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버림받은 탈북여성과 꽃제비 딸의 인생
북한에서 버림받은 탈북여성과 꽃제비 딸의 인생
  • 미래한국
  • 승인 2010.09.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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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이야기]


“믿고 의지하던 나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지난 8월 20일 서울 시내에서 만난 탈북민 이정숙 씨(58)는 북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사람이었다. 1997년 ‘고난의 행군’ 시절 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 탈북한 이정숙 씨(58)는 그 자신이 버림받은 사람이었지만 헐벗고 굶주린 채 죽어가는 여러 꽃제비들을 만나며 “내가 저들을 버렸다”는 부모로서의 자책감과 아픔에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자신의 딸도 꽃제비로 떠돌았기 때문에 그들을 보는 마음이 더 각별했던 것이다.


희망을 잃은 아이들

이 씨가 두만강 접경 지역인 중국 장백산 지역에 숨어 있을 때 마당의 개밥이 없어지고 널어둔 옷가지며 이불이 없어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사람들은 북에서 넘어온 꽃제비들의 짓이라고 여겼다. 한 조선족은 깊은 산속에서 죽은 꽃제비의 시신과 그 시신 사이에서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는 희망을 잃은 아이들의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씨는 북한 역전에서도 철도 주변을 떠도는 꽃제비들을 자주 보았다.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기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연명했다. 기차 바퀴 사이로 숨어 다니며 배설된 인분에서 먹을 것을 찾기도 했다. 더러운 헌옷으로 몸을 감고 두 눈을 반짝이며 기차 바퀴 사이에 숨어 있는 그들을 만나면 자신의 딸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한 번은 역전에 버려진 7구의 시체를 보았는데, 그 가운데 젊은 아버지와 6살쯤 돼 보이는 남자 아이가 서로 꼭 껴안고 죽은 모습을 보며 망연자실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꽃제비들이 언제라도 자유롭게 찾아와 먹을 것, 입을 것 등을 제공받을 수 있는 ‘꽃제비 쉼터’를 중국 국경 부근에 만드는 것이 평생의 꿈이라고 이정숙 씨는 말한다.


‘반동 가족’이라고 버림받은 인생

이정숙 씨 가정은 반동가족으로 낙인이 찍혀 북한에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며 살았다. 아버지가 6·25전쟁 때 반동단체에 속해 부역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아버지는 이 씨가 13살 때 보위부에 끌려가 총살당했고, 자녀들은 공부를 잘했어도 대학에 갈 자격조차 없었다.

이 씨는 다행히 고등중학을 졸업하고 제조회사에 관리원으로 일하다가 같은 처지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남편과 이 씨의 일거수일투족은 보위부를 통해 낱낱이 감시됐고 대를 이어 반동가족으로 버림받아야 했다.

슬하에 딸과 아들을 두었지만 자식들도 평생 반동의 신분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하니 답답했다. 그래서 부부는 자식의 장래를 위해 헤어지기로 결정하고 어린 자녀들을 양녀, 양자로 보냈다. 그러나 양녀로 보낸 5살 된 딸 ‘명희’는 엄마가 그리워 보채는 통에 돌아오고 말았다.

이 씨는 딸을 데리고 친정어머니가 사는 동네로 가서 식당 일을 했다. 불과 4년간의 기간이었지만 이 무렵이 그래도 행복했다고 한다. 명희는 할머니 집과 식당을 오가며 잘 자랐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영리했다. 힘든 삶이었지만 “엄마, 날 보세요”하며 재롱을 떠는 딸을 보는 재미로 이 씨는 살았다. 그러나 친정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뜨자 달리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이 씨는 9살 된 명희를 데리고 먹고 살기 위해 다시 시집을 갔다. 이번에는 비교적 토대가 좋은 남편을 만났다. 비록 자녀가 셋이나 됐지만 대학 교원이었으니 남들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남편은 딸을 너무나 홀대했고 반동 가정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 그대로 반영하듯 딸을 경멸하고 무시했다. 딸은 의붓아버지가 무서워 숨어 지냈고 급기야는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 나이 19살까지 10년간을 꽃제비로 살아야 했다.


기차 길을 오가며 꽃제비로 살아

열 살이 된 딸 명희는 혼자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다른 꽃제비들과 어울려 그들의 사는 방법을 익혔다. 장마당에서 밥을 훔쳐 먹고 구걸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나마 먹을 것을 찾기 위해서는 기차역이 가장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므로 먹을 것도 많았다. 명희는 가끔 보따리를 매고 이 역에서 저 역으로 오가며 물건을 전해주는 어른들의 심부름을 했다.

기차표도 없이 역무원을 피해 기차를 타고 다니는 일은 꽃제비들만의 기술이기도 했다. 그중에도 배낭에 사과를 실어 나르는 일이 가장 좋았다. 사과 몇 개는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꽃제비 생활을 하다가 한 주일에 한 번 정도는 엄마 집을 몰래 찾아가 엄마를 만나곤 했다. 그 때 용돈도 받고 옷도 갈아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씨는 딸의 행색을 보고 가슴이 찢어졌다.

그렇게 몇 년을 견디다가 명희는 15살이 다 되어서 고아원에 갈 수 있었다. 40명 정도의 아이들이 수용된 고아원은 하나의 집단농장이었다. 명희는 2년이 지난 17살 때 고아원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잠시 집을 찾아와 엄마를 만나고는 그 길로 다른 친구들과 함께 중국으로 넘어갔는데 소위 인신매매단에 팔려간 것이다.

명희는 다행히 마음씨 좋은 조선족 총각을 만나 10년이 넘도록 중국에서 결혼생활을 했다. 명희는 시댁의 가난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떡 장사를 했고 남편은 회사 직원으로 성실하게 살았다.

한편 딸이 중국에 팔려갔다는 소식에 이 씨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997년 추운 겨울, 남편과 전처 자식들과 자신의 자식들을 남겨두고 딸을 찾아 중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 자신도 인신매매단의 덫에 걸려 팔려갈 처지가 됐다. 그러나 용케 도망을 쳐나온 것이 탈북민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됐다.

이 씨는 다행히 북경의 한 한식당에서 일할 수 있었고 다음 해 정월에 딸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씨가 딸을 데려갈까봐 노심초사하는 조선족 남편 때문에 자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서로의 안부는 확인할 수 있었다.


감방에서 체험한 기도의 응답

몇 년 동안 식당 일에 열심을 다한 이 씨는 돈을 차곡차곡 모아 북한에 있는 혈육인 두 남매를 데려오기로 했다. 그러나 2005년 5월 둘째 딸을 데려오는 과정에서 그만 중국 공안에 걸려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 이 씨는 북경의 한 조선족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을 갖게 될 무렵이었다. 그는 자녀들과 함께 모여 살 수 있도록 날마다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씨와 딸은 중국 변경의 한 감방에 억류돼 북송될 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기도 밖에 없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CCTV로 감방을 감시하던 간수가 한 탈북민의 이상한 모습을 발견했다. 음식도 먹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두 모녀는 밤낮 없이 부르짖었다. 구금된 지 한 달이 되는 날, 조선족 출신의 책임자가 한 가지 요구조건을 대며 이 씨를 석방했다. “중국 돈 1만원을 가져오면 딸을 풀어 주겠다”는 것이다.

이 씨는 자신이 아는 식당과 교회를 다니며 하소연을 했지만 그만한 돈은 마련할 길이 없었다. 절망하던 중 뜻밖의 연락이 왔다. 식당에서 함께 일하던 조선족 언니가 돈 3,000원을 주겠으니 딸을 구해보라고 했다.

이 씨는 그 날로 감방으로 달려가 책임자를 만나 하소연했는데 그는 놀랍게도 돈을 요구하지 않고 딸을 석방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책임자는 “한 달이 지나도 당신이 나타나지 않아 딸을 북송하려 했다”며 “사실은 당신의 열심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감사했다.


한국 입국과 계속되는 딸의 ‘탈북’ 생활


둘째 딸과 함께 중국생활을 한 지 2년이 지날 무렵 2007년 1월 이 씨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이번에는 아들을 탈북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가족이 3명으로 불어나자 거처가 어려워졌다. 방을 얻기도 힘들었고 그만한 돈도 없었다. 주민의 신고나 중국 공안의 검문에 발각되면 북송돼야 할 위험천만한 처지였다. 죽든 살든 중국을 떠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중에는 500원 밖에 없었다. 북경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버스터미널로 가서 아무 버스나 탔다. 당장 북경을 벗어나 어디론가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청도’ 행 버스였고 하루 종일 달려가서 청도에 내렸으나 이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찾아 나선 곳이 십자가가 달린 교회였다. 걷고 또 걸으며 6곳의 교회를 찾았지만 모두 도움을 거절당했다. 너무 지쳐 마지막 교회 예배당 의자에 앉아 “주님,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고 절망적인 기도를 드리며 쉬고 있을 때였다. 60대의 한 노인이 들어왔다.

그 노인은 “하나님이 당신들을 보내주셨군요”라며 이 씨 가족을 청도의 한 한인교회로 인도했다. 이 씨 가족은 교회의 도움으로 7개월을 청도에 머물 수 있었고 그 후 선교단체의 도움으로 태국을 거쳐 2007년 9월 마침내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꽃제비 딸은 다시 북송돼

그러나 태국에 머무는 5개월 동안 70평 방에 300명이 수용돼 지옥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그때 수용소에는 북송된다는 소문이 돌며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때 이 씨는 40여 명의 기독교인들을 규합해 3일 금식기도를 제안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하나님에게 북송을 막아 달라고 부르짖자는 것이었다.

태국정부와 한국대사관 그리고 유엔 기관까지 나서서 위험한 금식을 중지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그들은 “여기서 죽으나 북송되어 죽으나 매 한가지”라며 금식했고 결국 그들의 뜻이 관철돼 한국행이 결정됐다.

그러나 이 씨는 아직도 가슴이 시커멓게 타드는 남모르는 고통을 안고 있다. 어린 시절 꽃제비로 살았던 첫째 딸 명희가 이 시간 북한 감옥에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 남편을 만나 10년이 넘도록 딸을 낳고 중국에서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했지만 북한 사람이라는 신분이 발각돼 북송되고 말았다.

이 씨는 “꽃제비로 살아온 딸 명희의 탈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이 반드시 딸을 구해주실 것”이라며 믿음을 잃지 않았다. 

김창범 편집위원 cbkim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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