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기억한다- 5인의 순교자가 이룬 기적
6·25를 기억한다- 5인의 순교자가 이룬 기적
  • 미래한국
  • 승인 2011.06.24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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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형좌 국민통합선진화행동본부 사무총장

   

 

김형좌 국민통합선진화행동본부 사무총장(77)은 아스팔트 우파다. 동시에 목사이다. 그의 하루는 스케줄로 꽉 차 있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약관의 젊은이 보다 더 활력이 넘친다. 그의 활동은 북한 공산집단의 잔악함과 폭압성을 알리는 애국집회를 조직하고 시민 참여를 독려하는 일이다. 2,000여 명의 회원이 참여하고 있다. 김 목사의 고향은 전북 김제 봉남면이다. 그가 조직한‘새호남 애향회’는 호남 보수운동의 중요한 핵이다. 호남향우회를 조직한 이유는 김 목사 스스로 6·25를 통해 좌익의 간악함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6·25가 돌아올 때마다 그는 고향의 마을과 한 예배당에서 있었던 사건을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형님이 봉산교회 집사였어요. 김형배라고. 해방 후 대동청년단 부단장을 맡고 있었고 이승만 대통령의 직계라인이었지요촌들이 있었는데 좌익활동을 했어요. 이들이 6·25 직전에 체포돼 경찰서에 연행됐죠. 그때 사촌들이 형님에게 애원을 했어요.‘형배야. 제발 살려다오.’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형님이 백방으로 탄원하고 계도를 약속해 처형될 목숨들을 구해줬어요. 그해 8월이었지요.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왔고 당시 아무 것도 몰랐던 내가 직접 교회 종을 쳤죠. 인민군과 좌익들이 교인들을 상대로 인민재판을 열었어요.

그때 형님이 목숨을 구해 준 사촌들이 직접 형님을 고발하고 묶어 데려갔죠. 죽도록 때리고는 두 눈을 꼬챙이로 파냈어요. 그리고는 근처 모래사장에 생매장을 해버렸습니다. 그때 아무 죄도 없는 성도들이 함께 죽었어요. 심지어 친형이 국군 장교였다는 이유만으로 교회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학생을 끌고가 처형했지요. 그때 저는 좌익들이 용서할 수 없는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교회 성도가 성도를 탄압하고 고발

1950년 8월 26일 전라북도 김제의 한 작은 마을과 예배당에서 벌어진 사건은 현대사에서 잊혀져 있다. 6·25전쟁 발발 후 군산을 점령한 인민군 6보병사단과 이리를 점령한 4보병사단이 만경강에 진주하자, 전북 경찰대와 김제 경찰 병력은 변변한 교전도 없이 후퇴했고, 김제 지역은 이튿날 북한군 15보병연대에 의해 점령됐다. 이날 이후 9월 중순경까지 정치보위부 산하의 치안 조직과 면.리 단위 인민위원회가 지방 좌익들의 도움을 받아 우익 인사와 기독교인을 통제하고 숙청하기 시작했다.

“강 선생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있었어요. 교회 주일학교 교사를 했었죠. 그가 어느 날 사람들이 함께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거기에‘공산당멸사회’라는 글씨가 써 있었어요. 사진만으로 보면 반공인사들로 보였지요. 그 강 선생이라는 사람이 사진 속의 사람들을 찾아 다녔고 그들을 인민위원회에 넘겼죠. 믿는 사람이 그런 천하의 몹쓸 짓을…”

김 목사는 말끝을 잇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공산당멸사회’라는 사진 속의 글자는‘청년면려회’라는 글자를 강 씨가 바꾼 것이었다. 당시 ‘청년면려회’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앤더슨이 창시한 모임으로 헌신예배와 금주, 금연 등의 절제운동을 주도하던 모임이었다. 사진을 조작한 그는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혈안이 됐다고 김 목사는 증언한다.

“사탄이 들어왔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어요. 교인들이 무서워 예배당을 나오지 못했고 협박과 회유에 넘어간 몇몇 교인들이 함께 선동에 나서기 시작했지요. 가족처럼 지내던 교인들끼리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고발해야만 했어요. 정 장로라는 분이 계셨는데 협조를 안하자 가족이 보는 앞에서 몽둥이로 때리기 시작했지요.“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나 죽네.” 비명 속에 돌아가시는 모습을 그 부인이 울면서 지켜봤죠.“

권태술·김일천·정기봉·나백두·고순동 등 5명의 교인이 함께 희생됐다. 이튿날에는 금산교회 교인이며, 대한독립촉성국민회원인 지주 김두현(당시 56세)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전황이 인민군에게 불리해져 김제에서 퇴각할 때에도 학살이 있었다. 9월 27일에는 일제 때 김제경찰서 형사부장을 지냈고, 당시 영단(농협)에 다녔던 임정규(당시 39세)가 김제내무서 길 건너 앞 야산 공터에서 지방 좌익에 의해 살해됐다. 같은 날 만경면 분주소에서 지방 좌익에 의해 지주였던 정판석(당시 52세)과 부인 김이례(당시 44세), 아들 정태봉(당시18세), 딸 정금주(당시 20세), 젖먹이 아이 2명 등 가족 6명이 만경면 분주소 내 우물과 방공호에서 지방 좌익에 의해 살해됐다.

1950년 7월 25일부터 9월 28일 사이 인민군 치하 및 치안 공백기에 김제에서 희생된 크리스천, 우익인사, 부유층, 지주 및 가족은 최소 208명에 달했던 것으로 인권위는 밝히고 있다.
김 목사는 당시 잔인하게 학살을 저지른 이들이 아직도 잘 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을 찾아내 단죄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북한 공산집단을 망하게 하는 것이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고 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잖아요. 그들도 어쩌면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하고 있을 겁니다. 피를 피로 씻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저 사탄 마귀의 집단인 김정일과 공산집단은 반드시 궤멸돼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자들의 올바른 선택입니다.”

김형좌 목사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호남 보수운동 위해 ‘새호남 애향회’ 조직

김 목사는 요즘 한나라당이 보수이념을 버리고 좌편향되는 것을 보노라면 6·25의 비극이 새삼 떠오른다고 했다. 김 목사는 비록 고향이 호남이지만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준엄했다. 한때 그는 김대중 대통령이 잘 해나갈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김 목사가 2006년 조직한‘새호남 애향회’는 지난 2006년 북한 핵실험을 계기로 발족했다. 당시 DJ의 사저가 있는 동교동 골목길에서 이 단체는“김대중이 대한민국 현실정치와 역사에 끼친 해악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리만치 많다”며“김대중은 일찍이 잘 훈련된 청년공산당원 출신답게 선전선동수법을 능란하게 구사해 호남인의 정서를 볼모로 잡는 데 성공하고‘양심 가면극’으로 친북세력의 지지를 결집시켜 대통령 4수만에 집권에 성공한 협잡의 달인이었다”고 성명을 통해 비난하기도 했다.

“단지 동향이라는 이유 하나로 색깔도 안 가리고 사기 협잡꾼 김대중을 맹목적으로 지지한 것이 너무나 억울했어요. 그것이 부끄러워 어머니연합과 다른 애국진영들과 함께 새호남 애향회를 만들게 된 것이지요. 김대중이 아니었다면 김정일 정권은 벌써 멸망했고 김대중이 없었다면 노무현 깽판 정권도 탄생치 않았을 겁니다.”

김형좌 목사는 이제 DJ에 대한 평가가 끝난 만큼 호남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재인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울러 호남에서 민주당 일색인 정치판형도 이제는 호남인들의 손으로 갈아 엎어 좋은 인재들이 한나라당에도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 목사는 이를 위해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광주시장 후보로 호남 출신의 정 훈 후보를 내세워 한나라당과 보수단체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하지만 김형좌 목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랑과 화합이다.

“60여 년전 고향마을과 예배당에서 일어난 사건을 생각하면 살기 위해 목사님에게 제발 세례교인 명단에서 자신을 빼달라던 집사님들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아요. 하지만 돌이켜 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5명이 순교했어요. 그 결과 지금은 크게 성장했죠. 사울이 스데반을 돌로 처형하는 것에 찬성했다가 길에서‘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하신 주님을 만나 회개했던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그 작은 교회에서 회개와 부흥이 일어났던 겁니다.”

작은 지하 셋방 겸 그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는 그렇게 끝났다. 인터뷰 중간 중간에 그의 휴대폰과 팩스는 수없이 울려왔다. 6월, 100만 애국 집회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추한 그의 작은 지하 셋방이 새삼 위대한 광장처럼 느껴졌다.

대담 정리 / 한정석 편집위원 前 KBS PD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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