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평양 호텔서 성접대 성행
北 평양 호텔서 성접대 성행
  • 미래한국
  • 승인 2010.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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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증언]


1995년 봄 탈북민 강영희 씨(51·당시 35세)는 성실한 남편과 어린 두 자녀와 함께 평양의 강남이라고 할 수 있는 보통강구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남편은 대남선전부 소속의 일꾼으로 일했고 강 씨는 평양의 한 고급호텔에서 관리자로 일했다. 40여 명의 호텔 종업원을 관리하는 여성지도원의 한 사람인 강 씨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엘리트로서 능력 있는 당원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강 씨의 운명을 바꾸는 기막힌 사건이 일어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해 5월 초의 일이다. 당시 북한 경제가 피폐해져 변방에서는 사람들이 굶어죽는다는 소문이 들려올 무렵이다. 그날 강 씨는 호텔 로비에서 객실 손님을 맞는 종업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보위부가 ‘당을 위해 몸 팔라’ 지시

그날 호텔에는 드물게도 아프리카에서 왔다는 ‘얼굴이 새까만’ 손님들이 왔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들은 무기장사를 하는 거물급 무역일꾼으로서 북한을 자주 출입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우두머리 되는 자가 데스크에서 강 씨 쪽을 바라보면서 무엇인가 요구를 했고 강 씨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얼마 후 상관이 그를 불러 그 아프리카 손님을 위해 투숙기간 동안 서비스를 직접 하라고 요구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몰랐지만 곧 성매매를 지시하는 말임을 알아차렸다. 이미 이 계획은 평양 보위부에 보고되었고 강 씨는 당을 위해 몸을 팔아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강 씨는 몹시 당황했다. 가정이 있고 자녀가 있는 부인이 몸을 팔아야 한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강 씨는 그날 평양 보위부로 호출되어 당과 나라를 위해 몸으로 충성하라고 강요받았다. 그리고 “관계를 맺되 당의 ‘10대원칙’대로 김정일의 권위를 지켜 교제하고 화대는 최대한 많이 받아내라”는 지시를 받았다. 만약 이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이 올 것인가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강 씨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가족 몰래 자기를 희생하는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평양에서는 어느 호텔에서나 성매매는 흔하다. 당시 평양의 ‘서산호텔’이 자본주의식으로 경영되고 있었는데, 당의 지시에 따라 미모가 뛰어난 북한 여성들을 성매매용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강 씨는 호텔의 요구가 있으면 이곳에 연락하여 여성들을 불러오곤 했다.

이와 관련해 강 씨는 놀라운 고백을 했다.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 사업은 평양 보위부가 직접 관장하고 있고 중요한 외화벌이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화대로 미화 3만 달러가 요구됐고 이미 경험이 있는 거물급 외국인들은 그 비용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고 했다.

강 씨도 그날 밤에 3만 달러를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손님이 또 다른 2만 달러를 강 씨에게 개인적으로 준 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북한과 무기거래를 한다는 그는 돈다발이 가득한 가방을 열어 보이며 2만 달러를 푼돈처럼 던져 주더라고 했다. 강 씨는 3만 달러를 보위부에 전달했지만 2만 달러는 숨기고 어리석게도 흥청망청 쓰고 말았다.

집에 고급 소파를 들여놓고 고급 옷을 사 입는 등 호화생활을 한 것이 당에 고발되어 강 씨 가족은 하루아침에 평양에서 자강도 전천지역으로 쫓겨나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강 씨는 보위부에 불려가 40일간 조사를 받고 당의 돈을 편취했다는 죄목으로 교화소에서 1년을 옥살이했다.

몰래 카메라로 한국 목사들 약점 잡아

강 씨는 당시 호텔에서 일하며 알게 된 몇 가지 사실을 전해주었다. 북한의 모든 호텔방에는 몰래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24시간 감시를 한다. 특히 외국인 손님에 대해서는 직접 보위부의 담당이 붙어 철저히 감시한다.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 활용도가 높은 손님은 반드시 미모의 여성 일꾼을 붙여서 온몸으로 서비스하게 하고 깊은 남녀관계를 맺게 하여 그 증거를 녹화해 약점으로 이용한다고 했다. 한국교회 목사들이 평양에서 순진하게 당한 여러 스캔들들도 이러한 음모와 관련된 일이라고 강 씨는 전했다.

강 씨가 석방되어 남편을 찾았을 때 딸은 이미 죽고 없었다. “어린 것들이 죄 많은 이 엄마를 찾아 자강도에서 평양까지 가겠다며 천리 길을 나선 것이지요. 걷고 걷다가 다섯 살 딸은 길에서 굶어 죽었대요. 열 살 아들도 죽어갈 즈음 다행히 고마운 분이 데려다 목숨만은 건졌답니다.”

강 씨는 지금도 이 일을 생각하면 가슴을 치며 운다고 했다. 당을 믿고 당의 지시대로 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가정파탄’ 뿐이었다. 이 기막힌 결과에 후회와 분노가 겹쳐 거의 미칠 것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죄 없는 남편과는 별거하기로 하고 이때부터 강 씨는 맨 주먹 ‘장사꾼’으로 나섰다. 무산 지역의 콩을 받아다 평양 장마당에 내다팔면 꼭 두 배의 벌이가 된다는 비밀을 알고 강 씨는 장마당 사업에 눈을 뜨게 되었다. 늘 장사에 분주했지만 강 씨는 꽃제비들을 모아 먹여 살렸다. 몇 년 사이에 큰 장사꾼으로 소문이 나자 자강도 보위부원들이 들이닥쳐 조사할 게 있다는 핑계로 전 재산인 콩을 몰수했다. 강 씨는 다시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2000년, 평양으로 들어와 마침 호텔 화폐교환소에서 일하는 친구의 제안으로 겁도 없이 김정일의 비자금을 밑천으로 담배장사를 시작했다. 북한의 가짜 담배를 신의주를 통해 중국 단동에 팔면 상당한 이윤이 남았다. 장사 수완이 좋았던 강 씨는 몇 년 되지 않아 수만 달러를 벌었다. 이 돈으로 강 씨는 남동생들이 살 집을 세 채나 마련해주었고 남편과 함께 사는 아들의 양육비를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탈북을 결심했다.

가정 파탄, 살길 찾아 탈북, 그리고 남한행

1990년경 재미교포들의 북한 방문단으로 평양에 온 이모가 가족들을 상봉했을 때 몰래 성경책을 전해주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천주교도인 이모는 어린 강 씨에게 예수님을 의지하라며 손바닥 만한 십자가를 주었는데 그 십자가가 힘이 되었다. 남몰래 숨긴 십자가를 쓰다듬으며 힘들 때마다 기도했다.

강 씨는 2008년 12월 중국으로 탈북했다. 그러나 며칠 뒤 중국 화룡에서 공안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꼼짝없이 북송될 처지에 있었는데 생각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잡혀온 200명이나 되는 탈북민들 속에서 조선족 공안국장이 강 씨를 지목하여 “아까운 여자다. 당신을 도와주겠다”며 나서지 않는가? 아무 조건도 없이 강 씨는 5일 만에 풀려났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과정에서 교인들과 한 가족처럼 생활했던 화룡의 조선족교회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 교회는 강 씨가 한때 평양에서 가짜 교인으로 훈련을 받고 참석했던 장춘교회(평양 장춘구)나 선교교회(평양 선교구)와는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당시 강 씨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예배에 외국인들의 동태를 감시하며 교인 행세를 하기 위해 함께 참석했다. 이들 교회는 가짜였다. 그러나 조선족교회는 달랐다. 피아노도 치고 찬양도 하며 노인들을 보살피며 강 씨는 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따뜻한 사랑과 감사를 깨달았다고 한다.

눈물을 훔치며 긴 이야기를 마친 강 씨는 남한에서도 성공한 사업가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다행히 남동생과 조카가 남한에 함께 오게 되어 외롭지는 않다며 장차 돈을 벌어 북의 형제를 구원하는 북한선교에 나서겠다고 했다.#

김창범 편집위원 cbkim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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