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명박 정부의 실패와 희망
[칼럼] 이명박 정부의 실패와 희망
  • 미래한국
  • 승인 2011.05.13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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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근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이명박 정부는 표류하고 있지만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패착은 ‘경제 대통령’을 내세운 데 있다. 경제대통령은 ‘경제대통령론(論)’이라는 선거과정에서의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이 구호를 버렸어야 했다. 경제 운영에 왕도가 없음을 밝히고, 자신이 솔선하고 국민에게 땀과 눈물을 요구했어야 했다. 경제대통령을 자신의 브랜드로 착각, 스스로를 실적주의에 가뒀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CEO로 착각하고 있다. 대통령은 ‘생각하는 직업’이지 ‘실무를 하는 직업’이 아니다. 경제에서 이해관계는 늘 교차하기 마련이다. 한 문제의 해결이 다른 문제 발생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문제 해결 위주의 실적주의는 일정한 방향성이 없어 좌충우돌할 수 밖에 없다.

‘경제대통령’이라는 허상

이명박 정부는 ‘비즈니스 프렌들리’로 출발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정책 아이콘이지만 ‘철학적 기초’가 담겨 있지 않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통해 사실은 폐기했어야 할 아젠더 인 ‘747’ 공약을 추진하려 했다. 강만수 장관의 고환율(원화가치 절하) 발언 등은 실적주의와 닿아 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대신 ‘마켓 프렌들리’ 또는 ‘친시장’처럼 원칙이 선 경제정책을 수립했어야 했다. ‘친기업’ 같이 특정 계층에 대해 ‘친(親)’을 붙이는 것은 위험하다. 결국 모든 계층에 ‘친’을 붙여야 한다.

‘친서민’으로의 급선회도 ‘실적주의’의 발로이다. 5년 단임 정권에서 좌고우면할 이유가 없다. 국정지지도 또는 정치적 인기를 정권의 성과로 착각, 인기라는 실적을 쌓으려 했다. ‘친서민적 사고’와 ‘친서민 모드’를 탓할 이유는 없지만 자원배분을 전제로 하는 ‘친서민 정책’으로 공식화하는 것은 신중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포퓰리즘이 됐다. 포퓰리즘은 더 큰 포퓰리즘을 부르게 된다.

또 다른 실적을 찾아 MB가 회심의 반격을 한 것이 ‘공정사회’이다. ‘철학 부재’라는 비판을 잠재우기 위한 MB의 ‘회심의’ 반격카드이다. 치열한 문제제기와 성찰과정을 생략하고 ‘공정사회론’을 화두로 던졌다. 그러나 이는 기회균등, 약자에 대한 배려, 공직자에 대한 높은 도덕성 요구 보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적인 정책을 쏟아내는 통로로 변질됐다.

정의와 도덕이 통치수단으로 쓰여서는 안 된다. 자유가 도덕의 본질이다. 공정사회는 좌파개념이다. 차라리 ‘책임사회, 신뢰사회’를 화두로 던졌어야 한다.

‘소통 부재’라는 굴레를 자초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소통 부재는 숙명과도 같은 굴레이다.  정치적 반대세력은 이 대통령의 소통 부재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소통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지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화합도 공존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통 부재를 강조하는 것은 야권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통령을 끌고 오기 위한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MB정부는 소통 부재 정권이라는 것으로 속절없이 말려들고 있다.

돌아갈 초심과 원칙이 없다

레이건 대통령과 대처 총리가 소통에 실패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정책과 이념 그리고 가치를 정치적 라이벌이 아닌 국민과 소통했다. 소통은 국민을 설득하는 과정이다. 레이건과 대처는 분명한 지향점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들의 노선을 국민들에게 차분하게 설득해 나갈 수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념과 가치에서 일관된 지향점이 없었기 때문에 국민과 ‘소통할 그 무엇이’ 없었다. 경제대통령이라는 허상만 남게 됐다.

대북문제에서 성과를 올린 것은 원칙을 따랐기 때문이다. 전임 대통령들이 많은 돈과 원조를 김정일에게 제공하고 정상회담을 얻어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오히려 손을 벌린 북한 정권이 한국보다 도덕적 권위와 우월적 지위를 누렸다. ‘돈을 주고 산 평화’는 실용주의에 비견될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비겁한 평화라도 전쟁보다 낫다”는 상징이 이를 웅변한다. 이명박 정부가 대북문제에 있어 일정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비핵화와 상호주의라는 대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즉 실용주의를 버렸기 때문이다.

인기라는 신기루를 쫓은 결과 이명박 대통령은 CEO ‘경제 대통령’으로, 국민의 눈물을 닦아 주는 ‘온정적 대통령’으로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친기업, 친서민, 중도, 실용, 공정사회 등 모든 카드를 다 내보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국민의 지지를 얻은 것은 아니다. 그나마 쌓아온 국정지지도는 전세대란과 구제역이라는 쓰나미에 힘없이 무너졌다.

원칙 없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인기를 쫓은 것이 죄라면 죄이다. 인기는 포말이며 정치적 자신이 될 수 없다.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조언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솔직히 ‘돌아갈 초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반전을 꾀하기엔 이미 늦다. 이명박 대통령은 일중독에 빠져 스스로 과적(過積)해 왔다. 대통령이 주유소 기름 값을 따지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을 것이다. 역대 정권 중 가장 기업과 ‘불필요한’ 각을 세운 business unfriendly 정부이다. 비판적 지지층인 기업인과 중산층의 이반은 당연하다.

초과이익공유제도, 동반성장지수개발은 정확히 표현하면 넌센스이다. 이익은 혁신과 위험부담 행위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다. 2인3각 경기가 동반성장일 수는 없다. ‘미주알 고주알’의 대통령의 이미지는 고착화된 상태이다. 정치에 감동이 없다 보니 자신의 밥그릇(국정지지도)도 못 찾아 먹는 형국이다.

좌절했기에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실패를 보수의 가치와 정체성을 정립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념과 가치의 경계인을 자처하지 말아야 한다. 제3의 길은 없다. 참여정부는 철저히 실패했지만 최소한 자신들이 견지한 이념과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레이건과  대처의 성공은 경제를 회생시켜서가 아니다. 자유주의, 시장주의, 법치주의, 책임과 선택의 가치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민주주의’, ‘경제적 시장주의’의 이념을 토대로 경쟁, 재산권, 선택, 책임의 핵심가치를 견지해야 한다.

좌파를 거부해야 하는 이유는 포퓰리즘과 큰 정부에 빠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공동체주의, 보편적 복지, 평등과 국가의 적극적 역할, 온정적 간섭주의 등이다.
개인을 왜소화시키고 국가에 대한 의존을 타성화하며 개인에서 국가로 힘의 이동을 하는 것, 장기 침체와 높은 실업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 장기 실업으로 사회와 경제 모두 침체되는 사회 등 좌파가 지향하는 정책은 가난에 이르는 길이다.

보수가 시대정신이고 보수세력이 한국의 ‘중심세력’이어야 할 이유는 ‘오늘의 한국’을 이룬 기적, ‘자랑스런 한국’을 이룰 기적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자유, 책임, 신뢰, 배려가 있어야 희망 한국, 미래 한국의 기적을 새로 쓸 수 있다.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미 신시내티대 경제학박사
시장경제제도연구소 이사장 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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