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노동당 간부도 나보다 행복하지 않을 겁네다”
“평양의 노동당 간부도 나보다 행복하지 않을 겁네다”
  • 미래한국
  • 승인 2010.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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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야이기]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초순, 남한산성이 시원하게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한 아파트를 방문했다. 2005년 아들과 함께 서울에 온 탈북민 함영희 씨(66)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함 씨는 조부 때부터 지켜온 기독교 신앙을 찾아 남한에 들어오기까지 숱한 고생을 했지만 지금은 마음껏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아들과 며느리도 모두 신학공부를 하며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평양의 노동당 간부도 나처럼 행복하지는 않을 것입네다.” 함 씨는 남한에서의 생활을 전하며 환하게 웃었다.


아버지는 독립군 출신, 1959년까지 몰래 예배드려

함 씨 아버지의 외가 쪽은 선대로부터 독립군 운동에 가담해 민족정신이 강한 집안이다. 그 선대는 일찍이 함경도 주을 군수를 지냈고 일제강점기에는 소련 연해주로 추방돼 시베리아에서 살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함 씨의 아버지도 블라디보스트크의 독립군학교를 다녔으며 일본군 토벌에 참가하기도 했다. 함 씨 집안은 1920년대에 중국 용정으로 들어가 조선족으로 정착해 살면서 처음으로 기독교 신앙을 접했다고 한다.

1935년에 온 가족이 평양으로 돌아와 아버지는 러시아어 교사로서 교편을 잡았다. 당시 함 씨 가족은 지금의 주체사상탑이 세워진 동네에서 살았다고 한다. 가족들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평양의 한 교회에 출석했는데, 아버지는 그 교회 장로였고 때마다 온 가족이 열심히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전쟁 후에는 어른들끼리 집안에 모여 기도드리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고 했다. 이미 교회는 폐쇄됐지만 남몰래 드리던 비밀기도회는 1959년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그 해 온 가족이 평양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국군이 평양을 수복했을 때 함 씨 가족은 평양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중공군의 전쟁 참여로 국군이 후퇴할 때 함 씨 가족도 미군을 따라 평양을 떠난 것이 몇 년 뒤에 발각돼 반역자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교사직에서 쫓겨나 함흥의 한 벽돌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당시 딸 아홉에 아들 하나인 10남매의 자식을 먹여 살리는 일은 거의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하나뿐인 외아들이 병으로 죽어가는 고통에도 속수무책이었다. 다만 나직이 찬송하고 눈물로 기도할 뿐이었다. 주위에서는 ‘외아들이 죽었는데 저 사람들은 어찌 노래하는가?’라고 흉을 보았다.

‘평양에서 추방된 집, 예수를 믿는 집’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던 함 씨네 아홉 자매는 시집갈 나이가 되어도 희망이 없었다. 적당한 혼처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됐는지, 아홉 자매가 줄줄이 시집을 가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남편은 기독교 집안이라는 이유로 평생 노동자 생활

1960년대 중국에는 큰 흉년이 닥쳐 조선족들이 먹고 살기 위해 떼를 지어 북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집안 내력이나 성분을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함 씨 집안의 딸들은 모두 학력이 좋은 엘리트 남편을 만났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앙으로 훈련받은 함 씨네 딸들은 모여 앉으면 으레 신앙으로 교제하고 위로했으며 조선족 남편들 덕분에 김일성 사상에 물들지 않았다.

함 씨의 남편도 중국에서 돌아온 조선족 출신이었고 모태신앙의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월반을 할 만큼 머리가 좋아 사범대학까지 졸업했지만 기독교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철소 노동자로 평생 일해야 했다. 병원 경리과에서 일하던 함 씨와의 사이에 3남매를 두고 남편은 위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함 씨는 앞날이 깜깜했다. 당시 모든 배급마저 중단됐고 본격적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래도 당을 믿었는데 이젠 뭘 믿고 살지?’ 라며 함 씨는 절망에 빠졌다. 그래도 집안의 가재도구를 시장에 내다 팔며 3년은 겨우 버틸 수 있었다. 이웃에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더 이상 견딜 길이 없었다. 그래서 살기 위해 중국에 사는 시누이를 찾아가기로 작정했다.

평양의 고위층들은 여전히 호위호식하며 살고 있을 때 당의 선봉대요 돌격대로 자처한 사람들은 굶어 죽어갔다. 그들은 공장과 직장에서 붉은 기를 지키겠다고 문짝이며 유리며 지붕까지 뜯어 팔며 연명했지만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때 함 씨의 마음에는 이런 탄식이 일어났다. “아, 이것이구나. 당 일꾼들은 배급받아 잘 살지만, 인민들은 죽어가는구나. 더 이상 속지 말자”하는 깨달음이 일어났다.


중국 남양 땅의 ‘왜가리’ 탈북민들

함 씨는 남편이 생전에 늘 편지하던 중국 주소지를 가슴에 숨기고 두 딸과 아들과 함께 중국 도문이 바라보이는 남양으로 갔다. 당시 남양에는 수백, 수천 명의 북한 사람들이 하염없이 중국 쪽을 바라보며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평양은 물론 원산, 해주, 개성 등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왜가리’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도문 쪽에서는 중국서 잡힌 탈북민들이 줄줄이 묶여 비참한 모양으로 북으로 송환되는 장면이 공공연히 공개됐다. ‘너희들도 중국으로 가면 이렇게 된다’는 위협의 일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사람들은 ‘굶어죽느니 중국으로 가겠다’고 기회만 찾고 있었다.

함 씨는 가족을 먹여 살리며 중국으로 탈북할 기회를 찾기 위해 두 달이나 이 지역에서 밥장사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함 씨는 결혼을 앞둔 경비대장에게 상당한 비용을 주고 세 자녀와 함께 가르쳐준 길을 따라 두만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숨바꼭질을 하듯 조심스럽게 중국내륙으로 들어가 마침내 흑룡강성에 있는 시누이 집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함 씨 가족은 만 6년간 중국생활을 했다. 함 씨는 왕청 지역의 조선족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했고 큰 딸은 믿음이 좋은 조선족 청년을 만나 결혼했다. 또 둘째 딸은 교회 도움으로 미술학원을 다녔고 아들은 일찌감치 신학에 뜻을 두고 공부를 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온 가족이 평안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함 씨는 당시를 회상했다.

함 씨가 예수를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1999년이다. 왕청의 한 교회에 참석하면서 은혜를 체험한 것이다. 당시 함 씨는 디스크 통증과 축농증으로 큰 고통 가운데 있었다. 그때 미국에서 온 의사 출신의 재미교포 목사가 병을 진단하고 치료와 안수기도를 집중적으로 해 3일 만에 치유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또 호구조사가 실시될 때 함 씨는 목사 댁에 숨어 있었는데 그만 발각돼 공안에게 끌려갈 위급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그런데 마침 맞은편 집에 들어간 다른 공안과 조선족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공안이 그 쪽으로 급히 달려간 사이, 떠들썩한 틈을 타 함 씨는 도망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북송되고 말았는데 함 씨에게는 기도 외에 달리 길이 없었다.  아들은 북에 끌려가 죄수로서 도로공사에 동원됐다가 용케 도망해서 다시 중국으로 탈북한 일도 있었다.


목숨건 탈북과정서 체험한 기적들

비록 작은 금액이지만 함 씨는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렸다. 그는 십일조 헌금을 드리면 드릴수록 수입이 늘어난다는 체험을 했다. 200원에 불과하던 월급이 몇 달 뒤에 700원이 되는 경험을 하면서 십일조에 대한 성경 말씀을 생생하게 체험한 것이다.

함 씨가 3남매와 함께 한국행을 결심한 것은 2004년 11월이었다. 놀랍게도 딸의 시어머니를 통해 모든 비용이 준비됐다. 우여곡절 끝에 온 가족이 베트남에 넘어올 수 있었지만 한국에 들어가기까지 무려 7개월간을 기다려야 했다.

당시 80여 명의 탈북민들이 좁은 방에서 고통스럽게 기거했지만 북한 보위부 사람들의 위협보다 견딜 만했다. 당시 북한 보위부 요원 15명이 베트남으로 파견돼 베트남 경찰과 함께 탈북민들을 수색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보위부 요원들이 들이닥쳤다는 소식에 모두가 숨죽여 그들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탈북민들 가운데는 생후 4개월에서 15개월 사이의 아기가 15명이나 되었지만, 평소에는 기침소리와 울음소리로 떠들썩하던 방이 그날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함 씨는 “80여 명의 탈북민들이 모두 북송될지도 모르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셨다”며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장차 북한 땅을 해방시키는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김창범 편집위원 cbkim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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