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자취] 故 김준곤 목사의 일생
[삶의 자취] 故 김준곤 목사의 일생
  • 미래한국
  • 승인 2009.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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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45만명 훈련시킨 민족 복음화의 기수
▲ 故 김준곤 목사


일평생을 ‘민족 복음화’운동에 헌신한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설립자 김준곤 목사(사진)가 지난 9월 29일 85세의 일기로 소천했다. 1970년 12월 31일 재야의 종소리와 함께 고 김준곤 목사는 CBS를 통해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민족복음화운동을 공식 선언한다.

오늘날 한국CCC의 이념적 바탕이 된 이 표어는 학원 복음화와 민족복음화라는 목표로 구체화됐다. 지난 반세기 동안 CCC는 45만 명의 대학생을 복음으로 훈련시켰고, 사회 각계 각처에 그가 훈련시킨 크리스천 리더들이 민족 복음화에 헌신하고 있다. <미래한국>은 ‘영원한 청년’ 고 김준곤 목사의 일생을 돌아보며 한국 기독교사에 남긴 그의 족적을 소개한다.


김준곤 목사는 1925년 3월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봉리에서 8남 중 넷째로 출생했다. 영민하고 사색적이었던 그는 15~16세 때쯤 성당 앞을 지나가다가 신부님과 수녀들을 만나게 됐고 성당 안으로 안내되어 ‘예수님 일대기’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김 목사는 생전 TV 인터뷰를 통해서 자신이 그때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울었고 거의 예수 믿는 사람이 됐다고 회고했다.

1941년 현 무안중학교인 무안농업실수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해 1948년에 졸업한 뒤 1951년 9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52년 3월에는 조선대 문학과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 광주 숭일 중·고등학교 교장 및 교감을 맡았다. 1950년 10월에는 전쟁 통에서 아버지와 아내가 공산폭도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슬픔을 경험하기도 했다.

1956년 3월부터 7월까지 한성신학교(여수 애양원 나환자 신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1957년 9월에 미국 퓰러신학교에서 약 1년간 연구 수학을 한다. 유학 시절 그는 CCC를 설립한 빌 브라이트 박사를 만나 한국에서도 대학생선교회를 시작하라는 권유를 받고 1958년 10월에 현재의 CCC를 한국에 설립한다.

당시 CCC의 설립은 지성 사회에 충격을 줬던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똑똑한 젊은이들의 집결소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설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감나게 표현하며, ‘역사의 강은 어디로 흐르는가’라는 설교 제목처럼 젊은 지성인들의 지적 갈급함까지 채워줬던 것으로 유명하다.

 

대학·군대·국회에 전파한 민족 복음화 비전

민족 복음화의 비전은 국회에서도 꽃을 피운다. 군사정부 시절인 1966년 3월 김 목사는 국가조찬기도회를 창설했다. 국가조찬기도회가 생긴 것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재임 시절에 시작됐다. 김 목사는 당시 30여명 정도 됐던 기독교인 국회의원들에게 초청장을 보내 이 기도회를 주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참석했던 국회의원으로는 김종필 전 자민련 대표, 김영삼 전 대통령 등이 있었다. 나라의 장래를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며 기도하는 국가조찬기도회는 국제 친선과 기독교 선교에 도움을 주었다.

민족 복음화의 비전은 대학과 국회에 이어 군에까지 퍼져간다. 김 목사는 1969년 군 복음화운동을 전개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군 내 좌익 침투에 대한 우려를 갖고 김준곤 목사에게 군인들의 사상 무장과 정신 무장에 대해 자문을 구해왔다. 이때 김 목사는 신앙 전력화가 군 내 반공운동과 정신력 무장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전군신자화운동을 제안했다. 전군신자화운동은 박 대통령의 흔쾌한 동의로 시작되었고, 그는 6일 동안 중령 이상 중장까지 고급 간부 2,472명에게 복음을 전했다. 전군신자화운동은 현재도 군 복음화를 위한 비전 2020운동으로 맥을 이어가고 있다.

1960~70년대에는 군사 정권에 대해 반독재, 반체제 운동을 벌이는 것이 당시 대학생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김 목사의 관심은 오로지 민족 복음화였다. 그는 지난해 10월 미래한국과의 인터뷰에서 “이 시기에 신앙과 자유를 압박하는 악에 대결하기 위해 한국 기독교의 신앙적 토대를 만드는 일이 먼저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오직 전도 운동에 전념했다”고 술회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제안하고 추진했던 1974년 ‘엑스플로 74’는 대중 전도 운동의 정점이요, 민족 복음화의 밑거름이었다. 이 전도합숙훈련에는 공식적으로 32만3,419명이 참석했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270만 명에서 300만 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상상을 초월한 인파가 몰린 것이었다. 엑스플로에 참가한 교회들을 중심으로 실시한 통계에 따르면 교인수로만 봤을 때 집회가 끝난 지 1년 후 한국교회는 33%성장했다. 이 대규모 학습 전도운동은 1995년까지 이어졌고 대학생 45만 명, 평신도 350만 명이 이 훈련에 참가했다.

 

민족복음화 넘어 세계선교 주창

▲ CCC 여름수련회에서 설교하고 있는 김준곤 목사/사진제공:CCC
민족 복음화 이전에 한 도시만이라도 완전히 복음화하자는 ‘성시화운동’을 꿈꾸고 불을 지핀 것도 그였다. 이 비전은 1972년 춘천에서부터 시작됐다. 춘천 성시화운동의 모델은 존 칼빈의 제네바이다. 김 목사는 2005년 성시화운동총재를 맡아 전국과 해외를 다니면서 성시화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성시화운동은 전 교회가 전 복음을 전 시민에게 전한다”는 3전 전략을 세워 복음 전도와 함께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그는 성시화운동으로 거룩한 도시, 깨끗한 도시, 범죄 없는 도시를 만들기 원했다. 실제 성시화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도시에서 이혼율이나 범죄율 등이 급감하는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1980년대에 김 목사는 민족 복음화를 넘어 ‘세계 선교’로 눈길을 돌린다. 1980년 ‘80세계복음화대성회’에서 그는 한국 주도의 선교사 시대를 열 것을 역설한다. 그는 이 집회에서 당시로는 생소했던 외국 선교를 위해 기도할 것, 선교 후원에 참여할 것, 장·단기 선교사로 헌신할 것 등 네 가지를 도전했다. 그때 10만 명이 젊은이들이 장·단기 선교사로 서약 헌신을 했고, 지금 세계 선교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는 1990년 한국 교회 최초의 단기선교인 ‘뉴 라이프 마닐라 2000’으로 결실을 맺는다. 김 목사는 이때 필리핀 마닐라에 대학생 단기 선교팀 3,000여 명을 파송했다.

고인은 북한 선교에도 관심을 가져 지난 2000년 ‘북한젖염소보내기운동’을 결의한다. 굶주림에 처한 북한 동포를 돕기 위해 향후 10년 내에 북한의 190만7,000호 농가에 젖염소 한 마리씩을 보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까지 2,000여 마리의 젖염소와 착유 설비 등이 북한으로 보내졌다. 김 목사는 생전 인터뷰에서 젖염소는 사막에서도 살아서 무한 번식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고, 희생과 평화의 상징성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김 목사는 이 젖염소에 우리의 기도와 복음, 사랑, 애국심을 담아 보냈다고 말했다. 이것은 그가 주창했던 양손선교(한손에는 복음을, 한손에는 사랑을)의 개념으로 먼저 사랑을 준 다음에 기회가 주어지면 복음도 함께 준다는 의미가 담긴 것이라고 한다.

평생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 민족 화합 등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고인은 그의 업적에 비해 늦었지만 200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시적인 문체와 문장력으로 유명한 그는 ‘예수칼럼’, ‘영원한 첫사랑과 생명언어’, ‘리바이벌’ 등 다수의 저서도 남겼다.

고인은 생전에 지성의 귀로와 이 시대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인 것을 항상 강조했다. 십자가에 대한 설교는 고인의 개인적인 아픔 가운데 잉태되었다. 1982년 만 29세이던 그의 둘째딸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 목사는 딸의 투병기간 동안 자신이 환상을 통해 본 것은 피 묻은 십자가였으며, 실존의 제로점에서 자신을 살게 한 것도 십자가였다고 술회했다.

CCC에서 그의 지도를 받았던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 김인중 안산 동산교회 목사, 정정섭 한국 국제기아대책기구 회장 등은 김준곤 목사를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로 회상했다. 눈물이 많고, 영원한 청년으로 불릴 만큼 복음에 대한 열정도 뜨거웠다고 한다. 고인은 시각 장애인 2명에게 각막을 기증하고 떠난 것으로 알려져 마지막 생까지 잔잔한 감동을 더했다. #

서은옥 기자 seo0709@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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