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21세기형 간첩사건 왕재산 의 전모
[심층분석]21세기형 간첩사건 왕재산 의 전모
  • 미래한국
  • 승인 2011.09.19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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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러난 간첩단 왕재산은 지금까지 적발된 간첩들과는 달리 북한으로부터 공작금을 거의 받지 않았다. 대신 북한으로부터 종잣돈과 제품화가 가능한 원천기술을 받아 자력갱생하는 형태를 띠었다. 이는 최근 공안기관들이 우려하던 상황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미래한국>이 그 전말을 파헤쳤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북한이 남파한 간첩들은 대부분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주는 돈을 갖고 활동했다. 북한과의 교신방식도 암호 무선통신을 사용하고 지령은 단파 라디오로 수령했다. 하지만 1990년대 말부터는 달라졌다. 남북한 간의 비밀 무선통신이 크게 줄어들고 적발된 간첩들의 경우에도 공작금을 거의 받지 않았다.
실제 1998년 민혁당 사건으로 체포된 남파간첩 진모 씨는 무역업체를 운영해 돈을 벌었고, 2006년 적발된 간첩 정모 씨는 필리핀에서 열대과일 재배농장을 운영, 활동자금을 조달했다.

 

간첩이 운영하는 벤처기업의 정체

이들을 보며 공안기관들은 새로운 가설을 세웠다. 위장 탈북자나 조선족으로 위장한 뒤 국내에 들어와 일용직 노동자 등으로 활동하면서 ‘자력갱생형’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 활동하거나 번 돈을 북한으로 보내는 ‘외화벌이 간첩’들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하지만 이 가설은 자영업자나 일용직 근로자로 위장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 왕재산 처럼 콘텐츠 공급업체나 유명 아파트 주차장에 시스템을 납품하는 유망 벤처기업이 북한과 연계돼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왕재산 사건에 연루된 기업은 지원넷인더스트리(이하 지원넷)과 코리아콘텐츠랩이다. 지원넷은 왕재산 총책 김 씨가 1993년 8월 김일성을 ‘알현’한 다음 달 설립한 ‘지원개발’로 시작한 회사다. 1995년 9월에는 상호를 (주)석토공으로 바꿨다.

(주)석토공은 2002년 6월 18일 지원넷이 됐다. 2002년 8월부터 삼성테크윈과 네트워크 CCTV 대리점 계약을 맺으며 영업을 시작했다. 2007년 8월에는 ISO 9001 인증을 받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원넷은 벤처기업으로 인정받았다. 지원넷의 2006년 매출은 9억 원이었으나 2007년 11억 원, 2008년 17억 원, 2009년 22억 원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2009년 6월에는 주차장용 차량번호 자동인식 시스템(LPR)을 자체 개발했다고 공개해 주목을 끌었다. 이 LPR 시스템은 저렴한 가격과 우수한 기술로 인기를 끌었다. 광명의 모 아파트 단지는 2억8,600만 원을 주고 이 시스템을 발주하기도 했다. 2009년 8월에는 원격 산불감시 시스템을 개발해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지원넷이 개발했다는 LPR 시스템은 북한이 만든 것이었다. 원천기술을 로열티 한 푼 없이 받았으니 개발비나 생산비도 저렴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가격경쟁력으로 이어져 지원넷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코리아콘텐츠랩은 다른 형태로 활동한 ‘간첩 벤처기업’이다. 왕재산 조직은 2001년 11월 코리아콘텐츠랩을 설립한 뒤 불과 3개월 만인 2002년 2월 ‘한국현대사 통합데이터베이스’를 출시했다. 그 결과 이듬해 3월 문화산업진흥기금 지원사업체로 선정됐다. 2002년 4월에는 전자책 솔루션 ‘북 메이커 1.0’을 출시했고 2002년 9월에는 국립중앙도서관 등 주요 교육기관 18곳과 솔루션 도입 계약을 맺었다.
코리아콘텐츠랩은 2003년 2월 북한의 조선출판물수출입사와 전송권 계약을 맺으면서 본격적인 위장을 시작했다. 2003년 5월에는 전자신문 구축 솔루션인 ‘Corres 1.0’을 출시했고 9월에는 일본 조총련계 신문인 조선신보와 콘텐츠개발계약을 체결했다.

하나는 돈 벌고, 하나는 돈 쓰고

왕재산을 모태로 했던 만큼 북한 자료는 다른 곳에 비해 우위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내세워 2004년 1월에는 미 하버드대 등 7개 기관과 콘텐츠 도입계약을 체결했다. 4월에는 ‘북한학술지 통합데이터베이스-과학기술분야’를 출시하기도 했다.

코리아콘텐츠랩은 이렇게 ‘북한 콘텐츠’를 내세우면서 정부와 교육기관으로부터 인정받았다. 2004년 8월에는 도서관 등에 있는 학술저널 정보를 제공하는 ‘KESLI 국가컨소시엄’ 주관사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5년 1월에는 국회도서관 등 28개 기관과 콘텐츠 납품 계약을 맺었다. 2005년 5월 문화관광부로부터 특수자료 취급기관 인가를 받으면서 노동신문이나 세기와 더불어 등과 같은 북한 저작물을 ‘합법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됐다.

2005년 7월에는 코리아콘텐츠랩의 한국학 국제화 프로젝트가 국무총리실로부터 광복60주년기념사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국내 주요 대학·도서관과 계약을 체결한 실적을 바탕으로 2006년 11월에는 통계청 등 13개 정부 기관과 콘텐츠 도입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코리아콘텐츠랩은 북한 선전 자료를 국내 대학도서관 등에 판매한 대가로 2008년 4억2,000만 원, 2009년 3억2,000만 원, 2010년 4/4분기에는 2억2,0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왕재산 조직은 2개의 벤처기업을 운영하며 한 곳은 운영자금을 조달하고 다른 곳은 벌어들인 돈을 조총련이나 북한 매체를 지원하는 데 활용했다.
지원넷은 연간 20억 원이 넘는 매출로 조직원들이 말레이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북한 225국 공작원들과 접촉하거나 하부 조직을 구축하는 비용으로 썼다. 반면 코리아콘텐츠랩은 북한 체제 선전에 열심이었다. 공안당국에 따르면 북한 225국은 코리아콘텐츠랩을 설립했을 때부터 세세한 부분까지 ‘지도’했다고 한다. 

2002년 3월부터 225국이 코리아콘텐츠랩에 매년 하달한 ‘조직활동방향’ 등 지령문을 보면 “남한민중 속에서 백두산 3대 장군(김일성·김정숙·김정일)의 위대성 선전사업을 가장 중요한 임무로 더욱 힘 있게 밀고 나가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했고, 최근에는 “김정은 대장 동지의 권위를 옹호·고수하기 위한 도서를 출판보급하고 CD로 복사하여 인천지역당 조직성원들과 ‘민족OO(현재 북한 대남공작과의 연관성으로 검찰 수사 중)’ 등 10여 개의 진보적인 언론단체들에 보급하라”고 지령했다고 한다.

이 같은 225국의 지령에 따라 특수간행물 취급인가를 받은 코리아콘텐츠랩은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에 조선언론정보기지(KPM) 사이트를 제작해 주는가 하면 2006년 6월에는 우리나라에 KPM을 구축해 북한 선전 자료를 보급하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가 KPM을 친북사이트로 분류하고 국내 접속을 차단함에 따라 목적 달성을 못하게 되자 2007년 3월 통일부로부터 북한 관련 CD 등 특수자료 현물 반입 승인을 받아 합법적인 근거를 마련한 뒤 KPM을 운영하는 조총련 산하 조선메디아라는 기업을 통해 북한의 선전 자료를 반입, 국내외 대학도서관, 연구소 등 150여 개 기관에 배포했다.

2009년 1월부터는 우리나라에 만든 KPM을 코리아콘텐츠랩이 운영하는 <KPjournal>로 위장하고 김일성 추모자료인 ‘영생편’, 김정일 찬양자료인 ‘선군편’, 김정은 세습옹호, 주체사상 선전 자료.사진 등을 집중 게재했다.
또한 분기별 결산을 통해 매출액 중 절반을 조총련에 제공하고, 북한 노동당 역사와 김일성 일가 선전책자 등을 발간할 자금도 지원했다.

코리아콘텐츠랩은 ‘빙산의 일각’

공안당국은 왕재산의 사례를 빙산의 일각으로 보고 있다. 코리아콘텐츠랩과 같은 곳이 지난 15년 새 무수히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유행했던 벤처기업 붐 때부터 생긴 콘텐츠 기업, 포털의 뉴스 서비스 이후 생긴 2,000여 개의 인터넷 언론 중 종북적 색채와 논조를 드러내는 곳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공안당국이 왕재산과의 연루 혐의로 조사받고 있는 ‘민족○○’이라는 매체는 핵심 인사들이 기소돼 수사를 받고 있고 지금도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일부 매체에는 북한 체제 선전 자료가 ‘자유게시판’ 등에 게재돼 있다. 이 외에도 일부 커뮤니티 사이트나 포털 카페, 인터넷 언론 등에 대놓고 북한을 찬양하거나 우리나라 헌법을 부정하는 주장을 그대로 게재해 놓고선 ‘언론의 자유’를 주장한다.

공안당국은 종북세력들이 1993년 PC통신 시절부터 커뮤니티에 잠입해 ‘진지 구축’을 시도하거나 민노총 등이 ‘진보네트워크’를 만들어 웹 시대에 대응을 시작했다는 점 또한 예의 주시하고 있다.
벤처기업 뒤에서 활동한 왕재산 조직의 핵심 인물 두 명은 ‘민주화유공자’이기도 했다. 2001년 왕재산 조직을 세운 총책 김모 씨는 1985년 5월 18일 서울 노량진역 앞 횃불시위와 민정당사 투석 등 불법폭력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바 있다. 김 씨는 이후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왕재산 핵심 인물들, ‘민주화유공자’로 거액 보상 받아

 

김 씨의 후배이면서 인천지역책을 맡은 임 씨는 주사파 조직인 반미구국학생동맹 회원이었다. 당시 이 조직은 ‘민주화운동’ 보다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복을 궁극적인 목표로 잡고 있었다. 임 씨는 1987년 9월 18일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냉전이 끝난 후에도 김 씨와 임 씨는 전향하지 않았다. 특히 김 씨는 1993년 8월 김일성을 만난 뒤 조직 건설을 위해 사업체(지원개발)를 세우고 ‘출장’을 핑계로 해외를 돌았다. 그런 그가 지원넷을 설립하고 임 씨 등을 끌어들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건 2000년부터다.

이때 우리 사회는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뒤 김 씨처럼 집시법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살았던 이들이 ‘기성 정치인의 대안세력’처럼 여겨지며 주목받을 때다. 자신의 또래들이 사회 중심에 서면서 김 씨의 입지도 점차 나아졌다. 2000년 국무총리실 산하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 위원회(이하 민보상위)’가 생겨 운동권 출신들에게 거액의 보상금과 함께 명예회복을 시켜주면서 그들은 주류가 됐다.

민보상위만의 문제인가 시스템의 문제인가

이들은 2003년 이후로는 자신들이 지은 죄까지 사면 받았다. 임 씨는 2003년 7월 16일 민보상위에서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아 보상금 1,404만3,600원을 지급받고 명예회복도 됐다. 김 씨는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5월 8일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돼 421만9,000원의 보상금과 함께 명예회복을 했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정부가 간첩 공작금을 준 꼴’이라는 비판이 비등했다. 하지만 ‘민주화유공자’가 간첩이었던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6년 10월 공안당국은 소위 386세대 정당인과 기업인 등이 포함된 일심회를 적발했다. 한편 애국단체 진영은 ‘간첩에게 우리 국민 세금을 퍼다 주는 기관’이라 비판하며 민보상위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2007년 전직 공안기관 간부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0년 8월 민보상위가 출범한 뒤 2006년 9월까지 심의대상자 9,997명 중 7,888명(74%)이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았고 신체 피해자 558명에게 265억 원 보상, 생활보호대상자 1,970명에게 지원금 255억 원을 줬다고 한다.

이 전직 공안기관 간부는 “민보상위가 과거 공안사건 관련자 뿐만 아니라 대법원에서 반국가단체 또는 이적단체구성원으로 유죄판결이 확정된 자들에게까지 재심 등 최소한의 절차도 없이 ‘민주화유공자’로 판정했다”고 주장했다.

이 간부는 자료를 통해 반국가 및 이적단체로 판결 난 ▲남민전(79년) 김남주 등 42명 ▲남한조성노동당중부지역당(92년) 황인욱 ▲민혁당(92년) 박종석, 김경환 ▲구국전위(94년) 홍중희, 정화려 ▲자주대오, 영남위원회 등 이적단체구성원 39명 ▲일심회(06년 10월) 이정훈, 최기영 등을 ‘민주화 유공자’로 결정, 보상금 및 생활지원금을 지급했다고 밝혔다.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은 인혁당, 통혁당, 남조선해방전략당 등 3개 지하혁명당 사건에서 검거되지 않은 이들이 모두 모여 “나는 투철한 혁명투사로서 남조선 혁명전선의 강령과 규약에 적극 찬동하고 민족해방 전사로서 온갖 노력과 재산, 생명을 바쳐 멸사 헌신할 것”을 서약하고, 혁명자금 확보라는 명목 하에 ‘땅벌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최원석 전 동아건설회장 집 강도계획을, ‘GS작전’이라는 이름으로 금은방 강도를, ‘인민해방군 창설’을 목적으로 잠실예비군 훈련장에서 칼빈 소총과 TNT 폭약 탈취 등을 계획하는 한편 대외연락부장 안용웅을 김일성에게 보내는 충성맹세문을 지참, 밀입북 시켰던 조직이다.

민보상위는 심지어 89년 동의대 5·3 사태 당시 시위대에 억류된 전경 5명을 구하다 화재로 숨진 7명의 경찰관은 외면하고, 당시 범인으로 지목됐던 시위 참가자들을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 국민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같은 민보상위의 ‘민주화 유공자’ 선정 결과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그 사례 중 하나가 왕재산 조직 총책인 김 씨에 대한 ‘민주화 유공자’ 지정이다.

전경웅 객원기자·뉴데일리 기자 
enoch205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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