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연구는 이렇게 태동했다
이승만 연구는 이렇게 태동했다
  • 김범수 편집위원
  • 승인 2011.08.15 14: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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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인터뷰 /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현 이승만연구원) 초대 소장 유영익 교수
   
 

역사학자 유영익 교수(한동대 T.H. Elema 석좌교수)는 한국 현대사 연구에서 지도를 찢어 붙여 대륙이동설을 최초로 제창한 뵈게너(Alfred L. Wegener)와 같은 존재다. 사회적 무관심 속에 잊혀진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사저인 이화장 내에 보관돼 있던 10여 만 장에 달하는 이승만의 일기와 편지, 메모 등에 편린(片鱗)된 대한민국 건국의 맵을 그가 정리하고 분석해 내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아직도 분단의 원죄를 뒤집어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와 그 주변 학자들의 이승만 연구를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수정주의 좌파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친미 종속적으로 달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과 1953년에‘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근세사상 최초의 평등조약을 맺을 정도로 자주적이고 당당하게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승만이 미국을 따라잡는 국가 건설을 꿈꾸었다는 사실과 그러한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래한국>이 8·15 해방과 건국 기념일을 앞두고 40여 년간 한국 현대사와 이승만을 연구해 온 유영익 박사를 부암동 이승만연구원에서 만났다.

- 이화장에 소장되어 있던 이승만 사료를 처음으로 정리 분석함으로써 이승만과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연구의 지평을 여셨는데, 국가적으로나 학계에서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분위기에서 유독 교수님께서 이승만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해방 당시에 저는 9살이었죠. 그때 우남 이승만은‘국부(國父)’로 무조건 존경받는 대상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6·25를 겪었고 전쟁 와중에 장성들이 군수물자를 빼돌리는 바람에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국군 사병들이 대거 아사하거나 동상으로 병신이 되는 비참한 광경을 목격했죠. 그때 저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 후 서울대를 졸업하고 4·19를 겪으며 저는 완전히 反이승만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러한 생각을 가슴 속에 품은 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하버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버드-옌칭 도서관에서 우연히 청년 이승만이 저술한 <독립정신>을 발견해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탐독하면서 이승만에 대한 저의 생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당시 저는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 같은 19세기 후반의 조선 역사를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 중국과 일본의 선각자들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었죠. 그런데 1904년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 나타난 그의 개혁사상과 국제정세에 대한 식견은 중국의 쑨원이나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느꼈습니다.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역사를 공부해 보면 당시의 한국은 정말 비참하고 암울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이 한민족이 부활할 활로를 용기 있고 명쾌하게 제시한 글을 읽으며 크게 놀랐습니다.

쑨원이나 후쿠자와 유키치를 능가하는 이승만을 발견하다

   
 

- 이승만 연구로 박사논문을 쓰신 건가요?
한때 그렇게 해보려고 시도했지요. 이승만 대통령이 박사학위를 받은 프린스턴대를 방문해 학적부 등 주요 자료를 살펴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자료를 보기 위해서는 한국에 있는 미망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동의 서명서를 받아와야 했고 또한 이미 두 명의 학자가 그 자료를 열람한 바 있다는 사실을 알고 포기했습니다. 그 대신 저는 당시까지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갑오경장에 대한 논문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여전히 제게는 미스테리의 인물이며 탐구하고 싶은 대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 90년대 초 연세대 현대학연구소를 사실상 직접 창설하시고 초대 소장 직을 맡으면서 이승만 연구를 시작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1993년 말 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이신 이인수 박사 내외분이 저희 부부를 이화장으로 초청했어요. 거기서 저는 처음으로 이 대통령이 남긴 문서들을 봤어요. 기대하지 못한 행운이었죠. 특수서고에 정리되지 않은 문서들이 차곡 차곡  쌓여 있더라고요.

이인수 박사께서 보여주는 자료의 내용을 대충 살펴보니 한문으로 된 간찰(편지), 영문 편지, 사진 등 그야말로 이승만과 한국 현대사의 핵심을 파해치는 데 필수적인 국보급 자료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박사께서 제게 ‘이 서류들을 좀 정리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어요. 저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는 제가 당시 봉직하고 있던 한림대학교로 달려가 보직(대학원 원장직) 사퇴서를 냈어요. 이승만 자료연구에 전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그리고 나서 얼마 후  이화장 내에 우남사료연구소를 차리고 자료 정리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처음에는 1년여면 작업이 끝날 줄 알았는데 막상 일을 해보니 1년이란 기간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됐죠.

- 연구를 위해서는 비용도 상당히 필요했을 텐데, 어떻게 연구자금을 마련하셨나요?
이승만 대통령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간찰들이 한문으로 작성되어 있는데 웬만한 한문 실력이 없으면 그 필체를 해독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였어요. 그리고 영문으로 된 문서들을 읽어보면 이 대통령의 영어실력이 한문보다 낫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마디로, 한문과 영어에 동시에 능통하지 않으면 손대기 어려운 작업이었어요. 전문 인력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문서의 영구보존과 활용을 위한 복사 작업, 번역 작업, 출판 작업 등에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이건희 삼성 회장, 송암 최송옥 여사가 50억, 100억 상당 기금 쾌척

당시 이화장의 살림살이는 대단히 어려웠어요. 재정적 여유가 전혀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인수 박사와 함께 독지가를 찾던 중 삼성의 이건희 회장을 면담했습니다. 역시 통찰력이 있는 분이시라 그런지 우리 작업의 중요성을 단번에 간파하시고 기금지원을 쾌락하시더군요. 그러면서 그 자리에 동석하신 홍석현 신임 중앙일보 회장에게 기금 지원 업무를 맡기시더라고요. 이 무렵에 저는 이인수 박사의 소개로 부암동에 시가 100억 원 상당의 호화 저택을 소유하신 (송암)최송옥 여사를 만나 뵙고 그 분의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다행히도 그 분께서 자신의 저택을 이승만 대통령 연구를 위해 연세대에 기증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역시 망외의 행운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인수 박사님은 오랫동안 이화장에 보관해오신 이승만 문서를 연세대에 기증하시기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이화장의  이승만 대통령 문서와 그것을 정리, 연구하는데 필요한 기금 및 건물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진 후 1997년 8월에 연세대학교에 현대한국학연구소가 개설되었고 10여만 장에 달하는 이화장 문서들이 그곳으로 이관됐습니다. 그리고 저는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석좌교수 겸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부암동에 위치한 송암관에서 자료 정리 작업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삼성이 제공한 50억 원의 기금 중 일부를 연세대 총장 송자 박사 및 홍석현 회장님과의 협의를 거쳐 자료확보와 건물 보수비로 떼어놓고 나머지 기금의 이자로써 연구소를 운영했습니다. 운영예산은 연간 1억 원 내외였습니다. 작업의 양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죠. 정말 아끼고 아끼면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전문 연구원 한 사람 외에 추가 인력을 고용할 수가 없어서 저는 거의 매일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작업을 했죠. 그렇게 10년이 넘긴 어느 날 이화장에서부터 저의 문서정리 작업을 도와주시던 작고하신 김기혁 교수님이 그러시더군요. “호랑이 꼬리를 잡았다”고. 그 말씀을 들은 지 5년 여가 지난 오늘도 저는 김교수님이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합니다.

   
 

현대한국학연구소에서 ‘이승만’이름이 빠진 이유

- 금년 초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가 비로소 이승만연구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는데, 창립 당시 현대한국학연구소라는 포괄적이고 다소 애매한 이름을 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선 한 가지 오해를 바로 잡겠습니다. 금년 3월에 이승만연구원이 발족했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원은 현대한국학연구소를 개칭한 것이 아니고 그 연구소의 기금을 가지고 새로 창설한 기구입니다. 현대한국학연구소는 별도로 여전히 존재합니다. 

제가 연세대 내에 현대한국학연구소를 개설할 때 그 이름에 ‘이승만’을 첨가하지 않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연세대 내에 연구소를 개설하려면 50명 이상 교수들의 동의를 문서로 받아야 하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이승만에 대한 교수들의 시각은 대체로 부정적이었습니다. 기금이 있더라도 이승만 연구 얘기를 꺼낼 수 있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어요. 둘째, 저는 연구소를 창립하면서 스탠퍼드대의 후버연구소를 모델로 삼아 이승만 대통령에 중점을 둔 한국 현대사 연구센터로 발전시킬 계획이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승만에 직접 관계된 연구를 수년 내에 마무리 지은 다음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폭넓게 연구하는 것이 자료와 기금 그리고 건물을 연세대에 기증하신 독지가들의 취지에 부합할 뿐 아니라 학계의 수요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연세대 총장 송자 박사와 홍석현 중앙일보사 회장님도 동의하셨습니다.     

- 이승만 문서를 정리하시면서 알게 된 이승만은 어떤 인물입니까?
제일 먼저 착안한 것은 그의 인품과 재능인데, 이승만은 한마디로 탁월하게 유능했던 애국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은 여러 권의 저서와 함께 수백편의 신문논설, 외교문서 등을 남겼는데 그 수준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한국인이 남긴 글 가운데 최상급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승만이 동시대 지성인 가운데 정상급의 인물이었다는 것은 그가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미국의 일류대학(조지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 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모두 취득한 사실이 증명해 줍니다.

그는 동서양 학문에 두루 통달한 출중한 학자였고 역사와 국제정치를 파악하는 안목이 뛰어난 세계적 정치가였습니다. 아울러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확고한 소명의식을 가진 카리스마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23세의 나이에 고종황제의 폐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여 옥에 갇혔을 때 기독교에 귀의했습니다. 그는 옥중에서 영한사전을 만들면서 간수와 죄수들을 전도했습니다. 그 결과 40여명이 기독교로 개종했어요. 이승만의 투철한 소명의식과 불굴의 의지는 바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을 지키고 있다는 일종의 선민(選民)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 흔히 재주가 뛰어나면 덕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승만의 젊은 시절 성품은 어땠습니까?
이승만은 한마디로 ‘일벌레’였다고 할 수 있어요. 엄청난 노력가였고 항상 톱이 되어야 한다는 모범생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 항상 어떤 일에 몰두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는 꼼꼼히 금전출납을 기록할 정도로 매사를 주도면밀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는 항상 남보다 3배 정도의 일을 하고 그 만큼 성과를 냈습니다. 예컨대, 5년 8개월의 한성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죄수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도서실과 옥중학교를 개설, 운영했습니다. 틈틈이 영한사전도 편찬했죠. 그러면서 <독립정신>이라는 대작을 탈고했습니다. 이승만은 항상 자신은 공인(公人)이라는 의식 속에 살았어요.

그래서 책임의식이 대단히 강했습니다. 왕족의 후예인데다 어린 시절 서당과 배재학당에서 항상 우등생이었던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최고를 지향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렇게 많은 문서를 남긴 것도 그의 몸에 밴 책임의식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어요. 이렇게 모든 면에서 완벽을 기하다 보니 스스로 자기가 최고라는 의식을 갖게 되고 이러한 자부심은 남들에 대한 우월감을 자아내어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유아독존적이라는 나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승만의 인품과 폭넓은 교류 인사들

- 독립운동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이동휘, 안창호, 김규식과 같은 민족진영 인물을 끝까지 배제하려 했다는 것을 두고 독선적이라거나 배타적이라는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그 점은 매우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가 이동휘, 안창호, 김규식 등 여러 빼어난 독립운동가들과 원만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가 6대 독자로 태어나 고집이 워낙 센데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학력과 능력 등이 탁월했기 때문에 자부심 내지 자만심이 생겨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을 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 외에, 그는 정치가로서 언제나 원칙을 중요시하여 자기와 이념을 달리하는 인물들과는 타협을 거부하고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와 같이 일부 독립운동가와 정치인들에게 비타협적이고 독선적 인물로 비춰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처신한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그는 대단히 폭넓은 사교가였어요. 그는 국적, 연령,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교제를 펼쳤습니다. 그가운데 독립운동 기간에 이승만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한 친구들은 배재학당의 선후배와 동창생, 그리고 한성감옥의 옥중동지, 서울YMCA와 하와이의 한인 기독교회 교인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호놀룰루와 로스앤젤레스에 근거를 둔 대한인동지회의 멤버들이었지요.

이승만의 동업자들 가운데는 양반(兩班) 출신보다는 중인(中人)이나 상민(常民)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이승만은 또 하와이에서 한인기독교회나 대한부인 구제회 등을 통해 사진 결혼을 했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불행했던 여성들로부터도 헌신적인 지지를 받았죠. 이승만은 동시대의 어느 독립운동가들 보다 월등히 많은 외국 친구들을 포섭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언더우드, 게일 등 선교사를 비롯 맥아더, 굿펠로우와 같은 군인들이 있었고 특히 윌슨 대통령과 그의 딸 제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 노벨 문학상 수상자 펄 벅 여사,  중국의 린유탕(임어당), 필리핀의 로물로 등이 포함됩니다. 이러한 그의 폭넓은 국제적 사교력이 오스트리아 출신 여성 프란체스카와 결혼하게 되는 배경이었습니다.

- 개인 이승만이 아닌 정치 지도자로 이승만을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까?
잘 알려진 대로 이승만은 철저한 친미, 용미(用美)주의자입니다. 미국의 힘을 빌려야 한민족은 독립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죠. 이른바‘외교독립노선’입니다. 반면에 민족주의 계열은 자강(自强)을 통한 자력으로 독립을 추구했죠. 이러한 민족진영은 후에 이승만을 친미주의자로 비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지만 사실 이승만의 건국비전은 좀 더 넓고 깊었습니다. 이승만은 1919년 임시정부의 수반직을 맡은 순간부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군주제를 폐지하고 미국을 본 뜬 민주공화제 국가를 수립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새로 태어나는 조국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를 만들겠다고 공언했어요. 다시 말해 이승만이 추진한 독립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미국을 벤치마킹한 아시아 최초의 모범적인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였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이 세계 제일의 부강하고 문명한 나라가 된 비결이 바로 기독교를 숭상하는데 있다고 본 것이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신라가 한반도 통일을 이룩한 후 그 지도자들이 스스로 중국을 따라잡자는 소중화(小中華)의식 내지 모화(慕華)사상을 갖고 국력배양에 힘을 기울인 것 것과 상통합니다.

그것은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지 비굴한 사대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승만은 민족의 광복이 실현된 다음 미국을 따라잡는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민주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신생 한국이 적어도 동아시아권의 패자(覇者)가 되어 한민족에게 최대의 복락을 안겨주는 꿈을 꾼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자였던 것입니다.

남겨진 숙제

우리 사회에서 오랜 기간 묻혀오고 저평가되어 온 이승만 박사에 대한 얘기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최근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조금씩 일고 있다. <미래한국>도 그러한 움직임의 중심에 서 있다. 현대한국학연구소에서 개시한 이승만 연구의 전통은 이제 이승만연구원으로 넘어갔고 류석춘 사회학과 교수가 그 원장 직을 맡고 있다.(본지 지난호 399호 인터뷰 참조)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 사료의 정리와 우남 사상의 체계화를 통해 좌편향으로 점철돼 온 한국 현대사에 구멍을 뚫었다. 이제 그 구멍을 이용해 사회전반으로 공간을 넓혀갈 사회학자의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왠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일찍이‘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민주국가’건설을 꿈꾸었던 이승만! 중국이 사회주의 정치이념과 자본주의 경제이념을 통합하는 정신체계를 모색하고 실험해나가고 있는 지금, 일찌감치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정신적 가치체계로 기독교를 지목했던 이승만의 비전이 21세기 통일한국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는 없을까. 통일신라가 불교를 가치체계로 삼아 사회를 통합해 근 천년 동안 번영했던 것처럼 말이다.

국가 경제력 세계 15위라는 대한민국, 몸집은 어른이지만 사회적, 정신적으로는 분열과 완악함을 벗지 못하는 오늘날 우리의 문제를 우남 이승만은 일찌감치 예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또 다른 차원의 우남 이승만 연구를 기대해 본다.

인터뷰 / 김범수 편집위원  www.kimbumsoo.net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사진 / 미래한국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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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14-12-26 00:31:24
한국의 쑨원이나 후쿠자와 유키치는 독립신문 발간하신 서재필 선생이면 모를까 이승만이 한게 독재랑 국민 버리고 지 혼자 튄거 빼고 뭐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