김달삼과 남로당 제주도당을 쳐내지 못한 것이 제1 원인이다.

당시 막 창설된 국방경비대는 각 도별로 1개 연대급이 주둔하고 있었다. 미군정이 아니면 당시 군대 수준으로는 어지간한 도시 폭동조차 진압하기 버거운 상태였다. 제주의 무장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영호남 도 단위에 주둔한 연대들에서 1~2개 대대를 빼내 제주도로 보내도 상황은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그해 10월 여수에 주둔 중인 14연대에 제주도 출동 명령이 하달됐지만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14연대에 침투한 남로당원과 여수·순천 지역 남로당원들은 출동을 거부하고 무장 폭동을 일으킨다.

즉 남로당의 지령에 따른 여순무장반란을 통해 제주 4·3사건이 홍준표 시장이 인식하고 있는 ‘양민 학살’이 얼마나 모순되고 왜곡된 것인지를 감잡을 수 있는 것이다. 설령 양민 학살이 있었더라도 남로당 무장 괴뢰들이 부모형제이자 일가친척인 주민들을 한라산 산간으로 이주케 함으로써 일어난 것이다. 공산 폭도들은 이주시킨 주민들에게 마을로 내려가면 군경과 우익들에 의해 개죽음을 당한다는 공갈 협박으로 인질이자 볼모로 삼았다. 

또한 그렇게 산중으로 들어간 주민들도 혈연이든 지역이든 다양한 연고로 공산 폭도들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것을 당연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때문에 4·3사건이 촉발되고 6·25전쟁이 끝나고도 무려 1년 6개월여를 더 지나 제주 4·3사건이 종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전남도경 자료실에 올라와 있는 여순반란의 전모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을 통해 제주 4·3사건의 성격이 폭동이자 1개 도민 절대 다수가 반란에 가담한 내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여순반란사건 주동자 김지회는 함흥농고 출신

Ⅱ. 제14연대 좌익 침투 배경과 반란

1. 침투

당시 남로당에서는 군 장교에 대한 침투공작은 주로 사관학교 내에 이미 침투하였거나 포섭된 조직망을 통해서 남로당이 추천한 자를 무조건 입교시키는 경우와 이미 임관된 장교로 지인, 동창, 혈연, 지연 등의 인간관계를 이용하여 포섭하였다.
제14연대의 경우, 남로당 전남도당위원회는 도당부(道黨部)에 군사부   (軍事部)를 설치하고 군(軍)과 야산대(野山隊) 공작을 관할하고 있었는데, 도당군사부에서 광주, 목포를 비롯한 각 시.군당 군사부에 사병 추천 지시를 하달하면 이들은 면. 리까지 다시 지시를 하여 입대자 명단을 받아 도당 군사부에 제출한다.

도당에서는 이 명단을 제14연대 공작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조직책(일명, 오르그) 박태남(朴泰南)에게 주고, 박은 제14연대 연대조직책인 연대인사계 지창수 상사에게 지시하여 대대, 중대, 소대로 배치한다. 후일 반란군 사령관 김지회도 함흥 출신으로 이때 침투된 좌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대 인사계에 대한 침투 및 포섭 공작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하며 제14연대의 경우 약 반수의 사병이 전남도당에 의해서 침투되었다고 한다.

김지회 중위는 이북 함남 출신으로 함흥농고를 졸업한 후 월남하여 1947년 육사 3기로 졸업했고, 1948년 6월 1일자로 14연대에 전속된 자이다. 그는 당시 남로당 중앙당에서 관리하는 조직원인 연대장 오동기 중령의 신임이 두터운 장교였다.
1948년 5월 4일 여수에 제14연대가 창설되자 제1대대장 이영준 소령이 연대장으로 보임되면서 안영길 대위 이하 1개 대대병력이 제14연대로 전출되었다. 제14연대 기간요원 중 하사관 출신 50여 명이 근간이 되었다. 국방부가 지목한 여순사건의 주동자 지창수 상사도 그 중의 한 명이었고 그 역시 광주 제4연대 모병 때 입대한 자이다.

제14연대를 창설할 때, 제4연대 대원중 평소에 까다로운 행동을 하거나 의심스러운 구성원들 대부분이 제14연대의 창설요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14연대의 창설요원으로 뽑힌 800여 명의 병사들은 차출 케이스로 뽑혔다는 사실만으로도 동료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사상적으로도 연대의식과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

제14연대 병영 위치는 여수시에서 4km 떨어진 구 일본군 항공기지에 자리하였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농민들의 논밭과 마을을 강제로 징발하여 사용하고 있던 곳이었다.

여순사건 당시 연대장은 4연대 연대장으로 있던 일본군 출신 박승훈(일본 육사 제26기) 중령으로,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12일 전인 10월 7일자로 제14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제주 4·3사건은 김일성 지시에 따라 남로당 김달삼 등이 주도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진은 1948년11월 경찰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중인 제주도민들. /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제주 4·3사건은 김일성 지시에 따라 남로당 김달삼 등이 주도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진은 1948년11월 경찰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중인 제주도민들. /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 반란의 시작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 4.3폭동이 악화되자, 육본에서는 제주도에 진압 사령부를 신설하고, 대구 6연대 1개 대대, 부산 5연대 1개 대대를 증파하였다. 그리고 10월 15일 여수 제14연대장에게 “제주도에 파견할 1개 대대를 조속히 편성하여 대기하라”고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사령부는 여수 14연대 1개 대대를 10월 20일까지 제주도에 도착시켜 작전에 임하라는 진압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14연대장은 즉시 1대대에 출동 준비를 지시하고, 일본군이 쓰던 88식이나 99식 소총을 반납케 하고 M1소총을 지급하였다.

이 소식은 즉시 14연대 남로당 책임자 지창수 상사를 통해, 여수 인민위원장에게, 여수인민위원장은 전남도당 책임자 김백동에게 보고하였고, 김백동은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에게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이재복은 “즉시 출동을 저지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지창수 상사는 10월 16일 즉시 정락현, 유창남, 김근배, 김정길 들을 만나 반란을 일으킬 것을 결정하고, 이 내용을 부대 안의 식당에서 일하는 연락책 박태남에게 알려 주었다. 박태남은 여수 인민위원장에게 보고하였다.

이 사정을 모르는 육본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문을 14연대장에게 보냈다.

“14연대 1개 대대는 10월 19일 20시에 여수항을 출발 제주도에 도착하라. 육군참모총장 이응준 대령”
그러나 이 전보는 14연대장 박승훈이 보기 전에 우체국에서 일하는 남로당원에 의해 여수 인민위원장이 먼저 알게 되었다. 곧 인민위원장은 여수 지역의 남로당원을 동원하였고, 김백동과 이재복도 계속 지령을 내렸다. 이에 지창수 상사 등은 부대 내에서 반란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지창수는 부대 안의 남로당원 40명을 즉시 소집하여 제주도 출발을 위해 연병장에 모일 때 부대를 장악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계획을 식당에 있는 박태남을 시켜 여수 인민위원장에게 보고하게 했다. 
여수 인민위원장은‘여수 남로당원을 동원하여 부대 앞 식품점 근처에서 모여 있을 테니. 식품점 주인에게 물건을 사는 척하면서 반란이 성공하면 신호를 보내라’고 하였다.

이때 신호가 ‘개는 잘 짖고 있다’ 였다. 인민위원장은 그러면 즉시 부대에 들어가서 합세하겠다고 하면서 암호는 ‘처녀’, ‘총각’이라고 알려 주었다.

48년 10월 19일 작전명령을 접수한 14연대 박승훈 연대장은 만약을 염려하여 ‘남로당에서 이 정보를 입수하여 저지할지 모르니, 19일 20시 출발을 21시로 연장해서 출발하라’고 지시하였다. 군장 검열은 2시부터 식사는 오후 6시, 부대 출발은 오후 9시에 하기로 하였다. 부대는 60밀리 박격포로 무장시켰다. 1대대장 김일령 대위는 출동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오후 7시 식사를 마친 연대장과 참모들은 여수항 군함에 군수물자를 선적하느라 부대를 출발, 여수항에 도착하여 선적을 감독하고 있었다.

오후 8시 집합 나팔이 울렸다, 1대대 장병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완전 무장을 하고 연병장에 모였다. 모든 전화선이 끊겼다. 남로당원인 40여 명의 장병들이 서서히 1대대 장병들을 포위하였고, 일부는 탄약고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며, 일부는 정문을 출입 통제하기 위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여수 남로당원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부대 앞 식품점에 모여 들었다.

19일 오후 8시 지창수 상사가 연단에 올라가 인원보고를 받고 있었다. 1중대-2중대-3중대-중화기 중대 순으로 집합하여 ‘이상 무, 집합 끝’ 보고를 하고 있었다. 장병들의 실탄은 연병장에서 지급하기로 해서 실탄이 없었으나, 반란자들에게는 사전에 2클립씩 실탄이 지급되어 있었다.

원래는 김일령 대대장이 집합 보고를 받고 훈시를 하고 출발 명령을 해야 하는데, 장교들은 9시에 집합한다고 해서 연병장에 나와 있는 장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를 의심하는 장병은 전혀 없었다.

이윽고 지창수 상사가 사열대에 올라가 선동을 시작하였다.

“지금 밖에는 경찰이 우리를 향해 쳐들어오고 있다. 이 때문에 비상소집을 한 것이다. 즉시 응전할 준비를 갖추어 경찰을 타도해야 한다. 지금부터 경찰은 우리들의 적이다. 총을 들고 저주스런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들은 동족이 상쟁하는 제주도로 출동하는 것을 절대 반대한다. 경찰을 타도하게 되면 우리들은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위하여 궐기한다. 실은 지금 북조선 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해 38도선을 돌파하여 남쪽으로 진격 중이다. 우리들도 여기에 호응 북진하여 미국의 괴뢰를 소멸시켜야 한다. 지금부터 우리들은 인민해방군이 된다. 그래서 조국통일을 볼 때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라고 외쳤다.

연설을 마치자, 좌익들이 “옳소!”하며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탄약고에서는 탄약고를 점령하였다는 신호탄이 올랐다. 이때 하사관 2명과 사병 1명이 “안 된다! 우리가 어떻게 해방군이 된단 말인가? 경찰은 타도하고 제주도는 안 간다 해도 해방군은 안 된다!”라고 외치자 좌익하사관들이 이 세 명을 끌어내어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하였다. 
우익 장병들이 이에 대항하려고 하였지만 좌익들은 실탄을 갖고 있는데, 실탄이 없어 대항할 수 없었다. 결국 한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모두 지창수와 함께 반란군이 되었다.

탄약고를 점령한 반란군은 신속하게 실탄을 운반하여 1대대 장병들에게 실탄을 공급하였다. 반란에 필요한 시간은 불과 10분이었다. 그리고 지창수는 의무장교만 빼고, 장교는 모두 사살하라고 명령하였다.

5중대 주번사관 박윤빈 소위(육사 6기)는 9시에 비상나팔을 불어야 하는데, 8시에 불리는 것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연병장으로 가는데 “누구냐?” 하는 수하를 당하였다. “나 주번사관이다. 무슨 일이 있는가?” 하자 반란군은 박윤빈 소위를 확인하고 총을 쏘았다.
박윤빈 소위는 복부가 뜨끔하면서 다리에 힘이 빠져 쓰러지고 말았다. 1중대 주번사관 김정덕 소위도 똑같이 반란군의 총

을 맞고 쓰러졌다. 구병모 소위는 반란군의 총격으로 창자가 밖으로 쏟아졌다. 그러나 박윤빈 소위는 극적으로 생명을 건졌다. 

이를 알아챈 전용인 소위(육사 5기)가 1대대장 김일령 대위에게 출동부대가 반란군이 되었다고 보고하니, 김일령 대위는 전용인 소위에게 “여수항에 있는 연대장에게 빨리 가서 보고 하라. 여기는 내가 수습하겠다”고 명령하고 권총을 빼들고 사무실을 나가려 했다.

반란군 20여 명은 2대대와 3대대 중대장실을 다니며 장교는 무조건 사살하고, 1대대장에게 손을 들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너희들 누구냐?”하며 대대장 김일령이 일어서며 외쳤다. 그러자 총을 난사하여 죽였다.
총소리에 놀란 2대대와 3대대 장병들이 내무반에서 밖으로 나오려 하자 반란군들이 막사를 점령하였다. 그리고는 “경찰이 부대를 공격하려 하고 있다. 빨리 탄약고에 가서 실탄을 가지고 집합하라!”고 명령하자, 2대대와 3대대 장병들은 영문도 모르고 실탄을 지급받아 연병장에 모여 반란군이 되었다. 여기에 반항하는 자는 무조건 사살하고 장교들을 죽이니 장병들은 영문도 모르고, 지휘할 장교들도 없어 겁에 질려 반란군이 되고 말았다.

반란군은 1대대장 김일령 대위, 2대대장 김순철 대위, 3대대장 이봉규 대위, 연대 작전주임 간성윤 대위, 1중대장 차지영 소위, 2중대장 김용관 중위, 진도영 중위 외 3명(육사 3기) 김록영 중위 외 7명(육사 5기), 이병순 소위 외 6명(육사 6기) 이상 우익 장교 20여 명을 죽이고, 2대대와 3대대까지 반란군으로 만들어 14연대 2,300여 명이 완전히 반란연대가 되었다. 하사관과 사병도 총 40여 명이 살해되었다.
한편 14연대 정문 앞 식품점에서 반란이 성공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여수 남로당원 23명은 “개는 잘 짖고 있습니다” 하는 연락을 받고, ‘인민공화국 만세!’ 를 부르며 부대 안으로 들어가 무장하고 반란군과 합세하였다. 그 수가 약 2,200명이었다.



이상이 전남도경이 기록한 여수 제14연대 반란사건의 전말이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은 위의 기록에서 보듯 엄연하고 계획적인 14연대의 무장 반란을 ‘여순 봉기’ 심지어 ‘여순 항쟁’으로까지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거짓과 왜곡은 좌익 정치권과 시민단체뿐 아니라 학교 현장에까지 팩트가 왜곡되고 가치가 전도되어 중고교 교과서에까지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군인들의 평화로운 시위와 집회’로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하게 된다.

그러니 제주 4·3사건 진압 출동을 거부한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당화는 제주 4·3사건을 ‘무장 폭동’이나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고 저지하기 위한 ‘내전적 상황’이 아닌 반란 세력에 동조하거나 부역한 주민들을 ‘무고한 양민’으로의 일반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진압하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죽고 죽이는 상황, 보복이 복수를 낳는 상황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그것을 두고 좌익 세력은 무고한 ‘양민 학살’로 규정, 폭동 또는 반란과 무관한 주민들이 군경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한 것처럼 왜곡해 왔다. 분명한 것은 당시 제주도민 27만여 명 가운데 70% 이상이 좌익 계열로 사실상 남로당 당원이거나 지지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들 대부분이 공비들을 따라 ‘자발적으로’ 한라산 중산간 지역으로 이주했다. 
그들이 한라산 빨치산들이 7년여 걸쳐 내전을 벌일 수 있는 배후이자 병참이었던 것이다. 좌익 세력이 주장하는 ‘무고한 양민 학살’의 그 ‘양민’ 대부분은 사실 그들 또는 그들과 직간접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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