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파괴세력 많은 지금, 6·25 당시 분위기와 닮았다”
“대한민국 파괴세력 많은 지금, 6·25 당시 분위기와 닮았다”
  • 미래한국
  • 승인 2011.06.2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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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한미우호협회 대화의모임

(사)한미우호협회는 6·25 61주년을 맞아 매월 열리는 ‘대화의 모임’의 일환으로 지난 6월 11일 남산 서울클럽에서 관련 토론회를 가졌다. 이날 모임은 한철수 협회 회장이 ‘6·25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주제로 발표했고 이후 참석자들이 소감을 나누는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발표 및 대화 내용을 소개한다. 

 
한철수 한미우호협회 회장·예비역 육군대장

6·25의 실상을 후세들에게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젊은이들은 6·25를 역사로만 인식하고 있다.
6·25가 일어나게 된 배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겠다. 중국은 예전부터 패권을 행사해 우리는 중국으로부터 왕권을 승인받는 속국과 같았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메이지유신으로 서양문물을 도입, 과학과 군사 기술이 선진화됐다. 메이지유신의 성공은 강력한 지도자가 있었고 섬나라여서 중국의 위협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반도를 영향권에 두려는 중국과 대립해 일어난 것이 청일전쟁이다.

6·25를 몰고 온 국제 정세

당시 유럽에서는 영국, 프랑스, 독일이 제정러시아와 반목했는데 이들 3개국은 제정러시아가 아시아를 선점하면 그들에게 불리하게 될 것을 우려해 일본을 지원하게 된다. 영국이 일본을 도와 일어난 것이 러일전쟁이다. 이런 국제 상황에서 한반도는 이후 일본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된 것이다.
2차 대전 때 프랑스는 드골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다. 영국에 망명한 프랑스의 많은 인사들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싸웠고 프랑스 내 지하조직과 협력해 대독일투쟁을 했기 때문에 전후 전승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국토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우리 선열들도 희생적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독립운동에 힘썼다. 광복군을 조직하고 국내에서도 조직적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광복군은 연합군의 전력으로 인정할 만한 기여를 하지 못했다. 미국은 광복군을 참전하게 하려 했지만 원자폭탄 투하로 전쟁이 일찍 끝나자 별다른 기여를 못했다. 이후 미국과 소련 군대가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남북으로 분할해 진주하게 된다.

2차 대전 후 소련은 동구권을 위성국가로 만들고 중국, 베트남까지 공산화한다. 소련은 러시아 때부터 숙원인 한반도에서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미소의 패권 다툼 속에 북한에 들어오게 됐다.
장개석의 중국 국부군이 1949년 모택동에게 패하지 않았다면 강력한 자유시장주의 국가 중국이 있어 6·25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해방 당시는 공산주의를 경험하지 못하고 어려운 시절이어서 사람들에게 공산주의 이론이 잘 먹혀들어갔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한에 수십만명의 공산주의자가 있어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면 이들이 일어나 금방 공산화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김일성은 이 말을 믿고 스탈린에게 가서 “미군이 참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전쟁을 일으키면 남한에서 봉기한다. 군사 지원만 해달라”고 지원을 요청해 승인받았다.
중국은 모택동이 국공내전 승리 후 국부군 출신 병력을 줄여야 했고 북한에 미군이 들어오면 불리하다고 판단해 김일성을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스탈린과 모택동이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한 이유

국공내전 당시 독립운동을 하거나 가난해서 간도로 이주했던 조선민족이 중공군으로 많이 참여하고 있었다. 약 4개 사단 4만~5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모택동은 이들 4개 사단을 병력과 장비 그대로 김일성에게 줬다. 그것이 후에 북한 1, 4, 5, 6 사단이 된다. 전투 경험이 많은 지휘관, 장비 모든 것을 갖춘 이들 부대가 인민군의 주력으로 6·25에 참전한 것이다. 당시 T-34 전차는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무기였는데 북한은 이것을 소련으로부터 240~250대 지원받았다. 바주카포 수백문, 공군기도 도입했다.

미국 지도자들은 한반도가 첨예한 냉전 대립의 현장이 될 줄 몰랐다. 일본이 민주화만 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해 애치슨라인을 발표,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하게 된다.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철수하는 미군이 장비 등 한국군의 전투능력을 제대로 갖춰주지 못했다. 그나마 6·25 발발 후 미국이 신속하게 개입해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다.
1953년 휴전협정 체결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주한미군에 의해 전쟁이 억제되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북, 정규전·비정규전 함께 하는 전략 수립

김정일체제의 남한적화전략은 바뀐 것이 없고 오히려 더 악랄해졌다. 남북의 잘 훈련된 수백만의 군대가 대치하고 있다. 해방 당시 박헌영이 심어놨던 남한 내 공산주의세력과 같이 지금 종북좌파들이 득세하고 있다.
북한은 군사적으로는 한미연합군을 상대로 이길 수 없어 남한을 적화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정규전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 정규전과 비정규전을 함께 하는 전략을 만들었다. 휴전선에서는 정규전을 하고 남한 각지에 특수부대를 침투시키는 전략이다.

태백산맥을 통한 육지 침투, 공중부양선을 통한 해상 침투, AN-2기를 통한 공중 침투가 그것이다. 고속도로, 원전 등 시설을 파괴하고 컴퓨터 기능을 마비시키는 전략을 개발했다.
그런가 하면 통일전선전술의 기술적인 부분인 민족기획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세 침입으로 배타적인 우리 민족의 정서를 이용해 미군이 남한에 있어 통일이 되지 않는다며 ‘우리 민족끼리’를 내세운다. 6·15 선언의 ‘자주·민족’도 그런 맥락이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난 후 6개월이 지난 12월 대선 때 좌파세력은 미국의 사과와 보상으로 다 끝난 동두천 미군 장갑차 사망 사고를 ‘우리 민족끼리’ 전략으로 들고 나와 노무현 후보를 당선시킨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과 전시작전권 환수 추진에 합의했다. 1000만명 서명운동 등의 노력으로 2015년까지 연기하기로 합의됐지만 다시 친북정권이 들어서면 주한미군 철수 우려가 있다.

좌파진영은 내년 총선, 대선을 대비해 세력 결집에 힘을 모으고 있지만 보수진영은 안이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김정일과 종북세력이 다시금 전선을 조성하고 있다. 6·25는 아직 계속되고 있다.


토론
 “6·25와 이승만의 진실을 바로 알리자”

이석복  대한민국지키기불교총연합회 사무총장

국민들에게 바른 역사관을 심기 위한 실천이 중요하다. 이인수 박사의 도움을 받아 ‘6·25와 이승만’(부제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이라는 책을 발간해 중고생을 대상으로 독후감대회를 열고 있다.
학생들이 “이승만 하면 독재자, 3·15부정선거 밖에 몰랐는데 이 책을 보고 이승만의 군인 사랑,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대통령이 있었기에 나라가 잘 된 것이다”라는 말을 한다. 군에도 배포하고 있는데 군 지휘관들이 “대통령이 이렇게 고뇌하며 정치, 사회, 외교 문제를 탁월하게 해결했다는 데 감동받았다”고 한다.

이번에도 전쟁기념관에서 ‘그림으로 본 6·25’라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전시회를 한다.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북침, 남침에 대해 질문하면 북침이 30%, 남침이 30%, 나머지는 모르겠다고 응답한다. 대답을 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북침, 남침이라는 말 자체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남침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것이고 북침은 남한이 북한을 침략했다는 의미인데 남침은 남한이 침략한 것, 북침은 북한이 침략한 것으로 아는 경우도 많다. 제대로 된 용어 설명과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일이 시급하다.

이상연  전 안기부장

젊은 세대가 6·25의 진실을 모르는 것은 그들을 가르치는 세대 즉 우리 기성세대의 책임이 크다.
이승만이 해방 이후 건국 전까지 3년 동안 어떤 공조직의 직책도 없이 오직 나라를 위한 일념으로 노력했기에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설 수 있었음을 평가해야 한다. 소련 공산주의자들은 2차대전 참전 전부터 한반도에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미국이 승전에 취해 있을 때 한반도 공산화 전략을 추진해나갔다. 북한은 1948년 9월 9일 정부 수립 전에 이미 강동정치학원에서 비정규군 2,400명을 양성 남파해 빨치산에서 공비로 활동하게 했다.

6·25는 물자지원까지 포함 21개국이 한국을 도운 국제전쟁이다. 미군이 없었으면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이 6·25 전후 맥아더사령부가 정보를 독점해 공산주의자들의 정보를 오판해 6·25가 일어났다.
전쟁 중 미군이 많은 희생을 치르며 전쟁을 치렀다. 한국군을 육성하는 데도 노력해 오늘날의 대한민국 강군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것에 감사해야 한다.

이인수  건국대통령이승만기념사업회 부회장

우남은 1942~1943년 미국의 정책이 이대로 간다면 한반도에 전쟁이 난다고 예견했다. 한국사람이 대일전쟁에 참전하고 한반도에는 남북한 통틀어 미군이 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정보력이 약해 미국이 일본을 이기려면 미국 젊은이 100만명이 희생돼야 한다고 오판해 소련의 참전을 요청했다.
원자탄을 투하하면 소련의 참전 없이도 이길 수 있었다. 소련군이 주둔하는 곳은 공산국가가 세워지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면서 소련의 한반도 적화 계획이 있었다.

김용선  전 LG인화원 원장

민주주의는 국민의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 지금 좌파세력이 민족이라는 말을 내세우지만 이 말은 일본에서 나온 말이다. 서양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다. 민족은 문화가 같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남북한이 인종은 같지만 민족이 같다고 할 수 없다. 한국이 급변사태를 당해 혹시 북한이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될 경우의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

박 근  유엔 대사

핵무기를 만드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가 1등국가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주의 기초는 자유다” 말했다. 사회주의자들은 명분을 찾기 위해 계급, 공동체, 평등을 주장하지만 평등은 인격, 인간 존엄성의 평등이지 가진 것의 평등이 아니다.

박영인  세계식량농업연구원 원장

6·25를 맞아 나라를 생각하며 유익한 대화를 나눠 기쁘다. 모든 것은 정도(正道)가 있다. 상황에 따라 변하더라도 결국 바른 길로 가게 된다.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승리할 것이다.

박정훈  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 고문

뜻 깊은 모임에 오랜만에 나왔다. 2012년은 중요한 해이다. 잠재된 종북세력이 기회를 보다 서서히 일어나는 징후가 보인다. 잘 대비해야 한다.

정리 강시영 기자 ksiyeong@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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