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들어 서구식 민주주의가 도입됐지만, 결국 유구한 중세 정치 전통의 짐을 내려놓지 못한 채 물리적 힘을 바탕으로 한 권위주의 철권독재 정치가 지속됐다. 이러한 역사에 비춰보면, 올 1월 학사 출신 튀니지 소도시 노점상 부아지지의 분신 자살로 촉발돼 튀니지와 이집트의 독재정권을 종식시킨 민주화운동은 이슬람 역사에서, 특히 아랍 역사에서 신기원을 세운, 실로 경이적인 사건이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랍역사의 신기원 중동혁명
이슬람은 세상을 창조하고 주관하는 유일신 하나님(아랍어로는 알라) 앞에 모든 피조물이 평등하다고 가르친다. 똑 같은 가르침을 펴는 그리스도교 세계와 달리 왜 민주주의가 꽃피지 못했는지 의문을 품는 것은 일견 당연한 듯 보인다.
그러나 불과 200여년 전만해도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리스도교를 포함해서 그 어떠한 종교체제나 문화도 민주주의와 합치하지 않았다. 따라서 구태여 이슬람을 비민주주의적인 종교라고 비난하고 오늘날 이슬람 문화권 국가에서 횡행하는 반민주적 악행을 무조건 이슬람 때문이라고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무슬림들 역시 이슬람과 민주주의가 서로 궁합이 맞는 것인가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다. 이슬람이 민주주의와 상극이라고 보는 대표적인 인물은 파흐드(Fahd 1921~2005) 사우디아라비아 전 국왕이다. 그는 “현대세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이 지역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투표제도는 이슬람 신앙에 없다. 이슬람 정부는 조언과 협의의 정부로, 목자는 그의 양떼에 관대해야 하고, 백성들 앞에서 통치자가 모든 책임을 진다”며 이슬람과 민주주의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이슬람과 민주주의가 합치하지 않는다고 보는 무슬림들은 국민 주권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 개념이 신의 권위를 중시하는 이슬람과 맞지 않는다고 본다. 이러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은 종종 왕정을 대안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신의 법을 수호하는 의로운 통치자를 민의에 의해 선출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이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전제적 왕권의 존립 근거가 되는데, 특별히 종교적 권위주의로 통치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그 대표적인 예다.
소수의 진보적 무슬림은 민주주의 포용
이와는 달리 이슬람과 민주주의가 합치한다고 주장하는 무슬림들은 신의 주권이나 이슬람법(샤리아)에 의한 통치에 대해 의문을 품지는 않지만, 하나님 외에 신은 없다는 유일신 가르침이 보여주듯, 유일신 외에 그 어떤 존재도 권위를 내세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기에 한 사람의 통치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신의 주권을 강조하는 이슬람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보편적 가치로 받아들이는 진보적인 무슬림들의 경우, 대중 주권 원칙에 따라 만들어진 법과 상치하는 것이 이슬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인간이 만든 법은 이슬람의 원칙에 합당해야 하지만,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오류가 없을 수 없으며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고 본다.
또 꾸란이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데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누구도 신과 믿는 자 사이에 관여하거나 믿는 자가 신실한지 아닌지를 감히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국가에서는 비무슬림들도 동등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을 정도로 민주적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소수 무슬림 지성인들의 생각에 머물러 있는 한계가 있다.
위와 같은 진보적인 생각은 대중 여론이 지나치게 중시되면 무질서와 분열로 이어지기에 이슬람법을 수호하는 강력한 정부가 이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 무슬림들의 전통적 사유방식이다. 이슬람법이란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직접 내린 신의 계시라고 무슬림들이 믿는 꾸란, 무함마드의 언행을 담은 하디스를 바탕으로 구성된 이슬람의 생활지침으로, 신앙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 대한 법규다. 생활규범을 세세하게 담은 유대율법, 로마 가톨릭의 교회법과 유사하다.
민주적이지 않은 ‘이슬람 민주주의’
무슬림들은 이슬람법이 삶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에 정교분리에 기반을 둔 서구식 세속적 민주주의가 이슬람과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안으로 정교일치의 이슬람 민주주의를 내세운다. 이란의 정치체제가 대표적인 예다. 개혁파 지도자로 불리는 하타미 전 이란 대통령은 정교분리의 민주주의가 “영성의 공백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고 주장하고, 이란의 이슬람식 민주주의는 서구가 잃어버린 영성을 지닌 민주주의라고 자평한다.
그런데 문제는 ‘영성’을 살린 이란의 이슬람 민주주의가 그다지 민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집트 하산 알 반나가 창시한 무슬림 형제단, 파키스탄의 마우두디가 만든 자마아테 이슬라미 등 이른바 이슬람국가를 주창하는 무슬림들의 정치사상과 공감대의 폭이 가장 큰 이란 이슬람 민주주의에서 이슬람법(샤리아)의 이름 아래 여성과 비무슬림은 2등 시민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시린 에바디 여사는 지적인 능력이 남성보다 못한 여성이 재판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1979년 이란혁명 직후 이란 최초의 여성 판사 자리에서 쫓겨났다. 상속 시 남성이 여성보다 2배 더 받는다는 꾸란 구절을 확대 해석하면 여성이 모든 면에서 남성보다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
또 무슬림 남성은 비무슬림 여성과 결혼을 할 수 있으나 무슬림 여성에게는 그러한 자유 없이 무슬림 남성과만 살아야 한다. 비무슬림은 시민으로서 무슬림과 평등한 존재가 아니라 무슬림의 보호를 받는 존재다.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은 여전히 중세에나 통할법한 ‘비무슬림에 대한 인두세 부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단원들끼리 논란을 벌였다.
최근 이슬람 문화권에서 불고 있는 민주화 열풍이 종교적 논쟁을 떠나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를 갈구하는 데서 시작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고무적이다. 이란의 젊은이들과 지식층은 이슬람 정치체제를 완고하게 고수하는 이들이 보여주는 이슬람이 보편성을 상실한 ‘그들만의 이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아랍세계의 국민들도 이란의 실패를 통해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이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이번 아랍의 민주화 열풍이 종교적인 성격을 띠지 않은 것은 참으로 비인간적인 ‘그들만의 이슬람’이 생산해 내는 처참한 비민주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 생각이 다른 것은 신의 축복”이라고 한 예언자 무함마드의 말을 따라 다양한 생각이 공존하며 서로 존중하는 민주주의가 이슬람과 합치한다는 사실을 무슬림들이 모를 리 없다고 믿고 싶다. 중동의 무슬림 지도자들도 그 말씀을 따르리라 믿는다. 예언자의 말씀이니까.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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