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낙조(落照)
서해 낙조(落照)
  • 미래한국
  • 승인 2009.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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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utiful Korea] 류우익의 국토기행
▲ 굴을 따고 있는 안면도 아낙

다시보는 미래한국
- 미래한국 23호 (2002.11.17.)

하늘을 태우고
바다를 물들인 후
창해로 빠져드는
서럽도록 아름다운 낙조여…

단풍지면 낙조를 보러 가자. 낙엽져서 새순이 나듯, 지는 해가 있어 다시 해가 뜨는 법이니. 우리에게 가을과 봄이 있고, 또 서해와 동해가 있음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관악산 허리를 돌아 나와 잠깐, 서해대교에 이르면 이미 바닷가다. 삽교천, 아산 방조제로 돌아가던 길이 누군가 막무가내 우긴 덕에 지름길로 났다면, 고집도 미덕일까. 서울서 서해로 가는 길은 멀었다. 아니 서해안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 멀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었다.

그래서 당진, 홍성과 서산, 태안반도 사람들은 육로를 마다하고 뱃길로 다녔다. 이 지역 중·장년층에 인천에 연고를 가진 이들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서울역 뒤편에서 장항선 막차를 타고 가다가 기차역에서 버스 정류장으로 이고 지고 뛰던 이들이 아직 여기에 산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이 외진 바닷가를 서울에서 두시간의 지척으로 당겨 놓자, 이번엔 서울 양반들이 ‘내려가기’ 편하게 되었다.

차창에 들어오는 나직나직한 구릉들이 편하고, 언덕 높이에 맞추어 낮게 엎딘 민가들의 자세가 정겹기 이를 데 없다. 나는 환경이 사람의 심성을 결정짓는다고는 믿지 않지만, 이렇게 천연덕스레 순한 자연에 살면서 어찌 강퍅하고 뒤틀린 심사를 가질 수가 있겠는가?

예당들의 황색 물결이 넉넉하고, 널브러진 과수원이 온통 붉은 사과의 환호에 뒤덮였다. 풍요란 가지는 것이 아니고 느끼는 것이로구나. 홍성 나들목으로 내려서서 곧장 서산 방조제를 건넌다. 지금은 고인이 된 옛 주인은 넓은 간척지에 기업농을 실험하였다. 소 백 마리를 몰고 휴전선 넘어갈 기발한 생각을 한 이가 이 땅을 끝내 농토로 쓰려 했을까?

이제 왼편으로 돌아들면 안면도, 서해안의 녹색 진주다. 해송이 울창하게 이어지는 산등성이를 따라 오밀조밀 마을과 전답이 잘도 어울린다. 해안도로로 접어들면 여기 이런 곳이 있었구나. 들어가면 아담한 포구요, 돌아 나오면 금세 송림에 덮인 기암절벽이다.

   
 
  ▲ 꽃지 해수욕장포구  
 

눈가는 곳들의 이름들을 일일이 기억하는 건 호사가의 도로일 것이나, 명색이 지리학자가 뇌리에 남는 앙증맞고 깜찍한 지명 몇을 어찌 마다할까. 드르니, 백사장, 방포, 영목은 항포구요, 두여, 밧개 꽂지, 샛별에다 장삼, 장돌, 바람아래는 해수욕장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썰렁했던 읍내가 눈에 띄게 활기차 보인다.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꽃박람회가 열리면서 일약 관광 명소로 발돋움한 것이니, 사람이나 땅이나 팔자를 알 수 없기는 매한가지라. 길이란 길은 다 포장되고, 골마다 민박집도 셀 수 없이 늘어났다.

세세한 격에 얽매이지 않는 활달함이 우리 문화의 특질이기는 하지만, 민박집들의 양식과 배열은 그야말로 제멋대로다. 어쩌다 우리 건축문화가 이리도 본 데없이 되어버렸을까? 하기야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핵폐기물 처리장을 만들겠다고 우겼던 정부에 얼마나 더 사려 깊은 상업주의를 기대할까?

아직 해가 두어 발이나 남았다. 물 빠진 개펄에 나서니 바다가 저만치 물러갔다. 조석간만의 차이로나, 간척의 역사로나, 생태계의 풍요로움이나, 세계 굴지의 개펄이다. 다만 우리가 무심하고 무지했을 뿐이다. 발아래 많은 것들이 기어다닌다. 돌 밑, 뻘 속과 갯골의 물가에도 살아 있는 것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아이들도 신나서 마냥 뛴다.

   
 
  ▲ 할아비와 할미 바위 사이로 떨어지는 꽃지해수욕장의 일몰  
 

해질 녘의 서해바다는 서럽도록 아름답다. ‘해는 서산에 지고’라고 하였지만 여기서는 해가 바다에 진다. 못 다한 열정을 모아 하늘을 태우고 바다를 물들인 후에 서서히 창해로 빠져든다. 세상을 못 잊는 것인지 스스로를 추스르는 것인지 한참을 뉘엿거리다가 비로소 가라앉는다.

해송사이로 뒷노을을 짊어진 할아비와 할미 바위는 세월이 어둠 속으로 사그라져 가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다. 해가 졌다고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는 낙조를 절반도 못 본다. 지는 해 뒷자락을 잡고 슬며시 구름이 내려앉으면 어슴푸레 남은 잔광에 바다가 비로소 다가온다.

가을 바다가 넓은 가슴을 여는 것은 차라리 지금부터이다. 부끄럽고 분하고 슬픈 사연들을 저며내어 바다에 내어주고, 자랑과 고마움과 기꺼움도 굳이 숨길 것이 없다.

석양에 들어오는 배는 보기에도 좋다. 거친 바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배는 참으로 조용히 물살을 가른다. 뱃전에서 꼼짝 않는 저 사람은 어떤 속 깊은 생각을 젓고 있을까? 돌아보는가, 삭이는가, 기다리는가. 설핏 물들어 오는 소리가 들린다. 게도 고동도 신이 났겠구나. 진흙 속에 숨었던 낙지도 나오고, 처졌던 고기들도 다시 물을 만났구나. 그래, 뭍이고 물이고 밤은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는 평안한 시간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밤 공기가 차다. 눈앞에 떠 있던 섬들이 저만치 멀어졌고, 돌아보니 선창가에 적열등 불빛이 요요하다.

밤바다는 혼자 걷기에는 너무 썰렁하다. 별 말을 않더라도 둘이 걷는 것이 좋다. 해초 비린내, 축축한 바람, 밀려오는 파도소리, 물위로 일렁대는 불빛, 그리고 고개를 들면 눈이 시리게 검푸른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 이 장엄한 자연의 콘서트 한가운데에 누구든 함께 서 있는 것은 행복이다. 시장기가 돌면 이제 가장 더딘 감성을 충족시킬 차례이다.

한기를 녹이는 데는 소주도 좋고 동동주도 괜찮다. 제철인 굴탕 한 사발에 웃고 돌아서는 아낙의 여유가 고맙다. 바지락, 모시조개, 맛조개, 홍합을 섞어 끓여 대파를 얹어내는 조개탕도 시원해 보인다. 대하구이가 과분하면 멍게 해삼에 갱개미 무침이면 어떤가? 새조개, 피조개구이나 꽃게탕이 제철이고, 우럭에 놀래미나 도다리를 곁들여 활어회 한 접시면, 그도 좋다.

매운탕은 국물을 천천히 우려내야 깊은 맛이 나고. 차림새만큼이나 속사정이 다른 이들 사이에 오다가다 들른 이들까지 끼리끼리 그런 대로 오붓하게 자리가 어울린다. 바다가 숨결을 고를 무렵이면 사람도 편히 잠을 청할 수 있다.

내일은 밤새 바다에 식히고 씻은 새날이 밝는다. 시리게 푸른 바다, 하얀 모래톱의 깨끗한 어울림에 끼여들어도 좋겠고, 안면송 자연휴양림이 뿜어내는 싱그러운 기운에 흠씬 젖어보면 어떨까? 해수탕에 궁합이 맞는 것은 박속낙지탕이고, 전어구이에 굴밥도 별미란다. 그들이 알까? 서해 낙조를 보고 나면, 하룻밤 사이에 낙엽이 더 고와지는 이치를.

류우익 서울대 교수(지리학)
세계지리학연합회 사무총장·청와대 대통령실장·본지 편집위원(1기) 역임

사진/이승재 기자 fotolsj@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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