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옥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 한국교회 여성계 거목, 40년간 국내최대 여성조직 이끌어
이연옥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 한국교회 여성계 거목, 40년간 국내최대 여성조직 이끌어
  • 김범수 발행인
  • 승인 2009.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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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 이연옥 여전도회전국연합회 명예회장
   
 
  ▲ 이연옥 여전도회전국연합회 명예회장  
 

이연옥 여전도회전국연합회(이하 연합회) 명예회장은 한국교회 현대사의 산 증인이자 여성계와 교육계의 거목이다.

올해로 설립 111년째를 맞는 연합회는 규모만으로도 전국 7,500여개 교회(통합)의 여전도회 130만 회원이 속해 있는 국내 최대의 여성조직으로 꼽힌다. 교회 내에서는 물론 우리 사회와 각 가정에서 여성이 지닌 숨은 실력과 대다수 여성회원들의 각별한 참여도를 고려할 때 연합회의 실제적 영향력은 종교계를 뛰어넘어 정치사회 각 분야에서 그 어떤 조직보다도 방대하다고 할 수 있다. 크고 작은 정치인이나 각계 전문가들이 선거철은 물론 평상시에도 연합회가 주최하는 행사라면 앞다퉈 달려오는 건 그러한 영향력을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한국>은 지난 4월 16일 오후 서울 종로5가에 위치한 여전도회관건물 8층 명예회장실에서 이 회장을 만나 지난 40여년간 변함없이 연합회를 이끌어온 그의 ‘역사’에 대해 들어보았다.



연합회는 1898년 설립 이후 홍기숙 현 회장과 김희원 사무처장 등 역대 28명의 회장이 거쳐 갔지만 ‘맏언니’ 이 명예회장의 카리스마와 조직 내 리더십은 단연 독보적이다. 감히 비교하자면 고 김수환 추기경의 카톨릭 내 생전 위치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회장은 또한 현재 정의학원(서울여대)과 경민학원, 한국성서학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며 정신여중고 교장, 한국교회 여성문제 연구소 이사장, 여전도회 장학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의 수많은 여성 지도자를 키워왔고 여권신장과 한국교회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돼 국내외에서 4개의 명예박사 학위와 국민훈장 동백장 등 10여개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요즘도 매일 여전도회 사무실에 출근한다. 조카 가족과 함께 지내는 수유리에서 백운대와 도봉산을 매일 오르내리는 덕에 건강을 유지한다고 한다.

이 회장 이야기의 첫 마디는 “하나님이 평생에 걸쳐 만남의 복을 주셨다”는 고백이었다. 인생의 고비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러한 만남을 통해 본인의 재능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 인생을 살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좋은 친구들과 동료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남편을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신앙과 함께 일에 대한 성실함과 사람들을 연합하게 만드는 설득력, 과감한 결단력 등이 오늘날 이 회장을 만들었을 것이다. 인터뷰 내내 조용하고 겸손한 모습과 은연중 힘 있는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며 한 시대를 이끈 여성 지도자의 면모가 전해져 왔으며 강한 모성애적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다.

만남의 축복들
이 회장의 고향은 황해도 황주이다. 300여 호가 모여 비교적 부촌을 이루었던 연봉리에서 어머니, 두 여동생과 함께 스무 해를 넘게 살았다. 유교를 숭상하는 동네였지만 외지를 다니며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일찍이 개화 문명에 적응해 딸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이 회장은 친구들을 따라 대동리교회에 다녔고 신앙의 맛을 알게 되면서 장차 대학에서 성경을 연구해 가족들을 전도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평양신학대가 서울로 옮겨간 첫 해인 1948년 장로회신학대에 입학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당시 공산화된 북한 땅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생명조차 위협받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길이 다시는 고향에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곧이어 6·25전쟁이 일어났고 아버지는 서울에서 인민군에게 피살당했다. 어머니와 두 여동생은 고향집을 버리고 1·4후퇴 때 남으로 내려오면서 가족수난이 시작됐다.

 

   
 
     
 

이 회장은 전쟁 이후 장신대를 졸업하고 대학은사의 영향으로 미국유학을 준비하게 되면서 경북대 사학과에 편입했다. 졸업 후 서울 정신여중고 교목으로 일하게 됐고 여기서 인생의 스승인 김필례 정신여중고 교장을 만나게 된다. 김 교장은 일찍이 미국 콜럼비아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22년 YWCA를 창립한 현대 한국 초기의 여성 지도자였다.

이 회장은 일찍이 자신을 후임으로 점찍은 김 교장의 배려로 미국 리치몬드대에 유학을 가기로 됐으나 건강진단을 받는 과정에서 폐결핵이 발견돼 무산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이 사건으로 인한 실망과 좌절, 부끄러움은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폐결핵 증상이 거의 완치된 6개월 뒤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리치몬드대에서 전액장학금을 주는 입학허가가 떨어진 것이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큰돈인 매달 30달러의 생활비까지 준다는 조건이었다. 이 회장은 “이 사건을 통해 인생의 멈춤과 달려감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간섭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를 평생 교훈으로 삼게 됐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미국 리치몬드대와 노스캐롤라이나대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1965년 정신여중고 교장으로 부임했다.
교장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월요훈화’ 시간이었다고 한다. 이 회장은 매주 학생들에게 짧고 감동적으로 훈화를 전하려고 애썼다. 내용은 정신여고에 대한 긍지를 심어주고 동문 선배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켜 학생들이 인생 멘토를 찾게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이를 위해 매주 여성운동의 선구자와 민족과 국가를 살린 애국자, 복음을 전한 전도자 등 동문들을 학생들에게 소개했다. 그 가운데는 3·1운동 여성대표였던 4회 졸업생 ‘김마리아’도 있었다. 훈화는 반드시 “정신의 선배를 본받아 시시하게 살지 말라”는 주문으로 끝을 맺었다.

‘신여성’이 중심 된 여전도회 활동
여전도회와의 인연은 김필례 교장의 소개로 시작됐다. 당시 여전도회는 ‘신여성들’이 중심이었다. 이 회장은 “당시 선배들의 생각과 행동이 철저히 성경적이고 순종적이었다”고 회상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여전도회의 중심 과제 중 하나는 교회나 단체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이었다. 사방에서 돈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는데 그 만큼 도움을 절실히 기다리는 안타까운 일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때마다 여전도회원들은 십시일반으로 모금해 도움을 보내주곤 했다. 전국 교회 여전도회에서 일하는 이 나라의 많은 어머니들이 보내주는 헌신은 실로 아름다운 일이었다. 이 회장은 이러한 여전도회 활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에 앞장섰고 ‘여전도회 운영지침’, ‘여전도회학’, ‘여전도회100년사’ 등 자료집을 출간했다.

이 회장은 “나의 지도력은 주위에서 잘 한다고 자꾸 높여주니까 자연스럽게 솟아난 긍정적인 힘의 결과였습니다”고 설명했다.
“사실 나는 기도도 제대로 못해 망신당하는 사람이에요. 무척 소심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때마다 주위에서 불러주시니 일을 해야 했고 그때마다 좋은 결과가 나온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은혜였지요.”

이 회장은 또한 여전도회 활동을 통해 여성의 역할과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 회장은 먼저 교회의 민주화를 주창했다. 남성의 특성과 지위를 존중하는 것처럼 여성의 특성과 지위도 함께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민주화되는 실제적인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 교회가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여성들의 모성애를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드럽고 따뜻하며 포용적인 모성애 문화를 실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희생을 통해 이런 문화가 정립될 때 건강한 교회가 약속될 수 있으며 여성의 정체성이 살아나는 길이라고 했다. 모성애 문화가 살아나지 못한 교회의 여성들은 주눅이 들어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니까 여성이라는 단서를 붙이지 말고 교회 활동의 중심에 모성애 문화를 내세우라고 주문했다. 통합측 장로교 교단이 실천한 여성목회자 안수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 회장과 여전도회가 여러 해에 걸쳐 주장해 온 노력의 귀중한 결실이다.

여전도회는 교단이나 다른 기독단체와 연합하여 한국교회 발전에 이바지한 공훈이 지대하다.
첫째, 장로교 교단선교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교단적 차원의 재정협력과 선교사 파송에 많은 협력을 하면서 교단의 요구가 있으면 한 번도 거절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항상 교단과 원만한 관계를 이루며 조화와 연합을 주요한 미덕으로 삼았다고 한다.

둘째, 군선교에도 앞장서 많은 공을 세웠다. 애국하는 길, 국방을 강화하는 길에 군선교가 첩경이라는 생각으로 육·해·공군에 군목을 피송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고 또 군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헌신적이었다. 지금까지 65개의 국군교회를 세우는 일을 해왔다고 한다.

셋째, 서울대교회 설립에도 협력하는 등 대학선교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 최근에는 ‘리더십학교’ 개설에 앞장선 바 있으며 문화선교를 통해 대학을 바로세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1974년부터 ‘작은자선교회’ 사역을 시작하여 소년소녀가장 2,000여 명을 도와주었으며 독거노인, 장애자 등을 돕는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통일 지도자들 세우기 위한 소망
지난 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역시 가장 소중한 만남은 평생 존경하고 사랑했던 부군 고 임옥 목사(1999년 소천)와의 만남이었다. 영암교회를 담임했고 한기총 대표회장을 역임한 임 목사의 고매한 신앙과 성실한 인품을 바라보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임옥 목사는 완전한 원고로 설교 준비를 했는데 매주 설교는 곧바로 ‘영암의 강단’에 인쇄되어 배포되곤 했다.

이 회장도 남편 덕분에 완전한 원고를 준비해서 성경을 가르치는 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특히 임 목사는 영적 양식으로서 성경말씀과 음악을 좋아했는데 평생을 수집한 많은 음악자료와 CD를 통해 요즘도 사랑하는 남편을 추억한다고 했다.

남은 생을 살며 이 회장은 두 가지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영암교회를 위해 기도의 어머니로서 좋은 모델이 되기를 소망하고 둘째는 성숙한 여전도회가 될 수 있도록 교회마다 여성 당회원들이 증대되는 여성 운동이 현실화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북한을 해방시키고 남한을 자유민주국가로 발전시킬 수 있는 미래의 지도자를 세우는 일이다. 이 회장은 “누구보다 전국 교회의 어머니들이 나서서 나라의 어려움과 여러 과제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결코 무지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인터뷰/ 김범수 발행인

김창범 편집위원 cbkim47@hanmail.net
사진·이승재 객원기자 fotols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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