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종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장·전 동아닷컴 사장 “한일 문화교류가 안보·경제 살린다”
정구종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장·전 동아닷컴 사장 “한일 문화교류가 안보·경제 살린다”
  • 인터뷰  고성혁  미래한국 기자
  • 승인 2023.04.17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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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는 지정학적 숙명 관계이다. 역사적으로 양국의 체제가 각자 바뀌면서도 우호와 갈등 속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지내왔다. 고대에는 한반도의 국가들이 한자 등 문물을 전해 일본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됐지만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으로 전쟁의 참화를 겪기도 했다. 이후 구한말인 1910년 급기야 나라를 잃고 일제 식민지배를 받았다. 해방 이후 국교가 단절됐다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때는 한국 국내에서 많은 반대로 진통을 겪었고 지금까지도 한일 양국은 위안부 강제징용과 독도 문제 등의 현안으로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그러면서도 한국과 일본은 북한의 핵위협과 중국의 팽창 등 사회주의 체제와 대립하며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가치를 공유하기에 그동안 여러 차례 정상회담 등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관계 개선 노력을 해왔다. 특히 문재인 정부 때  악화된 양국 관계를 타개하기 위해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월 일본을 방문해서 한일 정상회담을 하며 이해와 협력 증진을 합의 등 많은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야당은 굴욕적인 한일외교였다며 비판을 넘어 반일선동을 하는 수준이다. 정부 차원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한일관계 개선은 민간교류가 활성화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이후 한일문화교류회의, 일한문화교류회의가 양국에 설립돼 문화교류 증진에 기여해왔다. 한일 민간교류의 현주소를 정구종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장으로부터 들어본다. 정구종 위원장은 한일국교수립 이후 일본 유학생 1호로 일본에서 공부했고 언론사 특파원으로, 또 대학 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일본 전문가이다. 

한류 붐 특집을 게재한 아시히 신문을 펼쳐 한일관계를 설명하는 정구종 위원장.
한류 붐 특집을 게재한 아시히 신문을 펼쳐 한일관계를 설명하는 정구종 위원장.

드라마 등 문화 콘텐츠 교류로 양국 이해 증진 기여

- 한일문화교류회의와 일한문화교류회의가 있는데 설립 배경, 활동 목표, 단체 교류 현황, 성과 등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서 오부치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그때 양 정상 간에 ‘21세기 파트너스 공동선언’이 있었습니다. 이를 실행하는 여러 가지 방안 중에 민간 문화교류 증진책으로 한국 측에서는 ‘한일문화교류회의’, 일본 측에서는 ‘일한문화교류회의’가 1999년 양국에서 발족했습니다. 한일문화교류와 관련한 정책 제안, 자문, 회의도 하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취지입니다. 한국에서는 문화, 예술, 영화 등 민간 부문 전문가와 교수 등 12명이 위원으로 구성되고 위원장은 지명관 선생으로 임명됐습니다. 

지명관 선생은 김대중 정부 때 KBS 이사장도 역임하셨지요. 지명관 선생이 초대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된 것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덕성여대 교수를 역임하며 사상계 주간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면서 반독재민주화운동을 펼치다 1972년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1974~1993년 일본 도쿄여자대학 교수로 재직할 때 1973~1988년 ‘TK生’이라는 필명으로 일본의 대표적 지성지(知性誌) 세카이(世界)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하면서 민주화투쟁을 전 세계로 알렸습니다. 그러한 업적을 한일관계 문화교류 증진에 적임자라고 여겨 초대 위원장으로 임명된 것입니다. 저도 처음부터 위원으로 참여했다가 2009년부터 3대 한일문화교류회의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한일문화교류회의 이전에는 문체부 산하에 한일문화정책자문위원회가 있었습니다. 정부에 건의해서 구체화되고 성공한 정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김대중 정부 때 대일문화개방정책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국내 여론이 일본의 저질 왜색문화가 들어온다면서 반대 일색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강하게 건의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경제. 문화 수준 모두 높아졌기 때문에 일본 문화에 겁낼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김대중 대통령이 반대를 무릅쓰고 결단을 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1999년부터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된 것입니다. 그 외에 학술세미나, 문화예술 공연 등을 통해 한일 간 문화교류 확대를 이어갔습니다. 그 이전에는 한국의 유명 가수 나훈아, 조용필 등이 일본에 가서 공연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일본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재일동포를 대상으로 한 겁니다. 반대로 일본 문화예술인이 한국에서 공연하는 것은 전무하다시피했습니다. 

- 김대중 정부 때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매우 큰 성과를 거뒀다고 하던데요? 

 1999년 대중문화 개방을 통해 일본의 대중예술, 특히 영화가 먼저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대중문화라고 해도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에 한하는 조건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한국에서 상영되어 큰 히트를 친 작품이 일본 영화 ‘철도원’,‘러브레터’ 같은 영화였습니다.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오겡키 데스카(おげんきですか)’라는 영화 대사는 바로 ‘러브레터’에서 나오는 장면입니다. 반대로 일본에서 상영해서 히트를 친 한국 영화는 ‘JSA’,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영화입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일본에서는 ‘Brotherhood’라는 이름으로 상영되어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일간에 영화 교류부터 이어졌고 일본 문화를 접한 한국에서도 ‘뭐 별로 아니네’하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겁니다. 

영화 교류 다음에 이어진 것이 ‘드라마 한류’였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 개최도 한일 교류 증진에 큰 역할을 했어요. 그 힘을 받아 2003년 일본 NHK에서 배용준, 최지우 주연의 ‘겨울연가’를 방영해서 그야말로 일본 전역에서 공전의 히트를 했습니다. 특히 일본의 아줌마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일본에서 ‘욘사마’ 붐이 일었고,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에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러고 보면 올해가 일본에서 ‘욘사마’ 붐이 일은 지 20년째 되는 해입니다. 

4월 3일자 아사히신문이 4차 한류붐을 집중 조명하는 특집을 게재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이 거둔 성과이기도 합니다. 한류붐 가운데 동원력이 가장 컸던 것은 한국 드라마였습니다. 아줌마들한테는 겨울연가, 그리고 일본 아저씨들한테는 대장금이 큰 인기였습니다. 드라마를 통해 한일 양국 대중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드라마 다음이 ‘K-POP’, ‘J-POP’이었습니다. 한국 걸그룹 공연이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다가 소녀시대가 등장하고 BTS가 나오게 되니까 한일간의 교류 차원을 넘어 세계적인 문화공연 콘텐츠가 된 것입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오징어 게임’은 세계적인 시리즈가 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과거 일본문화 수입을 막던 것에서 이제는 우리의 문화가 일본은 물론 세계로 뻗어가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사랑의 불시착’도 4차 한류붐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반대로 일본의 문화 콘텐츠는 한국에서 그렇게 많은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콘텐츠 수준이 일본을 능가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 제가 어렸을 때 70년대는 우주소년 아톰, 마징가제트를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이 모두 일본 애니메이션이었어요. 한일 교류는 오래 전부터 애니메이션을 통해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그 당시는 일종의 비공식이었죠. 그 외에는 일본 문화 콘텐츠를 다 막았습니다. 애니메이션조차 일본말이 나오지 않게 모두 더빙해서 방송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최근 한국 극장가에서 큰 인기를 끄는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입니다. 슬램덩크는 처음에는 만화로 출간된 것인데 애니메이션으로까지 나오게 된 것이죠. 지금 한국 극장가에서 400만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지금 젊은 세대는 문화 영상 등 분야에 대해서는 국적을 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문화 콘텐츠는 이제 국경이 없습니다. 영상을 접할 수 있는 수단도 아주 많아졌어요. 그만큼 소통 창구도 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 한국의 드라마는 일본 공중파를 통해 방송이 되었는데, 반대로 일본 드라마는 한국 공중파를 통해 방송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일본 문화 개방을 하면서 일부는 제한한 것도 있습니다. 바로 공중파 부분입니다. 일본 드라마가 한국 공중파에서 그대로 방송되는 것은 민족 감정도 있고 해서 처음에는 제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공중파 말고도 볼 수 있는 수단이 많아요.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같은 경우는 한국 사람도 많이 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방송에서 일본 드라마를 내보내지 않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은 아마 방송 수요 측면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일종의 광고효과나 수입면에서 수익성이 기대한 것만큼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998년 일본 의회에서 연설하는 김대중 대통령
1998년 일본 의회에서 연설하는 김대중 대통령

일본은 한국 정권 바뀔 때마다 골대 위치가 달라지는데 무슨 협상을 하느냐고 얘기

- 한일문화교류회의가 거둔 성과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2011년부터 시작한 일이 함께 가자는 의미에서 ‘동행’이라는 공연을 한일 공동으로 개최했습니다. 먼저 한일 전통공연부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명창 안숙선, 국수호 국립무용단 단장을 초빙하고, 일본에서는 가부키 명인들을 사쿠라마 우진, 그리고 한국계 일본 국민배우 ‘마쓰자카 게이코’를 초청해서 국립극장에서 합동 공연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일 양국의 최정상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한 것이 문화예술 공연 ‘동행(同行)’입니다. 우리의 국악 명창과 일본의 가부키 명인이 같은 날 같은 무대에서 합동 공연을 한 겁니다. 일본의 마쓰자카 게이코가 한국에서 한 공연은 일본 헤이안시대부터 내려오는 ‘만엽집’이라는 시집이 있는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에 헤이안 시대 때 수도인 ‘나라’를 건설할 때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이주한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건설하는 데 참여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노래로 공연한 것입니다. 

2015년 한일국교수립 50주년 되는 해에는 일본 미야자키의 백제촌에서 합동 축제 ‘마츠리’를 했습니다. 백제촌은 1500년전 백제가 망할 때 백제 유민들이 건너가 세운 마을입니다. 이 백제촌에서는 1500년전 백제 왕족들을 기리는 축제 마츠리를 매년 12월 31일에 하고 있습니다. 수백년 동안 해온 백제촌 마을 축제인데 2015년 한일수교 50주년에 백제촌 주민들을 초청해서 부여에서 부여문화제 600년 행사를 했습니다. 

당시 공연명은 ‘백제촌의 1500년만의 귀향’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렇게 한일간의 실질적인 문화교류를 되새기면서 서로 이해 증진을 도모하고 보다 구체적인 행동을 우리 한일문화교류회의가 주도해 왔습니다. 코로나 직전 2019년 행사는 오사카에서 있었는데 그때는 안숙선 명창이 가서 공연을 했습니다. 그렇게 계속되어 온 한일간 합동 공연 ‘동행’은  코로나 때문에 2년간은 하지 못했습니다. 올해 재개되는데 10회째 동행이 되는 것입니다.

- 특파원도 하시면서 가까이 지켜보셨을 텐데, 한국 역대 정부의 한일관계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시는지요?

한일관계가 어렵고 힘들 때 타개책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양국 정상회담입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박정희 대통령이 결단해서 성사시켰는데 당시 대학가에서 너무도 심하게 반대 데모를 했습니다. 그래서 위수령까지 내렸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 국교 수립을 마무리지었습니다. 시원찮은 정부였다면 정권이 휘청거렸을 겁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긴 안목이 있었기 때문인데 미국의 협력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가 워낙 못 살았기 때문에 5·16 이후 국가 재건에 나섰습니다. 

재건에는 돈이 필요한데 미국의 원조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여기에 일본과의 협상을 통해 재원 조달을 하게 된 겁니다. 당시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자금으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를 받았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산업발전의 종자돈이 된 것입니다. 제가 이때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제가 한일 국교 수립 후 일본 유학생 1호로 일본에 갔습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는 대한민국에 있어 안보와 경제 두마리를 모두 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두번째 1982년 신문사 특파원으로 도쿄에 갔습니다. 가자마자 그 해 교과서 문제가 터졌습니다. 침략을 진출이라고 표현한 것이 문제가 되었어요. 이때 우리나라보다 일본 매스컴에서 먼저 문제 삼으며 들고 일어났죠. 그것을 한국이 받아 쓰고 다음으로 중국이 일본 매스컴이 지적한 것을 받아 썼습니다. 그러던 차에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힌트를 얻어 왔다고 해요. 한국이 공산주의를 막느라고 국가예산의 3분의 1 이상을 방위비에 쓰고 있는데 그것은 곧 일본을 방어하는 데 직결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에 그동안 한국이 이렇게 애를 썼으니 일본이 이제는 그에 대한 성의표시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려 100억 달러를 요구한 겁니다. 일본이 깜짝 놀랐죠. 이미 1965년 한일협상을 통해 일단락 되었는데 무슨 100억 달러를 요구하느냐 하는 거죠. 

일본은 경제 규모에 비해 극히 적은 금액을 방위비로 쓰고 있었으니까요. 일종의 일본 방위 무임승차론으로 한국이 일본에 밀어붙였습니다. 레이건 대통령도 은연중에 한국편을 들었습니다. 한국의 요구에 나카소네 총리도 결국 전향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협상을 통해 40억 달러를 일본으로부터 받아내고, 또 반도체 관련 기술도 얻어내 한국이 80년대 재도약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일간에 역사나 독도 문제 등으로 인해 양국 관계가 얼어붙게 되면 제일 고생하는 사람들은 재일교포들입니다. 한일관계를 푸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던 사람이 나카소네 총리였어요.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첫 방문지를 한국으로 택했습니다. 그렇게 전두환-나카소네 양국 정상이 한국에서 만나 안보 문제에 인식을 같이 하면서 한일관계가 풀렸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도 한일간에 약간의 트러블이 있기는 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일본 버르장머리 고쳐주겠다’는 말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한일관계는 순조로웠습니다. 일본도 한국에서 평화적 정권교체로 민간 정부가 들어선 것을 매우 높게 평가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아주 잘한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1993년 위안부 출신의 김학순 씨가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기자회견을 하면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피해 당사자가 직접 나서서 문제 삼은 것은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미야자와 총리 때였습니다. 이때 김영삼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는 우리 한국에서 해결하겠다고 하면서 한일간의 걸림돌을 제거해 준 겁니다. 일본에 자꾸 손 벌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영삼 정부에서 꽤 많은 금액으로 보상을 해 줬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통해 한일 신파트너십 공동선언을 하면서 신 한일관계를 만들었습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한국은 일본에 대해 대중문화 개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의회에서도 연설을 아주 잘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에 망명해 있을 때, 납치사건도 있었는데 그때 일본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아주 잘 도와줬습니다. 그것에 대한 감사도 의회 연설을 통해 밝혔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의원들이 모두 기립 박수를 보냈습니다. 또한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 개최를 통해 한일관계를 업그레이드 시켰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한일관계에 기여를 했습니다. 고이즈미 총리와 한일 셔틀 정상회담을 했지요. 그때 징용공 문제가 떠올랐습니다. 신고하라고 했는데도 누락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노무현 대통령이 관민합동 조사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조사를 통해 누락된 징용공들에 대해 한국 정부가 6000억 원 정도 보상을 해줬습니다. 이렇게 한국 역대 정부에서 보상을 해줬는데 변호사들이 부추겨 개인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지금까지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잡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2008년 3.1절 기념사에서 ‘한일이 과거에 매달려 미래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연설을 했습니다. 동북아 평화를 위해 한중일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때는 위안부 문제를 종식시키면서 일본이 10억 엔을 출연하여 기금까지 만들었습니다. 각 정부마다 한일관계를 원만하게 가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들어서면서 또 처음부터 다시 하자고 하니 일본에서는 이만저만 답답한 것이 아니죠.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대장금과 겨울연가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대장금과 겨울연가

- 문재인 정부 때는 단교만 안했을 뿐 최악의 한일관계였다고 하더군요.

일본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한국은 정권 바뀔 때마다 골대 위치가 바뀌니 도대체 무슨 협상을 하느냐 하는 소리가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일본에서는 그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민간교류도 문재인 정부 때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일본에서 움직이지 않으니까요. 왜냐하면 그들도 일본 자국내 여론을 살펴야 하니까 그런 겁니다. 문재인 정부 때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게 되니까 일본에서도 ‘혐한(嫌韓)’이 극성을 부리게 됐습니다. 

- 윤석열 정부의 한일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번 한일 정상회담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단한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역대 정부의 정상들이 앞장서서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일관계도 원만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가 망친 한일관계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 놓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합니다. 외교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관성과 신뢰입니다. 한국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골대가 움직인다고 일본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그 일관성과 신뢰가 무너짐을 의미합니다. 한일관계에서 신뢰와 일관성을 한국 정부가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윤 대통령의 결단은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때도 한일국교정상화는 안보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이 함께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핵 위협은 이제 한국 혼자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이 함께 울타리를 쳐야 합니다. 한반도 유사시 주일 미군이 한국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이때 일본 정부의 역할이 매우 큽니다. 따라서 동아시아 안보적 측면에서 한미일 협력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한국도 경제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사실상 경제적으로 G8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G7 국가입니다. 그렇다면 G7, G8의 한일 양국이 언제까지 갈등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요. 이런 것을 윤 대통령이 결단해서 한일 정상회담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대장금과 겨울연가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대장금과 겨울연가

한일 해저터널 만들면 신실크로드 완성되는 것

- 향후 한일간의 민간교류를 보다 확대하기 위해 어떤 구상을 하고 계신지요?

오늘날 국가간의 관계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소프트파워입니다. 소프트파워는 바로 문화입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도 보면 바로 자유진영 서독의 TV 방송 때문입니다. 소련에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고 개혁개방 노선을 걷게 되면서 동구권에 서방의 TV 방송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서방의 방송, 소프트파워가 소련의 철의 장막과 베를린 장벽을 허문 직접적 계기가 된 겁니다. 그 당시 일본 TV에 방영된 모습을 보면 기차 지붕에 타고 넘기도 하고, 자동차에 짐을 가득 싣고 자유진영으로 대거 넘어왔습니다. 결국 동독과 동구권이 무너졌습니다. 한일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개방 이전에는 서로 차단되어 있으니까 오해도 생기고 갈등이 커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일문화개방을 하면서 서로의 문화를 접하고, 한국의 드라마가 일본에서 방송되면서 한일간의 거리는 급격히 줄어들게 된 것입니다. 바로 겨울연가, 대장금 같은 한국의 드라마, 소프트파워가 한국과 일본을 가깝게 연결해 줬다고 하겠습니다. 지금도 넷플릭스 등에서 보는 오징어게임 같은 영상매체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런 문화교류가 한일 양국민이 공동의 관심사가 되면서 서로간의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보다 친밀하게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한일간 민간교류를 보다 확대하기 위해 유스호스텔을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보다 저렴하게 숙박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하면 많은 사람들이 양국을 오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많이 오고 가면 그만큼 문화교류는 자연스럽게 이뤄지게 됩니다. 최근 일본 관광지에 보면 한국 사람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야당이나 반일시민단체가 반일 선동을 해도 일본 방문자가 많다는 것은 반일 선동이 과거처럼 먹히지 않는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서로 많이 값싸게 오고 갈 수 있도록 서울 도심에 유스호스텔 건립 지원책이 절실합니다. 

한일공동 방송 채널을 만드는 것도 고려해볼 만합니다.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이용하면 비용도 적게 들 겁니다. 이런 모임은 일본에서 먼저 시작했습니다. 발족만 하고 아직 본격화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문화재 제자리 돌려놓기 운동입니다. 일본으로 반출된 한국 문화재가 많습니다. 최근 일본에 있는 한국 문화재를 누가 훔쳐와 지금 법의 심판을 받고 있는데 한국 법원 1심 판결은 일본에 되돌려 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법원 판단 그대로 일본에 되돌려 주고, 대신 일본에 있는 한국 보물급 문화재를 전수조사해야 합니다. 소재지만이라도 파악하고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간 것인지 조사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명박 대통령 때 간 나오토 일본 총리와 아주 관계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한일국교 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궁중의궤’를 한국에 반환했습니다. 국립박물관에서 전시도 했지요. 이런 것은 한일간에 사이가 좋아야 가능한 겁니다. 유네스코에서도 문화재 돌려주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도 그리스 문화재를 돌려주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한일 해저터널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기술적으로는 충분합니다. 일본 혼슈와 홋카이도는 해저터널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본 신칸센도 그 해저터널로 홋카이도로 갑니다. 언젠가 한일 해저터널이 건설되고 한반도도 통일되면 일본 홋카이도부터 부산과 서울 신의주를 거쳐 유럽까지 가는 21세기 신실크로드가 완성됩니다. 앞으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보다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일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한일문화교류회의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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