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콘’‘웃찾사’ 원조 심현섭
‘개콘’‘웃찾사’ 원조 심현섭
  • 미래한국
  • 승인 2009.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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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통해 노정권 이후 사라진 시사코미디 부활 볼 수 있을까
▲ 심현섭 씨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는 낙선했고, 심현섭 씨는 최고의 개그맨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는 그 이전에 전혀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라고 했다.“일본·미국은 웃긴다고 생각하면 상상을 바로 무대로 옮겨요. 제약이 없으니까요. 우리는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해당 단체에서 항의 올 걸 먼저 걱정합니다” 딱 10년 전 이상한 주문을 외우며 개그계를 평정했던 ‘사바나의 추장’ 심현섭 씨. 8년여의 무명생활을 접고 4년 간 초절정 인기를 누린 그가 어느 날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당연히 ‘상태’가 좋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얼굴이 상했다가 원상복귀 되었어요. 한때 공황장애와 대인기피증이 생겨 목욕탕에도 못 갔습니다. 전화로 안 좋은 얘기하신 분도 있고, 광주 가는 비행기를 타면 ‘뭣한다고 그랬냐’며 노골적으로 야단치는 분도 있었어요. 스트레스는 별로 없었는데 자꾸 물어보시니까 거기에 사람이 가더군요. ‘왜 TV에 안 나오냐’고 묻고는 꼭 ‘코미디나 하지…’라고 말씀하시니까요.”‘심현섭’하면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있다.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숨진 민정당 심상우 의원의 아들,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가 추락한 연예인’이 그것이다. 필자는 2002년 대통령선거 전날 명동에서 심현섭 씨를 직접 봤다. 한 블록을 사이에 두고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가 대중 앞에서 마지막 연설을 하던 그 순간, 지지를 호소하며 이회창 후보를 소개했던 인물이 바로 심현섭 씨다. 당시 그는 이 후보와 전국을 순회하면서 TV지지 연설을 했다.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는 낙선했고, 심현섭 씨는 최고의 개그맨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는 그 이전에 전혀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라고 했다.“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제가 이어가기 위해 나선 것으로 오해하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 쪽으로 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제가 뭘 알아야 정치를 하죠. 정치는 정치를 아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명세를 이용해 정치해볼까, 그건 아닌 것 같아요.”그의 아버지는 광주항쟁 직후 광주에서 민정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보기 드문 기록을 남겼다. “인덕이 있으셔서 당선되셨을 겁니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만큼 저에게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죠. 하지만 누구 아들로 알려진 만큼 조심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남들이 자신을 ‘보수 우파’라고 규정했을 뿐 자신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이회창 대표님을 뵙기 전에 보수 진보, 좌파 우파에 대해 잘 몰랐어요. 선거 때 각 지방의 득표율을 보면서 지역감정에 대해 생각해보는 정도였죠. 그 분이 당선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그 분을 지지한 것뿐입니다. 아버님이 민정당 출신이니 얼기설기 얽혀서 제가 우파 인물로 보인 거죠.”자의든 타의든 ‘보수 우파’로 찍힌 그에게 보수에 대한 견해를 묻자 “어려운 질문”이라며 즉답을 피했다.“대중 앞에 서는 사람이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연한 구설수가 굉장히 많은 팔자라고 합니다. 제 의사와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고 누가 그러더군요.”심현섭 씨는 2008년 대선 때 이명박 캠프에 잠깐 참여했다고 한다. 2002년 이회창 캠프 때 일했던 사람들의 요청이 있어서 합류했는데, 얼마 후 이회창 후보가 출마를 선언하자 바로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이회창 캠프로 옮겨간 것도 아니다. 예전에 지지했던 분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앞으로 친한 친구가 출마하여 지원을 요청한다 해도 나서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또다시 영향 받을까봐 몸 사리거나 그런 차원이 아니에요. 가만히 있어도 저는 이미 꼬리표가 따라다니는데요 뭐. 그리고 정치인들은 현재 인기 있는 사람을 부릅니다. 제가 나선다고 도움되는 것도 아닐 거구요.”그에게 광우병 쇠고기 사태에 대해 물었을 때 “난 돼지고기를 좋아한다”며 웃었다. 구설에 오를 지도 모를 민감한 사안을 재치 있게 받아넘기기까지 그는 고생을 많이 했다.
▲ 1999년 KBS TV 개그콘서트 봉숭아학당에서 맹구 역할을 했던 심현섭씨
1999년 KBS TV 개그콘서트 창단 주역인 그는 ‘사바나의 추장’ ‘맹구’ 등으로 인기몰이를 하며 4년여 동안 최정상의 인기를 누렸다.“무명생활을 할 때는 힘들었지만 희망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죠. 아이러닉하게도 정상에 서니 불안하면서 우울증이 오더군요. 정상에 선 기분은 ‘머리채를 잡혀 끌려 다니는 느낌’ 같은 거예요. 차라리 무명 시절이 없었으면 그런 생각을 안 했을 겁니다. 다시 무명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더 열심히 한 부분도 있었어요.” 최정상이라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사인회를 하고, 내가 나온 방송을 모니터하고, CF를 찍을 때도 잘 몰라요. 어느 순간 모자를 쓰고 다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깨닫습니다. 섭외전화가 하루에 100통 이상 올 때 실감이 나는 거죠. 8년을 무명으로 지냈으니 10년은 정상을 지켜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4년 만에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마약을 했거나 범법행위를 하지 않고 그렇게 된 예는 없어요.”대선을 사흘 앞두고 KBS 고위 간부가 그에게 “연말 KBS 연예대상 코미디 부문 최우수상 수상자로 결정됐다”고 통고했다. 하지만 대선에서 이 후보가 낙선한 후 열린 시상식에서는 ‘심현섭’은 호명되지 않았다. 그러자 소속사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전격적으로 SBS로 이적을 결정했다. 바로 다음 주에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웃찾사)에 출연했고, 준비없이 무대에 섰으니 추락은 불을 보듯 뻔했다. 9개월 동안 출연했지만 그가 웃찾사 창단 멤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로부터 그를 부르는 방송사는 없었다. 낙천적인 성격인데다 운명론을 믿는 그는 힘든 상황을 묵묵히 견뎌냈다. 자살하는 연예인을 볼 때면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군대도 이병 일병 때 탈영을 많이 합니다. 상병이나 병장은 탈영을 안 해요. 저는 삼십대 중반에 그런 일을 겪어서 견뎌낼 수 있었죠. 젊은 친구들에게 힘든 일이 있어도 인내를 갖고 이겨내라고 말하고 싶어요.”정상에서 내려선 그에게 때로는 참기 힘든 제안도 있었다. “지금 할 일이 없으니 싼값에 데려다 쓸 수 있겠다, 생각하시는 분들이 간간이 연락을 주셨어요. 시골 5일장에서 장기간 사회를 봐줄 수 있느냐부터 시작하여 신인들이 주로 하는 아침 프로그램의 야외 리포터 같은 거, 케이블 방송 등에서 섭외가 있었어요. 무명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저를 찾아주시는 것에 감사했죠.”쉬는 동안 뮤지컬 ‘넌센스’에서 신부 역할로 출연했고 인기드라마 ‘파리의 연인’에도 출연했다. 50명의 성대모사라는 ‘개인기’를 보유한 그를 라디오에서도 간간이 불렀다. 가끔 선을 보기도 했다.“한창 바쁠 때는 선볼 시간이 없었어요. 선볼 때 여자분이 ‘뭐하세요’라고 물어요. 그건 ‘뭐 먹고 사세요’라는 말이거든요. TV에 나오던 사람이 안보이면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나 봐요. 설득할 말도 없고 해서 선보는 걸 그만두었어요. 곧 마흔인데 이제 결혼해야죠. 그저 마음 맞는 사람이면 돼요.”그는 2년 전부터 드라마 제작사 ‘스타맥스’에서 이사로 일하고 있다. 기획과 마케팅을 맡고 있는데 ‘아쉬운 소리’도 해야 하는 입장이라 배우는 게 많다고 한다.지금 SBS에서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는 드라마가 모두 스타맥스 작품이다. 시청률 40%대의 <아내의 유혹>과 시청률 30%대의 <가문의 영광>, 시청률 16%인 아침드라마 <순결한 당신>이 그것이다. 그는 마침 맞는 캐릭터가 있어 <가문에 영광>에 직접 출연하고 있다. 히트 드라마를 3개나 방영하고 있지만 요즘 드라마 제작 현장이 어렵다고 한다. 드라마 제작사에서 숨은 재능을 발휘하고 있지만 그의 관심은 늘 코미디에 있다. “개그를 하고 싶지 않나, 시사코미디가 어울릴 거 같다”는 둥 계속 분위기를 띄우자 그가 입을 열었다.“개그는 트렌드를 놓치면 힘들어요. 요즘 개그맨 수명이 3개월입니다. 인터넷 때문에 쉽게 식상하는 게 문제입니다. 네티즌들이 직접 재미 있는 UCC를 만드는 세상이니까요. 시사코미디를 하고 싶은데 노무현 정권 때 시사코미디가 사라졌습니다. 시사라고 하면 정치 쪽만 생각하는데 소프트한 아이템이 많아요. 정권이 바뀌니까 주변에서 ‘너 잘 되겠다, 이제 다시 꽃피겠다’고들 하더군요. 그건 그 분들 생각이고 아직 별다른 요청이 없습니다. 어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시사코미디가 부활하길 기대합니다.”요즘 개그는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개그맨들이 많이 고민하는 사안입니다. 그걸 고민한다는 건 대한민국에서 코미디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일본이나 미국은 웃긴다고 생각하면 상상을 바로 무대로 옮겨요. 제약이 없으니까요. 우리는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해당 단체에서 항의 올 걸 먼저 걱정합니다. 그런 부분이 답답하죠.”아직 섭외가 오진 않았지만 그는 항상 준비하는 자세로 살고 있다. “실시간 이슈 검색어에 개그맨 후배 이름이 뜨면 클릭해서 봅니다. 잘하는 후배들의 기사를 읽을 때면 저도 하고 싶지요. WBC 결승전에서 일본선수가 우리선수 발목 잡는 거 보는데 개그가 막 떠오르더군요. 조지마, 다나카, 가타오케 선수가 있던데 이름만 갖고도 일본 선수들을 희화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구설수를 의식해서인지 짧게 답변하던 그가 코미디를 논할 때는 눈을 반짝이며 길게 얘기했다. 요즘도 개그콘서트를 같이 했던 박준형, 정종철, 김준호, 강성범 씨 등과 자주 만난다고 한다. “지금 공중파 3사가 다 공개코미디를 하는데 한 방송사 정도는 모험을 해서 비공개 코미디를 했으면 해요. ‘웃으면 복이 와요’ 같은 프로그램을 하면 좋잖아요.”개그 콘서트 직전에 출연했던 KBS ‘시사파일 코미디 터치’라는 프로그램이 좋았다는 그는 언젠가 시사코미디를 꼭 하고 싶다고 했다. “초조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시사코미디는 연륜이 있으면 더 잘할 수 있으니까요. 40~50대가 하는 게 어울린다고 봐요.”내년이면 마흔이 되는 그는 자신을 “코미디를 다시 하고 싶은 개그맨일 뿐”이라고 규정했다.#이근미 편집위원·소설가 www.rootlee.com사진·정호정 인턴기자 beckham7k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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