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탈북민 수용소에서는 지금…
북한 탈북민 수용소에서는 지금…
  • 미래한국
  • 승인 2010.01.2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탈북민 증언] 세 번 강제북송당한 이경란 씨
▲ 탈북 수용소

신생아를 산 채로 파묻고 비닐로 질식시켜

눈이 펑펑 쏟아지던 지난 1월 15일, 북한을 탈출한 지 8년 만에 한국에 입국한 한 탈북여성을 만났다. 서울 모 정부기관에서 비공개로 진행된 북한인권 관련 행사에서 만난 이 여성은 중국공안에 의해 세 번이나 강제북송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증언했다.

이 여성은 북한에서 한때 중학교 수학교사였고 이후 국경의 밀거래 장사꾼이 되었다가 10년 전 탈북했다. 한국에 입국해서는 하나원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온 지 1년이 되었다.

이 여성은 자신의 강제북송 경험은 ‘차라리 가벼운 문제’라며 북한 온성과 청진에서 목격한 산모와 아기에 대한 인권말살 현장을 상세히 증언했다. 자신의 이름을 이경란(50. 사진)이라고 밝힌 이 여성은 북한 참살현장의 증언자로서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강제북송의 전말과 인권유린 현장을 전하며 끝내 눈물을 흘렸다.

산 채로 아기를 죽이는 곳

이경란 씨가 직접 목격한 끔찍한 광경은 2000년 4월 15일 북한의 온성집결소에서 발생했다. 이 집결소는 노동단련대의 하나로 중국에서 호송돼온 탈북민들을 조사, 심문해 죄과와 성분을 분석하는 동안 임시 수용하는 시설이다. 이 씨는 이곳에 다른 100여 명의 탈북민들과 함께 수용되어 있었다.

중국 도문에서 끌려올 때부터 이 씨는 한 임산부를 주목했는데 그 여자는 만삭이 돼 출산을 앞두고 산통을 겪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며 괴로워하는 여자에 대해 중국 공안이나 북한 보위부원들은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를 뿐이었다.

온성에 도착해 3일이 지나자 이 여자는 출산을 했다. 당시 의사도 산파도 없었기 때문에 이 여자는 혼자서 출산을 해야 했다. 마침 경험이 있다는 한 여인이 도와주고 탯줄을 잘라 아기를 무사히 받았다. 그러나 출산된 아기는 온성집결소의 지시에 의해 너절한 담요에 싸였고 곧 집결소의 남자 3명의 손을 거쳐 산에 가져다 생매장됐다.

이 씨는 얼마 후 산모도 이 사실을 알고 기진하여 쓰러져 들것에 실려 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그 곳에 수용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여성들이었는데 보위부에서는 이들 가운데 25명의 임산부를 찾아내 낙태를 명령하고 내용을 알 수 없는 주사액을 이들에게 놓았다고 한다. 강제로 아이를 없애려는 것이었다.

청진교화소로 이감되었을 때도 이 씨는 동일한 광경을 목격했다. 당시 청진교화소에서는 세 명의 여성이 해산을 했는데 이들을 향해 보위부원이 한 얘기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는 단일 민족이다. 너희들이 중국에서 가지고 온 아이들은 잡종이니 중국 잡종은 우리 조선민족이 아니다. 젖을 먹이지 말라”며 중국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를 죽이라고 했다.

그래서 한 여인은 아기에게 젖을 먹이지 못하고 굶겼는데 그 아기는 괴이한 신음 소리를 내며 1주일을 견디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이 씨도 밤에 화장실에 갔다가 아기의 신음소리를 들으니 소름이 끼쳤다고 한다.

이 씨는 또 다른 가슴 아픈 광경을 목격했다. 자신이 낳은 아기를 죽이기 위해 젖은 비닐 종이로 얼굴을 덮어 질식시키는 것을 본 것이다.

산모는 심한 설사병에 걸려 기진한 상태였고 자신이 며칠만 이 상태로 간다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여인의 상태가 긴박하였으나 집결소에서는 아이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나갈 수 없다고 하였다. 결국 1주일 이상 굶은 아이를 죽기까지 기다릴 수 없어 그가 택한 길이 자기 손으로 자기 자식을 질식시켜 죽이는 것이었다.

이 씨는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서받을 수 없는 천인공노할 일로 중국 정부가 탈북민들을 무차별로 체포해 강제 북송하는 일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고 아기 생명을 벌레처럼 죽이는 이런 인권유린 행위를 서슴지 않는 북한 정권은 반드시 응징되어야 한다”고 절규했다. 

평양에서 추방, 장사로 번 돈도 다 빼앗겨

이경란 씨는 김형직사범대학에 다니던 1978년까지만 해도 평양에서 부모, 남동생 그리고 두 여동생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노동1호를 개발한 국방과학원 금속재료연구소 정치부장으로 일하던 영관급 군인인 아버지가 업무과오로 갑자기 실직하자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이 씨 가족은 함경남도 신흥군의 한 경제사업소 경비원으로 전락한 아버지를 따라 평양에서 추방됐고 이때부터 거친 인생의 세파를 견뎌야 했다.

이 씨는 다니던 대학에서마저 퇴학 당해 신포사범대학으로 전학되었다. 당시 이 씨는 대학교 교수가 될 수 있을 만큼 수재로 인정받았지만 신분이 나쁘다고 해 중학교 수학교사로 강제 배치됐고 10년을 시골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같은 학교 물리교사인 남편이 업무과실로 학교에서 추방되자 가정불화로 이어져 결혼 3년 만에 이혼하고 교사직까지 포기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 씨는 딸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가 친정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생활전선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 잘 모시고 동생들 시집 장가 잘 보내자’는 것이 당시 생활 목표였다. 이 씨는 이때부터 장사 수완을 발휘해 수산물도매사업으로 큰돈을 모을 수 있었다. 홍원 포구에서 명태나 쥐포를 사들여 량강도 혜산이나 함경북도 무산의 국경지역으로 가 조선족 장사꾼에게 넘기고 그들로부터 공산품이나 잡화를 받아 장마당 상인들에게 도매로 넘기는 일을 10년간 했다.

그러나 인생의 회오리는 1998년 4월부터 불어 닥쳤다. 금수품목인 니켈을 중국에 밀반출하는 일이 발각돼 혜산시 안전부의 조사를 받고 당시 홍원에서 싣고 간 25만원 어치의 명태와 낙지까지 모두 압류됐다. 이 씨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는 그때까지 거의 10여 년간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장사로 가족을 근근이 먹여 살려왔다. 이 씨의 말처럼 도적질도, 강도질도, 협잡도 아닌 자기 순수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장사 밑천을 하루아침에 다 빼앗긴 그가 선택한 길은 과연 어떤 길이었겠는가?

이 씨는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혜산 지역 산촌에서 수거한 개암나무 열매와 잣 등을 국경에 팔아 간단히 1만원의 돈을 만들 수 있었지만 2만원을 만들어주겠다는 사기꾼에게 걸려들어 다시 몽탕 털리고 말았다. 게다가 홍원에 있는 친정집 아파트까지 수색을 당해 3만원 어치의 물건을 보위부에 압수당하고 나서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이 씨는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다. 

한족 농부에게 팔려가다

이 씨는 한 북한 남자의 도움으로 탈북했다. 그러나 자신의 탈북을 도운 북한남자가 인신매매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중국에 도착한 얼마 후에야 알게 되었다. 중국에서 국수만 팔아도 한 달에 중국 돈 3,000원을 벌 수 있다는 꼬임에 빠져 그 남자를 따라나섰던 것이다.

이 씨는 다른 북한여성 3명과 함께 조선족에게 넘겨졌고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북한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미 상황을 눈치 챘지만 별 수 없이 이 씨는 1999년 5월 한족 남성에게 팔려가게 되었다.

이 남자는 길림성 화전에서 평생을 살아온 38살의 한족 농부였다. 이 씨보다는 두 살 젊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내가 되어 이 씨가 하는 일은 하루 종일 농사짓는 일이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지만 조금씩 농토를 개간해 잘 살아보자는 생각에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다음해 3월 30일 탈북민에 대한 길림성 전체의 집중 단속에 걸려 새벽에 6명의 공안이 집으로 들이닥쳐 이 씨를 데려갔다. 이 씨는 영문을 모른 채 끌려가 다른 100여 명의 탈북민들과 함께 중국 도문에서 북한 온성 노동단련대로 호송됐고 다시 청진으로 넘겨졌다.

이 씨는 청진교화소로 넘겨져 거의 1년이 지났을 무렵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발진티푸스가 발생해 하루에 세, 네 명씩 죽어나갔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어서 저마다 고향으로 가게 했다.

이 씨는 거지꼴을 하고 고향 홍원으로 가기보다는 중국으로 다시 들어가겠다고 맘을 먹고 대낮에 중국 어부를 따라 두만강을 건너갔다. 그리고 2000년 4월 다시 중국인 남편을 만나 한 동안 살 수 있었다. 그러나 2년 후 다시 강제 북송되는 일을 당했다. 이번 경우는 같은 동네에 팔려온 17살 북한 처녀를 도와주다가 그 남편에게 고발되어 2002년 5월 체포됐고 결국 북한 온성으로 다시 북송되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 당시 북한 국내법이 달라져 북한에 들어온 탈북민에 대해 온정적으로 조치하라는 상부지시에 따라 이 씨는 수감이 되지 않고 고향 홍원으로 호송됐다. 이 때 이 씨는 17살이 된 딸, 남동생, 여동생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씨는 딸을 더 이상 북한에 남겨둘 수 없다고 생각해 함께 탈북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한 할머니의 안내를 받아 무산지역의 깊은 골짜기를 빠져나와 두만강을 건너갔다. 바로 10미터 앞으로 국경경비대원이 지나가는 위험을 당하기도 했지만 무사히 국경을 건너 중국 화룡지역에 도착해 남편에게 전화까지 걸었다. 그러나 딸과 함께 화룡시를 코앞에 두고 중국 공안에 또 체포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씨는 세 번째 강제북송을 당해 딸과 함께 북한 무산으로 호송됐다. 무산은 탈북민들에게는 더없이 잔인한 곳이었다. 마침 보위부에서 남한으로 가려다가 체포돼 온 6명의 탈북민들이 짐승처럼 취급받는 모습을 보았다. 법절차를 밟느라고 6개월간 수용된 이들은 엄마와 딸 그리고 4명의 남자들이었는데 곧 정치범수용소로 보내진다고 했다.

이 씨는 조사를 받고 청진으로 보내졌고 다시 고향 홍원으로 호송됐다. 그러나 호송 당하는 도중에 청진에서 호송원에게 식사를 대접한다며 따돌리고 딸과 함께 달아났다. 이 씨는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국경 초소에 다가가 대담하게 초소 경비병과 담판을 벌였다. 중국에 들여보내주면 5,000원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이 씨는 딸과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이때가 2002년 9월이었다.

그 후 이 씨는 중국 남편과 2007년 6월 한국에 나올 때까지 잘 살았고 딸도 중국에서 결혼해 살았다. 그러나 다시 북송되면 죽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남편의 양해를 구하고 남한으로 오는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경란 씨는 현재 딸과 함께 남한에서 살면서 기독교 신앙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았으며 최근 노인요양사 자격을 받아 장차 탈북노인들을 돌보며 살아가는 꿈을 키워가고 있다.#

김창범 편집위원 cbkim47@hanmail.net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