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형 한국논단 발행인 “한국논단은 10년간 ‘불온서적’이었다”
이도형 한국논단 발행인 “한국논단은 10년간 ‘불온서적’이었다”
  • 미래한국
  • 승인 2009.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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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도형 월간 한국논단 발행인
▲ 이도형 월간 한국논단 발행인

월간 ‘한국논단’이 오는 9월로 창간 20주년을 맞는다. 1987년 6·29 선언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시대를 열었지만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좌파적 가치관이 쏟아지면서 사상과 이념의 혼란과 대립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1989년 한국논단이 창간됐다. 사회 각계각층에 스며든 좌경 사상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의 국가체제를 지키자는 취지에서 ‘나라를 지키는 잡지’라는 기치를 들고 출범됐다.

한국논단의 창간과 발전의 중심에는 이도형 사장이 있다. 그는 육군 대위로 전역한 후 조선일보 기자로 출발해 논설위원(1985), 관훈클럽 총무(1986) 등을 역임했고 1989년 이후 지금까지 한국논단을 이끌어왔다.

한국논단은 짧은 기간 급성장했고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어느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매체파워를 지닌 중견 언론매체가 됐다. 1997년 대선 당시에는 주요 대선후보들을 초청해 토론회를 열고 이것이 KBS, MBC, SBS 등을 통해 생방송으로 방송되면서 화제를 쏟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 시절의 한국논단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지난 10년 좌파정권을 거치면서 그 영향력이 조금씩 줄어들어 온 것이 사실이다. <미래한국>은 지난 8월 초 서울 한 호텔 커피숍에서 이도형 사장을 만나 한국논단이 걸어온 길에 대해 들어봤다.

 
주문한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이도형 사장은 지난날의 격정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먼저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입니다만, 요즘 많은 사람들이 ‘한국논단’이라는 잡지를 적서(赤書)처럼 여겨요. 옛날에 적색잡지를 적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처럼 한국논단을 불온서적으로 인식한다는 겁니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한국논단을 본다고 연행된 사람까지 있었어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우파언론을 탄압하는 좌익세상이 되었단 말인가?

“저는 좌익이라는 말보다 ‘적색분자’라는 말을 씁니다. 적색분자라는 말은 선전선동에 능한 골수좌파를 가리키는 말인데, 그들의 머릿속이 빨갛게 물들었다는 말이에요. 오랜 반복교육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독재자들이 가장 신봉하는 수단이 바로 반복교육이거든요. 오래 반복하면 가짜도 진짜처럼 되니까요. 그런 적색분자들이 이 나라에 판치고 있습니다.”

탄압의 발단, ‘대통령후보 사상검증 토론회’

제15대 대통령선거를 눈앞에 둔 1997년 10월 8일 일개 월간지에 불과한 ‘한국논단’이 타워호텔에서 김종필, 김대중, 조순, 이인제, 이회창 등 다섯 명의 대선후보들을 초청하여 ‘대통령후보초청 사상검증 대토론회’를 개최해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TV에서 여러 모양의 후보초청 토론회가 열렸는데, 내가 볼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안보문제를 묻거나 대답하는 일이 없더군요. 그래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친미주의, 또 안보문제 이런 걸 중심으로 후보들한테 확인을 받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이날 토론회는 MBC, KBS, SBS 등 3대 지상파 방송들이 생중계에 나서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토론회로 말미암아 이도형 사장과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관계에 깊은 앙금이 생겼고 이 사장의 인생에 있어 고비를 맞게 했다.

김대중 후보는 당시 토론회에서 두 번째 연사로 등단했다. 공산주의자로 의심이 가게 하는 과거의 발언과 행적들을 놓고 김 후보의 사상에 대해 설왕설래가 나왔다. 그러나 김 후보는 자신에 대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신봉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임을 역설했다.

토론회 도중 김대중 후보의 거짓말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는데 당시 김 후보의 답변이 두고두고 세간의 화제가 됐다. 김대중 후보가 “나는 평생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대답했던 것.

이날 토론회 이후 김대중 후보 측은 분노했다. 자기 쪽에 호의적일 것으로 생각했던 이도형 사장이 ‘김 후보를 마치 초등학생을 다루듯 오만방자하게 대했다’는 것이 이유였고 그것은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이 사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원인이 되었다.

서울지방검찰청의 담당검사는 고발내용에 대해 구체성이 없어 범죄구성요건이 안 된다며 무혐의 처리했으나 김대중 정권하에서 3번이나 계속된 고소를 이길 수는 없었다. 담당검사는 전주지방검찰청으로 좌천됐고 이 사장은 2년 징역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억대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결국 집은 경매로 날아갔고 친구의 도움으로 전셋집에서 겨우 살아야 했다.

또한 당시 이회창 후보에 대한 질문 도중 “돈을 받아먹고 이름을 팔아먹는 시민단체들이 있다”며 경실련, 참여연대, 민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의 이름을 거론한 것이 화근이 돼 그들로부터도 억대 배상 고발이 들어와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

“최근에도 캐나다의 한 한인단체로부터 고발장이 날아 왔어요. 한국논단 2005년 5월호에 좌파를 비판하는 기사가 실렸는데 여기에 자신들의 단체가 거명돼 명예훼손이 됐다는 것입니다. 캐나다 변호사를 통해 벌금 150만 달러에 손해배상 10만 달러를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한국논단을 없애려는 좌파의 집요한 계획이 아니면 무엇 입니까.”

이처럼 한국논단은 지난 20년간 좌파세력의 공격목표가 돼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논단이 이념투쟁의 최선전에 있어 왔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이도형 사장의 소회를 들어보았다.

- 한국논단이 올 9월로 창간 20주년을 맞는데 감회가 어떤지요

“1989년 6월 창간 당시 기업인, 언론인, 학자 등이 주주로 참여했어요. 우리나라의 기존질서와 가치가 뒤집혔다는 점에 공감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정론지로서 한국논단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이나 일본의 산케이와 같은 보수언론으로 활동하기를 기대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 때 위기감이 20년이 지난 지금 더 심해졌다고 생각해요. 이른바 소명감이 더 깊어졌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좌익세력이 더 넓게 확산됐기 때문입니다. 전교조다, 민노총이다 해서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의 영향을 받는 이들이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습니다.”

- 지난 20년간 그토록 전력을 다해 싸워온 대상이 누구입니까?

“김대중, 노무현, 김정일 등으로부터 지령이나 영향을 받는 세력이었습니다. 1946년 9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는 단체가 발표한 ‘남한의 20개 좌익정당단체 구성원’이라는 자료를 보면 모두 797만 명이 그 구성원으로 등재돼 있어요. 당시 2,000만 명 인구로 볼 때 상당한 세력이었어요. 말하자면 그들이 모두 ‘빨갱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허수가 들어 있지요. 첫째는 농민회 소속 340만 명이 포함돼 있었는데 당시 그들 대부분은 문맹자였어요. 그들이 가입신청서를 냈을 리 만무한 것이지요. 또 재일조총련 120만 명도 허수입니다. 그만한 수의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이들을 제외해도 400만 명이라는 좌익세력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적들’

“해방 후 정부의 노력으로 이 가운데 140만 명이 전향한 것으로 돼 있지만 6·25가 발발하자 그들 대부분은 다시 좌익세력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전란 가운데 양민학살에 앞장선 ‘빨갱이’들입니다. 그 대표적 공산당 조직이 소위 보도연맹입니다. 김대중도 당시 보도연맹 소속이었지요. 전후 2개 세대가 지나가며 그 좌익세력은 1,200만 명으로 불어났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상당수는 정권이나 국가로부터 불이익을 받은 불만세력으로서 체제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역사 뒤집기에 앞장서 입법, 행정, 사법에 침투하여 대한민국을 없애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이유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싫고 대한민국이 망하기를 바라는 파괴주의자들이지요. 곧 대한민국의 적들입니다.”

- 그들(좌파)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해방 직후 미군 군정에 불만을 가졌거나 지주들에게 불만을 가진 세력입니다. 그들은 마르크스 레닌의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하여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단순한 현실 불만세력들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들을 조직적으로 흡수해 좌익사상을 집어넣은 것이지요. 앞서 얘기한 대로 반복교육을 통해 빨갱이를 만든 것입니다. 해방 직후 학교에서는 동맹휴학이란 것이 자주 있었는데,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그 대표적 불만세력들입니다. 이때 학도호국단이 조직되면서 그 불만세력들이 약화됐던 일을 기억합니다.”

-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는데, 어떠한 변화가 있었다고 평가하십니까

“좌익의 선전선동 수단인 지상파 방송을 아직도 정부가 장악하지 못하고 있어요. 미디어법이 통과되기는 했지만 누더기가 돼 그 효과는 두고 봐야 합니다. 또 수사기관인 경찰, 국정원, 기무사 속에 있어야 할 ‘적색분자’들을 색출해내는 기구가 없어졌어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국민 개인의 신원을 확보하고 있는 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좌파정권 10년 사이에 그러한 기능이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신원진술서 제도나 호적제도가 사라진 것은 국가체제를 관리하고 통솔할 근거가 사라진 것입니다.”

김대중의 자기 사람 만들기 수법

- 그동안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역시 앞서 얘기한 15대 대통령후보 초청 토론회지요. 그 외 김대중 씨에 대한 일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여러번 만나 교류도 나눴지만 이 사람처럼 똑똑하고 말을 잘하면서도 진실성이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김대중 씨는 대통령이 되기 전 아마도 나를 자기 사람으로 쓰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집요하게 그러한 접근이 있었지요. 예를 들어 대통령후보 초청 토론회에 나오기로 했을 때에는 당시 박지원 특보가 의외의 얘기를 했어요. 김대중 총재가 토론회에 나오면 내가 그에게 충성하기로 했다고 전했다는 거예요.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서 사람을 옭아 매는 수법이죠.

또 한 번은 관훈클럽 스태프들과 함께 김대중 총재와 식사를 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김 총재에게 ‘만약 집권하면 국방 장관은 어떤 사람을 세울 것인가’ 물었어요. 그런데 이후 ‘이도형이 김대중 내각에 국방 장관이 된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하루아침에 내가 김대중의 사람이 된 것이죠. 솔직히 누가 장관을 시켜준다는데 싫어하겠습니까. 김대중 씨의 머리를 당할 사람이 없어요. 이것이 김대중 씨의 사람 묶어놓기 수법입니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중심과 사상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는 원래부터 철저한 사회주의 신봉자입니다. 해방 후 20대 나이에 공산주의자 백남운이 대표로 있던 좌익정당인 조선신민당의 당원이 되었지요. 이 당은 나중에 남로당과 통합되면서 해체되었습니다. 6·25 때의 행적은 묘연합니다. 그 후 이념적으로 잠재돼 있다가 워낙 똑똑하고 말을 잘 하니까 1961년 정계 진출 수단으로 한민당에 입당해 활동을 시작했고 1971년에는 대통령 후보로 선거에 나서기까지 했지요. 그러나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일본, 미국 등지로 나가서 진보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다시 사회주의자로 거듭나게 되었지요.

김대중 씨는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정책에 관심이 많은 좌파 정치인입니다. 하지만 때와 장소에 따라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반공연설에도 아주 능합니다. 이념적 위장전술에 달인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궁극적 목표는 통일대통령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은 김정일이 대표하고 남한은 김대중이 대표하는 사회주의 체제를 한반도에 실현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통일대통령으로 등극하는 것이었겠지요.”

- 그렇다면 남북통일은 어떻게 이루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자유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헌법 제4조에 입각하여 통일이 되면 되는 것이지요. 자유민주주의를 따라야 합니다. 통일에 자유가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은 자유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북한에 김정일 체제가 있는 한, 자유통일은 어렵다고 봅니다. 60년을 버텨온 북한체제를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북한 지도부가 신념을 잃고 흔들리면 북한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독일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1989년 여름 동독이 무너질 때 수십만 명의 동독사람들이 이웃 나라로 탈출을 감행했는데 그때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과 같은 좋은 이웃들이 있었기에 난국을 잘 넘길 수 있었던 것이지요. 북한 붕괴 시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 대한민국의 앞날을 어떻게 예상하고 있습니까?

“희망적으로 내다보고 싶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하나의 과도정부입니다. 진짜 우파정부를 위해 교두보 역할을 하면 족하다는 생각입니다. 앞으로 우파정부가 들어서면 특별한 정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법대로만 다스리면 됩니다.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고 범법자는 법대로 잡아가두면 되는 것이지요. 제2연평해전에서 6명의 귀중한 우리 장병들이 숨졌고 평택의 미군기지 이전반대 시위에서는 무장해제를 당한 현역군인들이 시위대에 두들겨 맞았어요.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당시 대통령이 법집행을 중단시켰기 때문에 일어난 희생입니다. 법치가 마비된 나라가 어떻게 되는가를 잘 보여준 일이지요.”

“법대로만 하면 된다”

“김대중 같은 인물도 사전에 법대로 처리했으면 오늘과 같은 후환이 없었을 것입니다. 1997년에 당시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DJ가 비자금 670억 원을 조성하여 62억 원을 불법 실명 전환했다’고 폭로한 바 있어요. 이때 김영삼 정부는 곧바로 수사를 했어야 해요. 그런데 수사중단을 검찰총장에게 지시했었지요. 참 딱한 일입니다. 김대중 측이 ‘만약 검찰이 수사를 강행하면 대선은 없어지고 민란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며 협박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서 정치보복이 가해졌고 권영해 전 안기부장을 비롯해 10여 명의 안보전문가들이 북풍조작사건으로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고 또 김대중 비자금과 관련해 실향민들이 세운 동화은행이 문을 닫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었습니다.”

- 한국논단이나 이 사장이 ‘극우 아니냐’는 일각의 목소리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극우의 가장 큰 특징은 폭력에 있어요. 극우단체들의 특징이 폭력을 행사한다는 점이지요. 미국의 KKK단이나 독일의 히틀러, 일본의 군국주의 단체 등이 그렇지요. 그런데 내가 개인적으로 누구에게 폭력을 행사한 일이 있습니까? 내가 왜 극우입니까? 나는 붓으로 공산주의에 반대할 뿐이지요. 나는 언론인이고 보수주의자일 뿐입니다.”

- 많이 어려우실 텐데 한국논단 운영은 어떻게 하십니까?

“좌파 매체들은 지난 10년간 호황이었습니다. 모 온라인 뉴스매체는 하루 광고수입이 2억5,000만 원에 달한다는 얘기도 듣습니다. 좌파매체에 대해서는 기업들이 돈을 퍼붓다시피 해요. 내가 아는 어떤 기업은 규모가 큰데도 한국논단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겁니다. 세무조사가 들어오기 때문이라는 것이에요. 소위 좌파 끄나풀들이 큰 기업마다 다 들어가 있어요. 이들이 우파 매체로 들어가는 광고비를 감시한다고 봐야 해요. 그러니 광고 영업을 하기가 아주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래서 한국논단은 현재 거의 혼자서 영업하고 편집하고 있습니다. 인적으로나 물적으로 어렵지요. 정상적인 광고 영업이 하루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도형 사장은 작년 ‘이도형의 자전적 현대사 비판’이라는 부제가 붙은 ‘조선인 한국인 비한국인’이라는 책을 냈다. 그는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나는 자유인이다. 자유인이고 싶다. 나는 모든 조직으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한다”고 썼다.

자유에 대한 그의 갈망은 개인적 소망이라기보다는 이 나라, 이 민족을 향한 양심적 갈구가 아닐까. 이 사장은 향후 계획에 대해 묻자 “한국논단을 젊은 언론인에게 맡겨두고 진정한 인생의 자유를 누리고 싶다”고 했다.#

김창범 편집위원 cbkim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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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23 04:43:28
뭔소리를 하는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