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란 원장 "40년 전통의 영남지방 최대 기도원"
이옥란 원장 "40년 전통의 영남지방 최대 기도원"
  • 미래한국
  • 승인 2009.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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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가 뛴다_감림산 기도원 이옥란 원장
▲ 감림산 기도원 전경
한강 이남 기도원 중 가장 큰 규모40년간 매주 화요일 구국철야기도회 열리는 곳인재양성, “감림산 강단에 서면 전국적으로 뜬다”‘꽃다운 처녀가 40년 기도로 만든 은혜의 동산’‘오병이어 캠프’ 등 독창적 프로그램으로 인재양성 활발“이렇게 안 바쁘면 혼자 사는 의미가 없죠.”힘들게 연락이 된 감림산기도원 이옥란 원장이 건넨 첫마디이다. 하루 수면 시간은 세 시간, 이동할 때 잠깐씩 쪽잠을 자면서도 “일 할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는 이 원장은 고희(古稀)가 코앞이건만 청년처럼 달리고 있다. 1968년 8월에 설립한 경남 양산시 하북면에 위치한 감림산 기도원이 40주년을 맞았다. 한강 이남의 기도원 가운에 가장 규모가 크면서 활발한 사역을 하는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특별히 화요구국철야기도회와 교회와 가정을 위한 금요철야기도회가 40년 동안 한 주도 빠짐없이 이어지고 있다.1월 27일, 설 연휴에도 어김없이 구국기도회는 열렸고 밤 11시가 되자 1500여명의 성도들이 대성전을 가득 메웠다. 밤 11시에 시작된 철야기도회는 보통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이어진다. 이 날 화요구국기도회의 강사는 부산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였다. 김 목사는 감림산 기도원과의 인연을 이렇게 밝혔다. “저의 부흥집회 사역도 감림산 기도원의 화요철야 구국기도회와 신년축복성회, 여름특별집회를 인도하도록 감림산 기도원 강단에 세워주시고 기도로 후원해주시면서 일찍부터 훈련하여 주신 이옥란 원장님의 작품입니다.”감림산 기도원은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3~5회의 산상축복성회가 열린다. 평일 집회에도 많이 모이지만 특히 화요일과 금요일은 부산 울산 대구 등지에서 많은 교인들이 버스를 대절하거나 승용차로 달려와 밤을 새며 기도한다. 실제로 감림산 기도원에 자주 다니는 교인들은 “감림산 기도원 강단에 서면 전국적으로 뜬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한다. 인천 도림사랑교회 김기학 목사는 감림산 기도원의 역할을 이렇게 말한다.“감림산은 인재양성 학교입니다. 우리 나라의 유명한 부흥강사는 감림산을 통해서 배출이 되었을 정도로 수많은 인재를 발굴해 낸 이 선지 동산이야말로 주님이 허락하신 믿음 학교의 등용문입니다.”2008년 8월 15일에 열린 감림산 기도원 40주년 기념 감사예배에는 CCC 총재 김준곤 목사와 한기총 대표 엄신형 목사가 영상축하메시지를 보내오고, 세계복음회협의회 대표 피종진 목사, 예장합동 총회장 최병남 목사, 서울 중앙성결교회 이만신 원로목사, 포항중앙교회 서임중 목사, 부산 호산나교회 최홍준 목사, 하이패밀리 대표 송길원 목사 등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대한민국에서 가장 복음화율이 낮은 곳이 바로 부산 경남지방이다. 이옥란 원장은 부산 경남지역에서도 가장 복음전파가 힘든 곳이 양산, 그 중에서 하북면일 것이라고 말했다. 감림산 기도원에서 작은 산자락을 하나 넘으면 불교문화의 발상지라는 통도사이고, 작은 개울 하나 건너면 승려 1000명이 성불했다는 천성산의 내원사가 자리하고 있다. 유명한 두 개의 사찰 사이에 기도원을 짓는 것은 무리라고 모두가 만류했다. 하지만 이옥란 원장은 길도 없던 첩첩산중에 오직 믿음 하나만 안고 들어갔다. 지금은 부산, 마산, 대구, 울산, 포항 등 어디서든 접근이 쉬운 교통의 요지가 되었지만 40년 전에는 인가라곤 없는 데다 밤이면 늑대들이 출몰하는 오지였다.무엇보다도 기도원에 올라가려면 냇물을 건너야 했는데 비가 조금만 오면 물이 넘쳐 흘러 접근할 수가 없었다. 1980년대 후반 복지재단을 설립하여 양로원을 운영할 때도 당국에서 주변에 인가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다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겨우 시멘트보가 들어섰지만 비가 조금만 많이 와도 무용지물이었다. 이제는 다리도 생기고 기도원 뜰 앞까지 차가 올라갈 수 있는 좁은 도로도 생겼다. 감림산 기도원은 5만여 평의 부지에 대성전(수용인원 1500명) 소성전(700명) 소집회실(15실) 세미나실(8실) 가족실(48실) 목양관(30실) 식당(500명 동시 수용 가능)으로 발전했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하루 평균 1000여명에 이르고 여름에는 6000여명이 찾아와 북적인다. 야영하며 기도할 수 있는 산기도처와 농구장과 족구장, 수영장 등 부대시설이 갖춰진 덕분이다. 감림산 기도원은 해마다 부산 경남지구 CCC 대학생들의 금식기도 집회로도 활용되고 있다. CCC총재 김준곤 목사는 “1000여명이 금식기도 할 장소는 감림산 기도원 밖에 없고, 영성의 코드가 맞아 학생들이 CCC 대학생 기도원처럼 이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호산나교회 최홍준 목사는 “감림산 기도원은 부산 교계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주말이면 많은 목회자들이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찾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많은 분들이 감림산 기도원을 ‘꽃다운 나이의 처녀가 40년을 기도로 만든 은혜의 동산’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워낙 첩첩산중이었던 데다 기도원이 자리하기 힘든 곳에 대규모 시설을 마련한 데 대한 경의의 표시이다.
▲ 이옥란 원장
이옥란 원장은 20대 때 일본유학과 선교사역을 준비하던 중 ‘황무지를 개척하라’는 강한 메시지를 받고 환상으로 본 현재의 장소에 기도원을 일구었다. 친분이 있던 몇몇 분들과 함께 진흙과 돌로 담을 쌓고 가마니로 문짝을 만들어 초막을 세운 것이 기도원의 출발이다. 초창기에는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허기를 때울 정도였다. 그동안 모략과 중상, 각종 협박 등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이 원장은 지난 40년 간 꿋꿋하게 영남지역에 기도의 불을 당겼다. 한동대학교 김영길 총장은 이옥란 원장을 “이 시대와 민족의 에스더이다. 연약한 한 여인을 모세의 지팡이로 사용하시어 기적을 이루셨고 지금도 이루어 가시는 크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라고 평했다. 이옥란 원장은 기도원 설립 초기부터 장병선교회를 창단하여 합동세례식을 지원하는 등 복음 전파에 발벗고 나섰다. 아울러 46개 농어촌 교회 돕는 사역과 교도소 선교를 펼치며 남몰래 학생들에게 장학금 지급하는 등 사역을 외부로 확대했다. 대개의 기도원이 찾아오는 성도들이 예배드리고 기도하면서 쉴 수 있도록 보살피는 데 그치지만 이옥란 원장은 찾아오는 성도를 수용하는 한편 밖으로 나가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동안의 고충을 이 원장은 이렇게 밝혔다.“외부 사역을 하다보니 기도원 시설을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요. 지금 건물들은 한 동씩 천천히 지은 겁니다. 아주 오랜 기간 걸려 완성한 것입니다. 심은 대로 주신다는 말씀대로, 밖의 일 한 것만큼 더 주셔서 오늘의 기도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1980년 일본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참석했던 이 원장은 일본의 첨단 복지시설과 제도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기보다 하나라도 배워야겠다고 생각에 유학을 결심했다. 일본에서 신학과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동안 수시로 한국에 와서 기도원 운영을 살피고 방학이면 해외에 나가 집회인도를 하면서 선교사들을 도왔다. 1986년에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이후 기도원은 한 단계 더 발전했다. ‘기도의 동산, 은혜의 동산, 응답의 동산, 말씀의 동산’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감림산 기도원은 성도들에게 기도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고자 애쓰고 있다. 특히 목사들이 금식기도를 하면서 영성을 새롭게 다지고, 목회 초년생들이 출발에 앞서 각오를 다지는 기도원으로 유명하다. 감림산 기도원에는 늘 목숨걸고 40일, 20일 금식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앞서간 목회자들이 기도를 쌓아 놓은 동산으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아울러 세계선교, 인재양성, 복지사역 등의 사역을 지속적이면서 체계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감림산 기도원은 독창적인 자체 프로그램으로 수많은 사역자와 선교 일꾼들을 배출시켜왔다. 매년 두 차례씩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청소년 오병이어 캠프와 초등학생을 위한 주니어 오병이어 캠프, 매년 여름에 열리는 영어캠프 등이 있다. 오병이어 캠프로 수많은 학생들이 변화를 받고 있으며 영어캠프는 미국에서 15명의 강사를 초빙하여 현장감 있는 교육을 하고, 캠프가 끝나면 수강생들이 해외 선교를 떠나 배운 영어를 활용할 기회를 갖는다. 감림산 기도원에서 매월 한 번씩, 3박 4일 일정으로 실시하는 영성훈련으로 많은 사람이 변화받았다. 특히 영성훈련은 해외선교지까지 전파되어 큰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매년 1~2회 여교역자와 사모들을 위한 세미나, 목회자 부부세미나도 실시하고 있다. 1987년에 사회복지법인 혜성복지재단 개원한 이래로 이옥란 원장은 섬김의 사역을 실천하고 있다. 현재 혜성양로원은 40여명의 어르신이 생활하고 있으며 혜성장학회를 통해 30여명의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고 있다.1998년에 설립한 하얀사랑선교회는 해외선교와 해외장학사업을 하고 있다. 그동안 여러 이름의 선교회를 만들어 각각 사역하던 것을 하얀사랑선교회라는 이름 아래 결집한 것이다. 현재 23개국의 선교사와 연계하여 현지에 나가 영성세미나, 대형집회, 봉사활동 등을 실시한다. 해외 선교를 갈 때는 평균 30~40명의 평신도들이 자비량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원장과 동행한 목회자들은 집회를 인도하고 평신도들은 찬양사역과 함께 봉사활동을 펼친다.
▲ 오병이어 주니어캠프 참석자들
선교를 떠나기 전에 하는 일은 현지에서 필요한 물품을 국내에서 수집하는 일이다. 해외에서 가장 환영하는 물건은 의류와 신발, 그 외 다양한 생필품이라고 한다. 주로 기도원에 오는 성도들에게 광고를 하여 물건을 모으는데 이제는 소문이 나서 전국에서 이월상품을 기증하겠다는 분들이 먼저 연락을 하기도 한다. 동대문 시장에서 신발 도매하시는 분이 1,500켤레를 희사한 적도 있다. 누가 재고물품을 주겠다는 말만 하면 이 원장은 전국 어디든 가서 그 물건을 받아 온다. 그렇게 모아서 싣고 간 물건은 가난한 나라에서 선교할 때 아주 유용한 전도도구가 된다. 컨테이너로 물건을 실어 보내고도 선교대원 1인당 10㎏이상씩 짐을 갖고 출국할 정도 모두가 열성적이다. 엄청난 자연재해를 입은 국가에 위문품을 컨테이너로 실어보내는 일도 거르지 않는다. 이 원장은 힘든 사역을 하는 데도 나날이 힘이 난다고 한다.“정성을 넘어서서 극성이지요. 선교 떠날 때는 짐이 많다며 공항 직원들이 짐 값을 더 내라고 해서 설움받은 일도 많아요.”3년 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150쌍의 합동결혼식을 거행했는데 큰 장소가 없어서 3군데에서 분산 결혼식을 했다. 신랑 신부 가족과 축하객까지 많은 인원이 모이기 때문에 결혼식은 전도를 하기 좋은 기회라고 한다. 신부는 웨딩드레스, 신랑은 흰색셔츠와 바지에다 모자를 쓰고 결혼식을 했는데 신랑예복은 기념으로 전달하고 웨딩드레스는 다른 결혼식 때 재활용한다. 결혼식을 할 때는 한국에서 예복은 물론 예물교환 할 반지 시계 귀고리 목걸이까지 모두 준비해 갖고 가야 한다. 그럴 때면 25명의 기도원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합동결혼식은 주로 원주민선교사들에게 주례를 맡기는데, 이는 지속적인 전도를 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한다. 중앙아시아 쪽 선교는 고려인들을 위한 위로회도 겸한다고 한다. 고려인들의 평생소원은 한국을 방문하는 일이다. 4년 전 키르키즈스탄의 고려인들을 초청하여 포스코와 현대자동차 견학과 경주 여행 등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이옥란 원장은 중국 선교가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1980년대부터 기도로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중국인들이 사이판 생산현장에 많이 진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사이판으로 가서 중국인들을 위한 세미나를 실시할 정도로 앞서갔다. 그때 뿌린 씨앗이 지금 많은 결실을 거두고 있다. 이옥란 원장은 몇 군데 해외 신학교의 이사장을 맡아 원주민 선교사 배출에도 힘쓰고 있다.감림산 기도원 이병우 기획실장은 이옥란 원장을 “독신으로 살면서 생애 전부를 복음 위해 바치는 분”이라고 소개했다.“같이 외출할 때보면 캔커피 하나 안 드십니다. 선교를 위해서는 수천만 원을 결재하시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몇 백 원도 아끼시죠. 한 번은 어떤 분이 밍크코트를 선물했는데 철야기도에 오신 가난한 할머니에게 벗어드렸어요. 물질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는 분이에요. 변변한 정장 한 벌 없어서 중요한 자리에 격을 못 갖추고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기도원이면 기사가 좋은 승용차로 모실 만하지요. 티코 한 대 없이 지냈는데 얼마전 원장님 조카가 외국으로 가면서 자신이 타던 카니발을 기도원에 놓고 갔어요. 요즘 우리 직원들이 운전하는 그 카니발을 타고 다니십니다.”늘 활기가 넘치는 이옥란 원장은 언제까지든 사역을 계속 할 것이라고 했다.“건강을 주실 때까지 할 생각입니다. 새로운 사역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벅찹니다. 바울 선생이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하셨는데 저도 그 삶을 닮고 싶습니다.”#이근미 편집위원·자유기고가 gosus@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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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용집사 2018-07-27 10: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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