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황태자’, 정치인으로 홀로서기
돌아온 ‘황태자’, 정치인으로 홀로서기
  • 미래한국
  • 승인 2009.12.2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터뷰] 김현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 김현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한국 정치사에서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같은 구도는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다. 때론 동지로 때론 라이벌로 반세기 동안 함께 하면서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두 사람. 1987년 각각 대선출마를 선언하면서 등을 돌렸으나, 지난 8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병석을 찾으면서 ‘화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한때 민주화 동지였던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회동을 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 김홍업 전 의원이 만나서 진하게 악수를 했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와중에 화해를 논하는 옛 정객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인물이 다름 아닌 김현철 부소장이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절에 황태자, 소통령이라고 불렸던 김 부소장이 한보사건과 관련해 검찰에 기소되었다가 2001년에 사면복권 된 이후 본격적으로 정치 행보를 시작한 지 정확히 1년이 되었다. 2008년 10월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으로 임명된 이후 그를 여의도가 아닌 서소문에서 만났다. 동교동 식구들과 만남 이후 취재요청이 많았지만 ‘팩트’가 나간 걸로 족하다는 생각에서 응하지 않았다며 나중에 인터뷰하자는 김 부소장과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김 부소장은 “본의 아니게 인터뷰하게 되었다”며 난감해 했지만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의중을 밝혔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00일 추모기도회에 참석하고 바로 다음날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의 만남이 있었는데,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두 분을 애증관계, 라이벌로 말씀하시지만 애정의 기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40년 중에서 30년은 좋은 관계였죠. 1970년대 대통령 후보 경선 때 두 분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은 승리를 자신하며 인정 수락연설문을 포켓에 넣고 다녔지만 패배를 인정하고 전국유세를 함께 다녔습니다. 1987년 대선 때 아버님을 중심으로 힘이 결집되어 있었는데 DJ가 평민당을 만들면서 민주세력이 양단되었습니다. 그 이후 완전히 가는 길이 달라졌고 감정의 골이 깊어져서 두 분의 화해는 불가능할 걸로 생각했습니다. DJ 임종을 앞두고 아버님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입장에서 큰 결심을 하신 거지요.”


이념적 화해는 아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병문안을 화해로 봐도 된다고 하셨는데 두 분은 보수와 진보로 나뉘었고 특히 북한문제에 있어서는 완전히 견해가 다릅니다. 과연 어떤 의미의 화해로 봐야 할까요.

“개인적인 화해 뿐만 아니라 정치적 화해라고 봐야 합니다. 이념에 있어서는 다른 길을 걸어오셨지요. 야당에서 신구파로 나뉠 때부터 이념적으로 달라졌습니다. DJ가 진보적인 신파라면 아버님은 민주당 구파로 정통보수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민주화라는 목적이 같았기에 야당의 길을 함께 걸으신 겁니다. 하지만 두 분이 걸어온 길이 확연히 다릅니다. 특히 대북정책과 안보문제에 있어서는 철학이 다릅니다. 아버님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인정 못한다며 기회 있을 때마다 반대의사를 표했지요. 이념적인 부분까지 다 포함하는 화해는 아닙니다.”

어쨌든 앞으로 상도동과 동교동은 정례회동을 하기로 했고, 곧 동교동에서 답례 모임을 개최하기로 했다고 한다.

“과거에 목숨 내걸고 투쟁했기에 끈끈한 동지애가 있습니다. 세간에서 정치 세력화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있는데 그건 좀 비약이고, 두 분의 화해를 바탕으로 동지적 역할을 했던 분들이 인간적인 모임을 갖자는 취지입니다. 지금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데 이 모임이 하나의 완충적인 역할, 중화제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김홍업 전 의원과는 개인적으로 또 만나기로 했습니다.”
 
YS와 DJ의 화해 얘기는 그쯤에서 마치고 근 10년 만에 공식적으로 일하게 된 감회를 물었을 때 김현철 부소장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야말로 ‘잃어버린 10년’ 입니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던 기간이었지요. 여론재판에 휩쓸려가면서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뭐라고 얘기하면 아직 정신 못 차렸다고 하고 가만히 있으면 죄를 인정하는구나, 라고 했죠. 어떤 얘기도 통하지 않았어요.”

김 부소장은 ‘황태자, 소통령’이라는 자신의 닉네임을 스스로 거론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전에 소산(小山)이라는 별명이 있었어요. 1992년 대선 때 거산(巨山)인 아버님을 도와서 나름의 역할을 했다며 기자들이 붙여준 별명이었어요. 1987년 대선이 끝나고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아버님이 말렸어요. 그래서 휴직하고 있었던 증권회사에 복직하려고 했지만 복직이 안됐어요. 그래서 무얼할까 하다가 여론조사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1987년 대선 때 다들 아버님이 된다고 했지만 여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거죠. 주먹구구식으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여론조사를 본격적으로 했고 1992년 대선까지 이어갔습니다. 당시 어른들이 제가 역할을 한다며 소산이라고 불렀는데 그때는 좋은 의미였습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아들이 인사권을 좌지우지 하고 비자금의 통로 역할을 한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죠. 정권이 바뀐 뒤 많은 조사를 받았습니다. 아버님과 저의 뒤를 샅샅이 캤습니다. 제가 잘못이 있었으면 골백번 구속되었을 겁니다.” 


“정치에 뜻이 많았다”

-아버지인 대통령에게 다양한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위치였고, 그것에 대해 국정의 농단이라는 표현까지 나왔습니다. 사실 그 부분이 지금까지도 일반인들에게 가장 큰 문제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1987년부터 아버님 옆에 있었으니 개인적으로도 많은 분을 알고 있었어요. 일반 국민의 목소리는 여론조사를 통해 말씀드렸는데 제일 중요한 건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소통이었습니다. 당시에 제가 안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 분들이 원했던 일입니다. 아버님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가까운 분들도 만나서 말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또 껄끄러운 얘기를 하기가 힘드셨을 겁니다. 그러자 각계각층에서 저한테 이런 저런 얘기를 전달해달라고 했고, 그런 여론을 전달해드렸죠. 정계, 당, 심지어 군과 정보기관에 계신 분들까지 저한테 얘기를 하셨고 시간이 갈수록 과부하가 걸리면서 애로사항을 아버님께 당사자들이 직접 말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정치에 뜻이 많았기 때문에 아버님 옆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역할을 하는 게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던 거죠.”

-현직 대통령 아들 신분으로 구속되었습니다. 단순하게 봤을 때 ‘얼마나 죄가 많으면 대통령 아들이 구속될까’ 라고 누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 .
“지금까지 제가 한보에서 2000억 원 리베이트를 받아서 구속된 걸로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제가 한보 2000억 리베이트 받았다고 말한 모 국회부의장님, 간접적으로 사과를 했지만 공식적으로 사과해주길 바랍니다. 검찰조사 받을 때 구속시킬만한 내용이 없으니까 ‘작은 걸로 들어가면 어떻겠냐, 곧 빼주겠다’고 저한테 딜을 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얘기지요. 작은 거라도 있으면 구속되어야지, 왜 그런 식으로 딜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마음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면 지금 정치한다고 나서지 못하죠. 큰 잘못을 한 사람은 정치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는 선거자금 문제로 구속이 되었다.

“선거자금은 여야 간의 불문율인데 큰 압박으로 온 거죠. 선거자금은 제가 받은 게 아니라 공조직과 사조직에서 쓰다가 남은 걸 저한테 인수인계해주었고 그걸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공개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결국 조세포탈죄라는 걸 만들어서 저를 구속했습니다. 선거자금에 세금 안냈다고 조세포탈죄를 적용한 건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그는 특가법상 알선수재혐의와 조세 포탈혐의로 서울구치소에 구속됐다. 구속을 상상조차 못했다는 그는 변호사도 만나지 않고 혼자 검찰에 갔다고 한다.

“변호사와 상의할 내용이 있어야 상의하죠. 그냥 아무 준비 없이 덩그러니 혼자 간 겁니다. 며칠 만에 돌아와서 뵙겠다고 인사를 하니까 아버님이 ‘내가 아무 힘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래도 아버님이 방패막이를 해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그런 면에서 결벽증이 있어서 자식이라도 문제가 있다면 단호하게 처리하십니다. 모진 면이 있어요. 그랬으니 대통령까지 되셨겠죠. 보고를 잘못 받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땐 억울했죠. 제가 돈에 궁한 사람도 아니고 정치를 해야 할 사람인데 바보같은 짓을 할 리도 없는 거고… 너무 꿈이 컸는데 그때 그 일을 겪을 때 감당을 못하겠더군요.”

-1997년 당시 여론이 굉장히 나빠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야했고, 항간에서는 아들이 다 짊어지고 들어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수감생활을 다 마친 후 아버님이 ‘미안하다. 몰랐다. 고생했다’ 딱 그 말씀만 하셨어요. 부모자식 간의 관계라는 게 다른 관계와는 다르잖아요. 속상했지만 제가 뭐라고 할 수 있나요.”


신앙으로 이겨낸 구속 생활

-구속될 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그 때 심정을 그대로 말하라면, 저는 지금 이 세상이 사람 아닐 겁니다. 그런 생각을 너무 많이 했으니까… 구속 안됐다면 사람들이 망각을 하겠죠. 구속이 되었기 때문에 내용은 생각하지 않고 죄를 졌으니까 갔겠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그는 신앙으로 6개월간의 구속기간을 이겨냈다고 말했다.

▲ .
“그 일을 계기로 신앙심이 깊어졌습니다. 신앙이 없었으면 견디기 어려웠을 겁니다. 감옥에 있을 때 성경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6개월 동안 성경을 3번 통독했어요. 이상하게도 기도만 하면 눈물이 나고 찬송만 부르면 눈물이 났어요. 영어의 몸이 된 게 비참하고 억울해서가 아니라 그냥 눈물이 났어요. 몰랐던 부분을 새롭게 찾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힘들고 외롭게 되어 하나님을 다시 만났다는 게 축복이다,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모태신앙인 그는 현재 구기동의 예능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요즘 안수집사가 되기 위한 요건을 갖추기 위해 교회에서 제시하는 프로그램을 이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2001년에 사면복권이 되었지만 쉽게 사회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공부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아쉬움이 많았다. 17대 총선 때 다시금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져서 출마할 수 없었고, 자신이 관리하던 50억 원에다 김기섭 차장이 갖고 있던 선거자금 20억원까지 합쳐 70억 원을 사회에 환원했으나 18대 때도 출마하지 못했다. 금고형 이상의 형을 받은 사람은 아예 공천신청을 못한다는 한나라당 당헌당규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 법은 위헌적 요소가 있다는 이유로 수정할 예정이어서 다음 총선에는 출마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10년만의 복귀

-올해로 딱 50세 되셨습니다. 아버지가 그 옛날에 40대 기수론을 주창했는데 아들은 50대가 되어서 정계 입문을 꿈꾸시는군요.

“돌이켜보면 아쉬운 순간들이 많지요. 제가 29세였던 1988년 13대 총선 때 국회에 진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선에 실패한 아버님께서 갑자기 저한테 총선을 준비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버님 지역구였던 부산 서구에 인구가 많아 분구가 되었고 당시만 해도 아버님 말씀이라면 다 통했으니까 가능성이 있었죠. 무주공산인 상태였으면 제가 됐겠지만 유력 인사 한 분이 자리를 안내놓으셔서 아예 출마를 못했습니다. 1992년 총선 때는 3당이 합당하면서 수요가 너무 많아 또 밀렸고 1996년은 아버님 재임기간이어서 부담이 있었죠. 그때 제가 다 좌지우지하는 걸로 야당과 언론으로부터 공격을 많이 받을 때였어요. 아버님께 ‘음지에 있어서 그렇다. 양지로 나가서 평가를 받겠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아버님이 허락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가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에 임명될 때 한나라당 내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첫 출근을 하는 날 만감이 교차했다고 한다.

“마포대교를 건너가면서 10년 전에는 청문회 하러 갔는데, 그 생각을 했습니다. 10년 동안 여의도에 간적이 없었습니다. 갈 이유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았어요.”

여의도연구소에서 그는 여론조사를 담당하고 있다. 다음 총선에 거제도에서 출마하기 위해 내년 지자체 선거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뛸 예정이라고 한다.

-국회의원 되기에 앞서 공천받는 일이 대단히 치열하던데 자신 있습니까.

“앞으로 공천환경이 많이 바뀔 겁니다. 예전에는 지역 국회의원이 추천하면 다 공천 받았지만 이제는 여론조사가 관건입니다. 지역 국회의원이 추천은 하겠지만 각 시당과 도당에서 한 번 거르고, 최종적으로 중앙당에서 거를 때는 여론조사 결과가 중요한 관건이 될 겁니다. 당선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출마해야 한다는 거지요. 거제도에 갈 때마다 여론이 좋아지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어서 꿈을 키우는 중입니다.”

-대통령의 아들이어서 고통을 겪었지만 대통령의 아들이어서 다시 기회가 온 거 아닐까요. 

“다시는 정계 진출을 못하겠구나, 생각한 적도 있지만 한 번도 꿈을 저버린 적은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고자 하는 정치를 인정해줄 때가 있을 것이다, 대통령 아들이 아니라 자연인 김현철로 평가받을 날이 올 거다, 이런 희망을 늘 갖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원대한 꿈이 있었지만 지금은 명예회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저 자신과 가족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습니다.”

‘문민정부’ 하면 외환위기를 떠올리는 것도 바로잡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청산 등 업적이 많다며 당시에 정권을 재창출했으면 문민정부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을 거라고 했다. 

-어떤 정치를 하고 싶습니까.

“10년 전 입문하려고 할 때와 환경이 많이 바뀌어서 생각이 많습니다. 2012년에 제가 당선된다면 당론이나 계파의 목소리가 아닌 제 목소리를 내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지역감정 해소에 앞장서고 싶어요. 그 분야에서는 제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세계화는 덩치를 키워야 유리합니다. 지금처럼 사분오열로 찢겨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희망의 리더십이 필요할 때라고 강조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잘한다 잘한다 하면 잘하게 되는 피그말리온 효과를 발휘해야 합니다. 정권이 바뀌면 물고 뜯고 하는 게 일상화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 스티그마 효과가 나타나고 있어요. ‘넌 안돼’라고 낙인을 찍어버리면 잘 될 수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희망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리더십이 아쉽습니다.”


정치인은 반박자 앞서가야

그는 간디보다는 네루 같은 정치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간디는 한 발 앞선 선각자입니다. 너무 앞서가면 국민들이 피곤해질 수 있습니다. 국민보다 반 박자 앞서간 네루가 인도 독립을 이뤄냈습니다. 앞서가더라도 국민들과 눈높이를 맞춰서 이해하고 끌고 가는 지도자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일차적으로 지역에 가서 입문하는 게 급선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일본의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經塾)같은 정치 아카데미를 개설하고 싶습니다. 제대로 된 사람 양성해서 배출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 정경숙에 몇 번 다녀왔습니다.”

지천명(知失命)의 나이가 된 김현철 부소장은 먼 길을 돌아온 만큼 기회가 온다면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한 지역에 출마해서 그 지역 주민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게 시작입니다. 지금까지는 모든 사람의 비난을 받았지만 한 지역에서 인정받으면 점차 저를 믿어주시겠죠. 다른 데서 공격이 들어와도 저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힘이 날 겁니다. 한 사람이 두 사람 되고 두 사람이 세 사람 될 걸로 믿습니다. 그분들을 믿고 가야지요.”#

 김범수 편집위원 bumsoo1@hotmail.com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