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카타콤(지하교회)’ 존재 확인
북한 ‘카타콤(지하교회)’ 존재 확인
  • 미래한국
  • 승인 2009.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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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2006년 북한 내 순교자 77명”
▲ 북한지역 모처에서 드려진 지하교회 예배 장면
미 풀러신학대 박사논문 밝혀북한에서도 진정한 종교 활동이 가능할까? 기독교의 경우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이 남한 교회들의 지원을 받아 세운 위장기관인 봉수교회와 칠골교회를 제외하고는 표면상 교회란 없어 보인다.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지하교회가 북한 내 소수 실제 존재하고 있다는 소식이 탈북민들의 증언을 통해 간간히 전해져 오긴 했지만 공신력 있는 자료를 통해 밝혀진 내용은 거의 없었다. 최근 미국 풀러신학대에 제출된 박사논문이 북한 지하교회에 관한 주제와 구체적 통계를 다루고 있어 주목된다. 이반석 목사(모퉁이돌선교회)가 금년 5월 이 대학에서 수여할 박사학위 논문 ‘북한 지하교회에 대한 선교학적 이해’는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북한 내 교회와 목회자들의 실상을 다루고 있다. 이 목사는 논문에서 1945년 해방 이후 김일성정권의 기독교 탄압이 노골화될 때부터 2006년까지 북한에서 순교한 목사들이 밝혀진 것만 354명이 되는 것으로 집계했다. 해방 전후와 6·25 전쟁 중 대부분의 북한지역 목회자들은 남하했는데 순교한 이들은 대부분 교회를 지키기 위해 떠나지 않고 남은 이들이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목회자들까지 고려한다면 순교한 목회자들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김일성은 1971년 한 일본 언론인(미노베 기자)을 만나 “북조선에서 모든 교회는 사라졌다”고 말한 바 있다고 한다. 북한교회의 목회자들을 철저히 색출해 모조리 처형했다는 고백인 것이다. 하지만 논문은 그 시점 이후에도 일부 목회자들이 지하교회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드물기는 하지만 일부는 현재까지도 생존해 북한교회의 재건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한다. 논문은 이들의 신분이 공개돼 처형당하는 일이 최근에도 일어나고 있다면서 이들의 안전을 위해 구체적 기술은 삼가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논문에 의하면 1995년부터 2006년 사이 목회자의 신분이 밝혀져 처형된 이들은 77명에 달하며 이중 4명은 목사로 밝혀졌다. 논문을 통해 밝혀진 순교사례들하나. 2,000명 규모 지하교회 사건 이 목사의 박사논문은 또한 북한에서 발생한 기독교박해사건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지하교회 사건은 1957년에 발생한 이만화 목사와 교인들의 순교사건이다. 평안북도 용천군 지역에서 교인 2,000여명이 참석하는 지하교회를 이끈 이만화 목사는 10여개의 협동농장에서 500여개의 구역회를 조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김일성정권 당국에 노출된 것은 1957년 8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선거가 있던 날이었다. 이만화 목사는 교인들에게 기독교를 박해하는 김일성을 지지하는 투표에 참석하지 말라고 독려했고 이에 교인들은 투표장에는 갔지만 투표용지를 투표함(흑백함)에 넣지 않았다. 하지만 투표함에서 나온 투표용지와 유권자 숫자가 2000표가 차이가 나는 것을 알게 된 사회안전원들이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판단해 평안북도 용천군 일대를 집중하여 수색했다. 비밀경찰 200여명과 중앙당 집중지도반 500여명이 용천지역을 급습하여 가택과 농장 등을 샅샅이 조사했고 때마침 주일예배를 드리던 두 가정이 사회안전원들에게 들켜 체포되자 이만화 목사가 자진 출두해 지하교회의 실상이 드러나게 됐다. 이만화 목사는 주민들을 한 사람씩 은밀히 전도해 오랜 시간에 걸쳐 교인들을 양성했다고 한다. 가정예배를 드리다 발각된 두 가정의 가족들은 혹독한 고문 끝에 지하교회의 실상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고 이때 산악의 토굴과 숯가마 등을 이용해 예배를 인도하던 교회 지도자 130여명이 검거됐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이만화 목사를 비롯한 36명이 총살당하고 나머지는 수용소로 유배를 가거나 감옥으로 간 것으로 밝혀졌다. 둘. 평북 ‘카타콤’ 사건 종교탄압을 피해 지하동굴에서 생활했던 로마시대의 ‘카타콤’ 비화는 이미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다. 북한 사회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 것이 로마시대의 카타콤과 같은 고립무원의 삶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으로 드러났다. 1966년 평안북도 박천군 상추리에서는 야산의 한 토굴에서 13명의 지하교인들이 발각돼 체포된 후 곧바로 처형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머리털과 수염도 깎지 못한 채 짐승처럼 살았고 5년 동안 계속된 토굴 기도생활에 무릎이 쪼그라들어 잘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전에 김 목사라는 이를 지도자로 따랐는데 1961년 김 목사가 체포된 후 모두 행방불명됐다가 5년 만에 토굴에서 발견됐던 것이다. 이들은 박천군 중남리, 청룡리, 청산리 등에 거주했으며 김 목사가 전도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김 목사가 처형된 후 그가 전도한 신자들은 대부분 체포돼 수용소로 보내졌지만 이들 가운데 13명이 남아 토굴 속에서 살며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것이다. 셋. 평양 하수구 지하교인 사건 또 다른 카타콤 사례는 이듬해인 1967년에 드러났다. 그해 9월경 평양 일대에 큰 홍수가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수년간 평양의 지하 하수구에서 살아온 기독교인 집단이 발각되는 일이 발생했다. 평양 시내가 홍수로 침수되자 종교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었던 기독교인들이 지상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는데 이들의 행색을 이상히 여긴 북한 경비정에 의해 모두 체포됐다. 당시 평양에 살던 탈북민 이민복 씨(자유북한인연합 대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10살 때인데 대동강이 범람해 둑이 터지면서 아파트 아래층에 잉어가 들어와 잡힐 정도로 온통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이때 6·25전쟁 때부터 20년 가까이 하수도 속에 숨어 있던 ‘악질 반동들’이 나타났는데 햇볕을 못 봐 얼굴은 창백하고 머리도 치렁치렁 길게 늘어진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지하에 살던 기독교인들로 밝혀졌고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저주하며 살려 달라고 당 앞에 빌 줄 알았는데 하늘을 우러러 하나같이 초연하게 죽음을 맞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넷. 평남 120명 처형 ‘박 목사’ 사건 1968년 6월에는 평안남도 온천군 운하리에서 세칭 ‘박 목사 사건’이 발생했다. 이 동네에서는 유언비어가 자주 퍼지고 김일성 초상화가 없어지는 일도 일어났다. 이에 사회안전원들이 밤낮으로 감시한 끝에 이 지역으로 강제 전출된 개성 출신 이주민들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범인으로 단정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한 가운데 박 씨라는 사람을 이주민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국은 아무 증거도 없이 그에게 반동불순분자라는 누명을 씌워 함경북도의 집단수용소로 보내는 조치가 취했는데 이삿짐을 꾸리는 과정에서 숨겨둔 성경책과 찬송가가 노출됐다고 한다. 땅 속에 묻어 두었던 책을 몰래 파내 짐 속에 넣으려다가 발각된 것이다.보위부는 이를 단서로 고문을 가했고 결과적으로 그가 목사이며 그의 지도 아래 적어도 10년 이상 운영되어온 비밀 지하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120여명의 성도들도 함께 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모두 처형을 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다섯. 함흥시 지하교회 사건 탈북민 이영선 씨의 증언에 의하면 1974년 10월 함흥시 만세교에서 처형된 김태용 목사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 목사는 함흥시 반룡구역 용마동 지역에 해방 전부터 있었던 한 옛날 교회의 지하실에 비밀스럽게 지하교회를 꾸미고 오랫동안 예배를 드렸다. 김 목사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한 사람씩 전도한 성도들이 모여 작은 교회를 형성했다. 이들이 발각되어 체포되었을 때 이 지하교회 교인들은 모두 36명이었고 18세부터 78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모이던 교회건물은 전쟁 중에 폭격에 의해 파괴돼 지하실 입구가 막혀 있어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다. 교회가 서 있던 그 자리를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건물 구조를 잘 알고 있었던 김태용 목사가 교인들을 동원해 지하실을 수리하여 교회로 꾸몄다고 한다. 이 지하교회는 20년이 넘도록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남북한 대표가 서로 왕래하면서 회담을 갖게 되자 김일성이 주택지 재개발을 시작했고 그때 미처 위장을 하지 못한 지하실 교회가 탄로 난 것이다. 이때 김 목사는 돌보고 있던 36명의 성도들과 함께 모두 사회안전원에 체포됐고 얼마 뒤 함흥시 만세교 다리 아래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여섯. 1996년 함경남도 기독교 사건 함경도를 중심으로 40년 이상 지하교회를 지켜온 목사도 있었다. 이름은 이윤심 목사. 함경남도 금야군 병원에 양의사로 재직하던 탈북민 최주혁 씨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이 목사는 만성위장염으로 치료를 받으러왔다가 나중에 의사인 자신에게도 복음을 전해 신자가 되었다고 했다. 이 목사의 아버지도 목사였는데 해방 전 세워진 ‘칠골교회’에서 강량욱(1904~1983·북한 국가부주석)과 목사생활을 같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 군정 당시 강량욱은 김일성과 함께 기독교를 배교하고 이 목사의 아버지를 잡아 총살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이 목사는 일생을 공산주의에 대한 원망을 품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가 전도하고 지도한 지하교인들은 대부분 북한의 엘리트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 목사는 40년 이상을 은밀히 목회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결국 1996년 10월 함경남도 금야군 용남리에서 보위부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흔히 알려진 ‘1996년 함경남도 기독교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는데 그때 그와 영향을 미치던 교인의 숫자가 함경남북도, 평안남북도, 황해남도, 자강도까지 약 180명 정도에 이르렀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가 키워낸 교인들은 현재도 존재하고 있으며 북한교회의 신앙의 맥을 지켜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창범 편집위원·북한구원운동 사무처장 cbkim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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