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여성 교육의 선구자, 로제타 홀 선교사
한국 근대 여성 교육의 선구자, 로제타 홀 선교사
  • 최상진  영원한 친구들 편집위원
  • 승인 2024.09.05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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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우호협회 / 미래한국 공동기획

한미동맹은 70년 동안 굳건하게 유지되면서 한반도의 평화, 한국의 번영, 혈맹인 한미 양국의 협력을 이끌고 있다. ‘같이 갑시다’라는 슬로건이 상징하는 한미동맹의 성공은 수많은 양국 지도자와 군인,그리고 국민의 희생과 헌신으로 세워졌다. 동맹 70주년을 맞아 한미동맹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한 영웅들을 찾아 그들의 따뜻한 한국사랑, 미국사랑 이야기를 연중 시리즈로 게재한다.

철쭉과 영산홍이 화사한 모습을 드러낸 4월 하순, 양화진 선교사 묘역을 찾았다.

이 곳은 1882년 조미통상 수호조약 체결시점을 전 후로 선교활동을 통해 교육, 의료 등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앞장서 왔던 선교사들과 헤밀턴 쇼와 같이 선교사의 자녀로 이 땅에서 태어났고 6·25 한국전쟁 때 목숨을 바친 숭고한 선교영혼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미개한 봉건국가이며 외세에 시달림을 받던 조선을 새로운 미래의 신생국가로 태어나게 이끌어 준 그들의 정신과 업적 그리고 희생에 감사드린다. 

오늘 방문할 주요 인사는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 묘역이다. 이곳에 묻혀 있는 홀 집안사람들은 모두 5명에 이른다. 34세에 청일전쟁 때 부상한 환자를 돌보다 순직한 남편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Willam James Hall), 그의 아내이자 주인공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 아들인 닥터 셔우드 홀(Sherwood Hall)과 며느리 닥터 메리안 홀(Marian Hall), 마지막으로 겨우 다섯 살에 풍토병으로 세상을 등진 셔우드 홀의 여동생인 에디스 마거리트 홀(Edith Margaret Hall) 등이다. 
어린 에디스를 뺀 나머지 4명이 전문 의료진으로 의료선교와 사역을 한 기간은 무려 73년, 로 제타 혼자의 봉사기간은 43년이다.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에 헌신했으며 죽어서 대를 이어가며 자신의 조국 강산에 묻히듯 이 곳 양화진 외국인 선교묘역에 잠들어 있다.

로제타 셔우드 홀
로제타 셔우드 홀

의료, 학교사업으로 수호통상조약을 이어간 미국

1882년 5월 2일 체결된 조미 수호통상조약은 양 국의 이해관계가 달라 초기에는 이렇다 할 교류가 크게 없었다. 미국은 자국의 잉여 농산물이나 자국 상품의 판매를 위한 미래 시장 확보의 개념으로, 조선은 남하정책으로 국경을 넘보는 러시아의 방패막이로 미국을 선택했다. 미국은 태평양함대를 가동하며 중국, 일본, 필리핀 등 극동의 영향력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유럽이나 일본과 같이 영토병합을 통한 침탈의 야욕은 보이지 않았다.

미국은 당시 조미수호 통상조약에서 조선에 호의적 조항인 거중조정으로 현재의 상호방위조약과 같은 개념을 약속했고 관세자 주권으로 관세의 권한을 조선에 부여하고 특히 중국의 조선 속방론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조선의 자주권을 인정해 주었다. 이러한 관계설정은 고종의 걱정을 들어주었고 미국에 호의적 반응을 갖게 하였다.

미국은 83년 4월 초대 주한공사로 푸트(L.H.Foote)를 임명하였고 조선은 7월 민영익 전권대사를 단장으로 답례사절단(보빙사)을 파견하였다. 사절단은 워싱턴으로 가는 대륙횡단열차에서 미 볼티모어 가우처 대학의 총장이며 미 감리교회 모 교회인 러블리 레인 교회의 담임 목사인 죤 플랭클린 가우처 박사를 만나게 되었고 도포에 갓을 쓴 미지의 조선 사절단에게 큰 감명을 받은 그는 내면의 큰 울림으로 조선을 복음화 대상지역으로 설정하였다. 조선의 선교방법을 모색하던 가우처 총장은 1884년 6월 친구인 일본 주재 로버트 맥크레인 목사 부부에게 조선에서의 선교사업을 타진케 하였고 외교부 주사 김옥균 통해 조선선교에 관한 친서를 고종에게 전달하였다. 

신청한지 불과 1개월 여 만인 7월3일, “조선에서 병원과 학교 두 부분의 선교사업을 윤허한다”는 고종의 허락이 내렸고 이 때부터 선교를 기본으로 한 교육과 의료사업이 시작되었다. 미 감리교회는 선교본부를 설치하고 가우처 목사가 중심이 되어 배제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 이화학당의 스크랜턴 대부인 등 교육 선교사를 파견하였고 모금을 통해 연차적으로 5천불의 선교자금을 보냈다. 특히 교육기회를 박탈당한 여성교육에 누구보다 열성적 이었던 가우처 박사는 그 후 조선을 6번 방문하여 배재학당, 이화학당, 조선 기독교연합대학(연세대학교전신), 평양미션스쿨 등에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의료사업은 1884년 의료선교사로 뉴턴알렌이 입국한지 3개월 만에 갑신정변으로 거의 빈사상태의 변을 당한 민영익을 알렌이 살려냄으로 고종과 민비의 신임을 얻고 왕실의 승인을 받아 1885년 4월14일 조선 최초로 궁중의원인 제중원(광혜원에서 개칭)이 개설되었다.

한국 최초 여성병원 보구녀관(普救女館)

시병원(施病院, 보구녀관의 전신)은 제중원과 달리 민간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개념의 병원으로 1885년 이화학당을 세운 메리 스크랜톤에 의해 개원되었다. 같은 의료 선교사인 아들 윌리엄 스크렌톤 부부는 이화학당 한편의 온돌방을 개조하여 입원실을 갖추고 민간 병원을 개설하였다. 제중원이나 시병원 모두 여성진료를 위한 여의사가 필요했다.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성리학에 기반을 둔 유교사상으로 여성의 존재나 인권이 성립되지 않았고 남녀내외의 깊은 골로 남자의사에게 몸을 보인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이 때 미 감리교 선교본부의 도움으로 파견된 여의사가 제중원의 애니 엘러스(Annie J. Ellers)와 시병원의 메타 하워드(Meta Howard)였다. 

조선의 첫 여성 의사로 부임한 애니 엘러스는 락포드 의과대학의 졸업을 1년 남겨둔 의학도였는데 후일 명성왕후의 담당의사가 되어 정경부인의 작위를 하사 받았다. 한편 시병원은 메타 하워드의 본격적인 의료 활동으로 여성을 포함한 환자가 급증하게 되었고 명성이 높아지자 고종이 널리 여성을 보호하고 구하라는 의미에서 1887년 10월31일 ‘보구녀관’ 이란 호칭을 내려주었다.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에서는 이 날을 개원 기념일로 삼고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병원이며, 여성 의학교육 기관 겸 소아병원의 출발로 간주하고 있다.

초대 보구녀관의 관장이었던 메타 하워드는 영민하여 조선 도착 6개월 만에 조선말을 터득하여 하루 수십 명의 진료와 왕진 등으로 활발한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절대적으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려야 했고 건강악화로 1889년 귀국하게 되었다.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의 등장

그 이듬해인 1890년 로제타 셔우드 홀(이하로제타)이 부임하면서 노쇠한 조선을 계몽하고 개혁시키는 과업들이 조용히 또 점진적으로 전개되면서 교육을 통해 의료인력 양성, 장애환자 진료 등으로 발전하였다. 1865년 9월 19일에 미국에서 태어난 로제타홀은 25세인 1890년 부산에 도착한다. 교사의 길을 걷다. 

평소 인도 등 여성교육에 관심이 있었던 로제타는 여성들을 위해 마운트 홀 요크(Mt. Holyoke) 신학교를 설립한 마리 라이온스(Mary Lyons)의 연설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요지는 “만일 당신이 남을 위해 봉사하고자 한다면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하는 곳에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을 하십시오.”였는데 선교사업에 관심이 있었던 그녀는 결단을 내린다. 바로 교사직을 사임하고 세계 최초의 여자 의과대학인 펜실베니아 의과대학 졸업과 동시 미국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부(WFMS) 소속으로 조선에 부임하게 되었다. 

독신 선교를 갈망하던 로제타는 해외선교부 책임자 캐나다 출신의 윌리엄 셔우드 홀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결혼을 약속 한다. 그녀가 조선에서 맡은 보직은 보구녀관 2대 관장이었다. 이듬해 서울에서 합류한 두 사람은 결혼을 하였고 각자의 임지인 평양과 한양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평양이 전쟁터가 되자 숨지고 부상당한 병사들을 돌봐야 했던 윌리엄은 격무에 시달려 발진티부스에 감염되었고 마가렛이 돌 볼 시간도 없이 1894년 11월 24일 3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양화진에 묻혔다.

마가렛은 1890년 조선에 도착한 이래 매일 육필 일기인 “로제타 홀의 일기”를 통해 “남편은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뛰엄뛰엄 힘겹게 말했다. 평양에 간 것은 주님의 뜻이니 탓하지 말아 달라고, 울음을 참았지만 베게는 흥건히 젖었다.” 젊디젊은 나이에 서로가 큰 힘이 되어주고 선교의 버팀목이던 남편이 떠나고 아들 셔우드와 뱃속에 품은 딸 에디스와 선교의 사명을 수행해야 했다.

로제타의 수난, 신의 시험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일단 미국으로 건너가 심신의 정리 시간을 가지고 앞으로의 준비를 마친 후 1897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 왔다.딸 에디스는 아빠의 공백을 매워주고 새로운 삶의 용기를 주는 귀한 존재였다. 

엄마는 에디스가 가끔 병 치례는 했지만 비교적 건강했고, 가족들의 사랑을 이끌어 내는 천사 같은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새로운 임지인 평양에 도착한 직후 전 가족이 이질에 걸렸는데 특히 에디스가 많이 아파했고 체온이 41도까지 오른 상태에서 가쁜 숨을 몰아가던 중 눈을 감지 못한 채 깨어나지 못했다. 

3년 4개월의 너무나 안타깝고 짧은 생이었다. 윌리엄의 충실한 제자로 목사가 된 김창식이 에디스를 평양에서 양화진까지 운구하고 아버지 옆에 묻어주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지만 마가렛은 기도로 극복했다. “사방은 어둡고 길을 모르니 저를 도아주소서” “아이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로 그 분이 데리고 갔을 것이다”라고 믿으며 슬픔을 달랬다. 근 10년 전 부모님의 품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출발할 때 가졌던 설렘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오직 사명감만이 전신을 감싸는 듯 했다. 사역 지는 평양이었다.

박 에스더와 남편 박유산, 로제타 홀 가족.
박 에스더와 남편 박유산, 로제타 홀 가족.

조선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탄생

일시 귀국 시 모금한 자금으로 1897년 기홀(記忽)병원을 건립했다. 남편 윌리엄 홀을 기념하는 병원이다. 다음해 평양 광혜녀원을 건립하였고 2년 후 기홀병원과 합병하여 평양기독병원으로 규모를 키워시각과 청각 장애인을 위한 맹인학교와 농아학교도 세우고 점자도 한글에 맞게 개발하였다. 또 1920년 로제타가 동대문 부인병원 원장으로 재직 시 개설한 인천의 부인병원과 간호학교는 인천기독병원으로 발전하였으며 로제타 홀 기념관을 운영하고 있다.

평소 로제타는 여성 쪽에 관심이 많았다. 늘 “여성에 의한 여성의 치료”를 강조했으며, “여자가 어머니가 되는 것과 의사가 되는 것이 무엇이 다르냐”며 여성도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되는 것을 당연시 하고 그 방안을 실천했다. 조선에 와서 로제타가 본 일반 여성들은 존재감도 인권도 없었다. 처녀 때는 누구 집 딸, 예쁜이, 복술이 등으로 결혼을 하고 나면 누구 엄마, 안동댁 등과 같이 대충 얼버무리고 실제 이름은 불러주지 않았다. 

조선의 여인들은 노예와 같이 일만 하고 아이들을 너무 많이 낳아 나이 마흔에 온통 주름이 지고 이가 빠지는 등 노화현상이 두드러 졌고 남녀내외, 남존여비와 같은 여성비하 의식으로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했다. 또한 양반집 규수나 부인들은 문밖출입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어 병원 출입이나 남자의사들의 진료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먼저 여성들의 병원혜택을 늘리기 위해 여성병원을 개설하고 여성들이 전문직 의료인이 될 수 있게 의과대학과 간호학교를 건립하는 것이었으며 필요에 따라 미국에 유학도 구상했다.
박에스터의 본명은 김점순이다.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 집에서 잡일을 봐주던 김흥택의 딸로 개종하여 세레를 받고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이 되었다. 영어를 곧 잘하여 로제타의 통역을 맡았고 수술을 할 때는 조수역할을 했다. 

로제타의 주선으로 요리사 박유산과 결혼을 하고 로제타가 남편 사망 후 일시 귀국 시(1894년) 동행하여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인 최초의 여자 의사가 된다. 김점순의 이름은 결혼과 동시 미국식으로 성은 박으로 이름은 세례명인 에스터로 바뀌었다. 
졸업 후 미 감리교 소속 해외 선교사가 되어 평양 광혜녀원으로 파견되어 로제타와 정식의사로 협업하게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30대에 박유산은 미국에서 박 에스터는 평양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셔우드 홀,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 제작

홀가의 장남 셔우드는 평양에서 태어난 파란눈의 귀공자이고 서양 아이를 보지 못한 조선인에게는 신기한 존재였다. 아버지와 여동생이 풍토병(감염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누나 같았던 박에스터 부부가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한 일들은 대를 이어 의학도와 선교의 길을 택하게 하였다. 그의 아내 매리엄 버튼리는 마운트 유니언 의과 대학에서 만난 외과의사로 같은 선교사의 길을 걷기로 약속 하였다. 조선으로 파송된 셔우드는 1926년부터 해주 구세병원 원장으로 근무하였고 28년에는 조선 최초의 결핵 요양소인 구세 요양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1932년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여 결핵퇴치에 공헌하였으나 1940년 일제에 의해 간첩혐의로 강제 추방되는 치욕을 겪었다. 이후 인도에서 결핵퇴치 운동을 계속하였고 63년 은퇴 후 아버지 고향 캐나다에서 98세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셔우드 부부 또한 그들의 소망대로 양화진 묘역에 잠들어 있다.

로제타 홀 일가의 130년 역사(1860년∼1991년)를 돌아보며 국가발전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교육과 의료분야가 한 가문의 숭고한 정신으로 확립되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023년 4월 27일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19세기 말 한국에 온 미국인 선교사들의 헌신을 이야기하면서 로제타 홀을 언급했다. 감사의 표시로 로제타의 43년간 업적을 재평가하고 지난 4월5일, 제52회 보건의 날 기념식에서 ‘국민훈장모란장’ 수여 했다.

시간이 지나면 잊기 마련인 역사적 사실을 재확인하고 의미를 다시 새긴다는 것은 미래를 위한 준비이고 차세대를 위한 교육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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