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플로 74, 아스팔트 열기 이긴 158만 명 대집회
엑스플로 74, 아스팔트 열기 이긴 158만 명 대집회
  • 미래한국
  • 승인 2009.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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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움직인 기도-엑스플로74
▲ 서울 여의도 5·16 광장(현 여의도 공원)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부도 허가를 내주지 않을 것이고, 재정은 또 어떻게 충당합니까? 더구나 30만 명이 모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1973년 8월 경기도 기독교태화사회관.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선교회(CCC) 간사들은 1972년 미국 달라스에서 열린 Explo72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한국에서 30만 명이 모이는 Explo74를 개최하겠다고 공언한 김준곤 목사(CCC 대표)에게 반대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김 목사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민족복음화는 저에게 지워진 십자가와 같은 것입니다. 1944년 5월부터 소련과 만주 국경에 피신해 살면서 매일 한끼씩 금식하며 기도한 내용도 민족을 위한 것이었고, 6·25 당시 공산치하에서 지낸 3개월 동안도 저의 목표는 민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1971년 1월 1일 민족의 예수혁명운동, 이른바 ‘민족복음화’를 선언한 김 목사에게 달라스에서 열린 Explo72의 의미는 남달랐다. 민족복음화를 위한 방법으로 Explo를 개최하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김목사는 달라스 마지막날 집회에서 1974년 한국에서 30만명이 모이는 Explo를 개최하겠다고 선언했다. Explo72에 참석했던 55명의 한국대표단이 귀국하자 이 소식은 퍼져 나갔고, 전국의 CCC간사들은 전화나 편지 또는 전보로 김 목사의 무모한(?) 결정에 항의하고 나섰다.

당시 CCC 광주전남지구에서 간사를 맡고 있던 김안신 선교사(62·일본 도쿄거주)는 “Explo 같은 큰 집회를 한국에서 개최하겠다는 이야기를 김 목사님이 하셨다는 소식을 접한 CCC 내 사람들은 반발심이 가득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1973년 경기도 입석수양관에 모인 전국의 CCC 간사 70여 명은 전지 두 장에 ‘74년 Explo 한국유치 불가론’을 적기 시작했다. 날씨, 수송, 식사, 교육, 재정, 시설, 교계의 반대, 김일성의 비난, 당국의 집회 불허, 교통마비, 주민의 반대 등 쏟아져 나온 불가능한 이유들은 이내 전지 두 장을 꽉채웠고 항목수로는 74가지나 됐다.

74개 불가항목을 적어놓고 김 목사에게 Explo74 포기를 주장하고 있는 간사들 앞에 김 목사는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민족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니면 아닙니까? 민족복음화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방법 또한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적인 잣대를 가지고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김 목사는 간사들에게 성경의 말씀,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스가랴 4장6절)라는 구절을 읽게 했고 간사들은 이 말씀 앞에서 자복하게 됐다. 말씀에 의지한 간사들은 4박5일간 금식기도로 각자의 기도제목에 매달렸고 수련회가 끝나자 각자 지역으로 흩어져 말씀에 의지해 Explo74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금식기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Explo 준비위원회는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서지 말자’는 원칙을 가지고 매사를 하나님께 맡겼다. Explo74를 유치해놓고 김 목사를 비롯해 준비위원회 측이 가장 고민하고 있었던 것 중에 하나는 취사문제였다. 어디에 물어봐도 30만 명을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곳이 없었다.

김 목사는 30만 명을 합숙시키고 교육하는 일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육군에서 군사령관을 지낸 두 사람과 상담했지만 이들은 해결책보다는 포기를 권했다. 훈련된 군대도 5만 명을 동원하는 데 3개월정도 훈련을 해야 하는데, 30만 명의 민간인이 여름에 여의도 아스팔트에 모인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 목사는 60만 명의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반드시 어떤 대책을 가지고 계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기와와 벽돌을 굽는 곳을 지나다가 하나님의 방법을 깨달았다. 바로 도자기 굽는 가마처럼 터널을 만들고 레일을 깔아 그 위에 바퀴달린 솥을 지나게 해 밥을 짓는 방법이었다. 실패를 여러 번 했지만 한꺼번에 8,000명에서 1만 명분의 밥을 지을 수 있는 솥단지를 만들고 여의도에 있는 고층 아파트 보일러와 연결해 Explo74 기간 동안 30만 명분의 밥을 지어 먹일 수 있었다.

준비단계부터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한 김 목사는 대회기간 중 하나님이 보여준 섬세한 섭리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대회 개막일인 74년 8월 13일 공식적으로 집계된 합숙 등록 훈련생은 32만3,419명.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30만 명 훈련이 가능케 됐다. 세계 수십국에서 모여든 대표들 때문에 서울의 호텔은 물론 여관까지 만원을 이뤘다.

기도로 준비하고 하나님이 함께 한 5박6일간의 대집회는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저녁집회가 되면 훈련생 32만 명 외에도 많은 국내 기독교인들이 모여 최대 158만 명이 모여 집회를 가졌다. 5·16광장(현 여의도공원)주변의 8,000여개의 천막에서 10만여 명이 숙식을 하고, 세미나를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영락교회, 충현교회, 광림교회 등 서울시내 대형교회로 이동했지만 불평의 목소리는 없었다. 한낮에 최대 38도를 오르내리는 폭염 속에서도 일사불란한 자세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점점 성령의 사람이 돼가고 있었다.

그 집회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날씨. 대회기간 동안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매일 철야기도회가 이어졌는데 철야기도회에 매일같이 비가 왔다. 여의도 광장에 모인 10만에서 60만에 이르는 성도들은 비를 맞으며 무릎까지 오르는 빗물 속에서 집회에 참여했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였다.

“낮에 50도 이상 올랐던 아스팔트 때문에 물에 온기가 남아 깊은 밤에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김준곤 목사는 “비가 와 따뜻한 빗물이 얇은 홑이불을 덮고 있는 것과 같았다”면서 “마치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하나님의 섭리와 같은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Explo74를 유치해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일선에서 진두지휘했던 김준곤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훈련 받기 원하는 우리의 갈급한 기도를 들으셨고 성공적인 대회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며 모든 성과를 하나님께 돌렸다. #

미래한국 15호 (2002.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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