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최초의 기독교 정치가 이승만을 회고하다
한반도 최초의 기독교 정치가 이승만을 회고하다
  • 미래한국
  • 승인 2011.10.1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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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유영익 / 본지 편집고문·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창립소장

   1919년 임시 대통령에 추대된 뒤

“아시아 최초 기독교국가 건설 목표” 역설 

 

유영익 /  본지 <미래한국> 편집고문 ·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창립소장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이자 한국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인 통치자였다.

왕족 출신으로 태어난 그는 만 20세인 1895년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해 아침마다 드리는 예배에 참석해 기독교 교리를 익혔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에게 서양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 다니더라도 ‘야소교’는 절대 믿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재학 중에는 기독교에 개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배재학당 졸업 후 이승만은 서재필(徐載弼)이 이끄는 독립협회에 가입해 만민공동회의 총대 위원으로서 개혁활동을 펼치던 가운데 급진개혁가 박영효(朴泳孝) 중심의 입헌군주제 정부를 세우려는 쿠데타 음모에 가담했다가 체포돼 1899년 1월 경무청 감방에 투옥됐다.

당시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은 이후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한계 상황에서 목에 드리운 칼에 머리를 얹은 채 “오, 하나님! 저의 영혼과 우리나라를 구원해 주옵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면서 기독교에 귀의한다.

이후 이승만은 평리원(고등재판소)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한성감옥서로 이감된다. 영어의 몸이 된 그는 고종으로부터 세 차례 특사(特赦)를 받아 5년 8개월만인 1904년 8월 출옥할 때까지 옥중에서 여러 가지 큰 일을 벌였다. 북미 선교사들이 차입해준 책들로써 ‘옥중도서실’을 개설하고 ‘옥중학교’를 운영하며 <영한사전>을 편찬하고 <독립졍신>을 저술했다.

1899년 옥중에서 기독교 귀의

그 와중에 그는 영문 및 한문으로 된 성경을 정독하면서 동료 정치범들과 성경을 함께 공부하고 또 감옥을 가끔 심방하는 벙커, 언더우드, 존스 등 북미 선교사들과 예배를 드리면서 동료 죄수 및 옥리(獄吏)들에게 전도를 했다. 그 결과 40여명의 죄수와 옥리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괄목한 만한 전도의 성과를 올렸다.

이 때 이승만의 영향 하에 기독교에 개종한 인물 가운데에는 한성감옥서의 간수장 이중진(李重鎭)과 그의 동생 이중혁(李重爀)을 비롯해 나중에 연동교회, 서울YMCA, 그리고 동경의 한인YMCA 등에서 크게 활약하게 되는 이상재(李商在), 유성준(兪星濬), 이원긍(李源兢), 김린(金麟), 김정식(金貞植), 홍재기(洪在箕), 안국선(安國善) 등 여러 장로가 포함된다. 요컨대, 이승만은 국내에서 기독교에 개종한 최초의 왕족 출신 기독교인으로서 19세기 말 한국에 입국해 전도했던 어느 외국인 선교사보다 더 많은 수의 동포를 기독교로 인도하는 데 성공한 전도자였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소 안에서 1905년 여름에 저술한 <독립정신>의 결론에서, “지금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 하며 썩은 데서 싹이 나고자 할 진데, 이 교(기독교)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 세계와 상통하여도 참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오… 마땅히 이 교로써 만사에 근원을 삼아 나의 몸을 잊어버리고 남을 위하여 일하는 자가 되어야 나라를 일심으로 받들어 영미 각국과 동등이 되리라”고 갈파했다.

즉, 그는 멸망지경에 도달한 대한제국이 부흥해 미국이나 영국 같은 일등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기(國基)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성경을 읽으며 기독교 신앙을 심화하는 과정에서 한국 백성을 기독교로써 교화(敎化)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기회가 있으면 미국에 건너가 기독교 교육에 관련된 공부를 할 욕심을 품었다. 그는 한성감옥서에서 석방되자 1904년 11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동부에 위치한 조지워싱턴대에 입학했다. 도미(渡美)에 앞서 그는 서울에 있는 북미 선교사 7명으로부터 미국 대학 입학에 필요한 추천서 19통을 받아냈다.

이승만에게 추천서를 써준 선교사들은 그가 옥중에서 거둔 전도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면서 장차 한국의 기독교화 운동에 앞장 설 인물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추천서 덕분에 이승만은 조지워싱턴대의 니덤(Needham) 총장으로부터 전액 장학금까지 지급받는 조건으로 3학년에 입학을 허락받았다. 이승만은 조지워싱턴대에서 2년간 공부해 학사학위를 취득한 다음 하버드대 인문대학원에 입학해 1년간 석사과정을 이수한 후 프린스턴대 대학원의 박사과정에 입학, 그곳에서 2년간 국제법, 외교학, 서양사, 철학사 등을 전공한 끝에 1910년 7월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승만은 놀랍게도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들 명문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하는 동·서양 교육사상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쾌거를 달성한 것이다.

1910년 프린스턴大서 박사학위 받고 귀국, YMCA에서 교육활동 시작

1910년에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다음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에 돌아온 그는 서울YMCA의 ‘학감’직을 맡아 청소년들에게 성경, 서양사(특히 미국사) 및 국제법을 가르치고 또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지방 사립학교에 YMCA를 조직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자 일제 총독부는 이승만이 사실상 독립운동을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105인 사건’ 에 연루시켜 그를 체포 구금하려 했다.

이때 이승만은 서울YMCA의 필립 질렛(Gillett) 총무와 마침 한국을 방문하고 있었던 국제YMCA의 존 못트(Mott) 위원장의 개입으로 체포를 면하고 1913년 2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됐다.

미국으로 돌아간 이승만은 태평양의 고도(孤島) 하와이를 망명지로 택하고 호놀룰루에 정착해 그곳에서 약 5,000명의 한인 교포를 상대로 기독교 전도와 교육 사업을 벌였다. 그는 우선 <태평양잡지>라는 월간지를 창간해 이를 통해 한인 교포들에게 애국심과 기독교 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한인기독학원’이라는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2세 교포들을 가르치고, 또 ‘한인기독교회’라는 교회를 창립해 그 교회의 이사장 내지 선교부장으로서 사실상 목회자 역할을 담당했다. 말하자면, 그는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애국적인 기독교 교인으로 만드는 데 초점을 둔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1919년에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와 서울 등지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는 국무총리, 집정관총재, 임시대통령 등 임시정부의 최고위 지도자로 추대됐다. 그 결과 그는 하와이에서 펼치고 있던 교육과 선교 사업을 접어두고 미국 동부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됐다.

그가 바야흐로 한국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던 4월 8일경에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이 인터뷰에서 그는 “이번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의 주의는 한국에서 동양의 처음 되는 예수교국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언명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승만은 3.1운동의 주도세력이 기독교 교인이라고 믿고 자기는 앞으로 태어날 새로운 나라, 즉 ‘대한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고 공언한 셈이다.

그 후 1919년 8월에 이승만은 한성(서울)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의 직권으로 워싱턴DC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이 기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구미위원부의 ‘위원장’과 ‘위원’ 등 핵심 간부들을 모두 독실한 기독교 교인(목사 포함)가운데에서 선임했다.

그리고 그는 미국 기독교인들간에 ‘한국친우회’를 조직해 그들로부터 독립운동의 지원을 받았다. 1941년 12월 진주만 사건 이후 미·일전쟁 기간(1941~45)에 미국 정부를 상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획득하는 운동을 벌일 때 그는 워싱턴DC의 파운드리 감리교회 목사이며 상원의 원목(院牧)인 프레드릭 해리스(Harris) 목사를 중심으로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조직하고 또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애비슨(Avison)을 중심으로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발족시켜 이들 단체로 하여금 미국 정부에 로비활동을 펼치도록 했다.

 

제헌국회 개원식,  감사 기도로 시작

해방 후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에 귀국한 이승만은 11월 28일 정동예배당에서 김구(金九) 선생과 함께 예배를 드린 다음 아래와 같이 의미심장한 연설을 했다.

“나는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40년 동안 사람이 당하지 못할 갖은 고난을 받으며 감옥의 불 같은 악형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온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후 1946년 2월에 이승만은 반탁운동을 위한 대중조직으로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1946년 6월에는 남한 자율정부 수립을 추진하는 기구로서 ‘민족통일총본부’(민통)를, 그리고 1947년 7월과 8월에는 남한단정 수립과 총선거를 관철하는 기구로서 민통을 확대 개편한 ‘한국민족대표자대회’와 ‘총선대책위원회’를 각각 발족시켰다.

이들 단체 지도부에 이윤영, 배은의, 김활란 등 기독교 목사와 장로, 권사들을 발탁 기용했다. 말하자면, 해방공간에서 이승만은 남한의 기독교 교인들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운동을 펼쳤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승만은 1948년 5월 31일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제1차 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추대됐다. 그때 그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회를 개회하는 역사적 순간에 다음과 같은 말로써 이윤영(李允榮) 목사(의원)에게 식순에 없는 기도를 부탁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상에 오른 이윤영 목사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는데, 대한민국 국회 속기록 1호에 기록된 이 기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역사의 첫 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이 기도 후에 계속된 회의에서 이승만은 재석 인원 198명 중 188표로 의장에 당선됐는데 오후에 속개된 회의에서 이승만 의장은 다시 한번 아래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된다고 발언했다.

“우리가 오늘이 있게 된 데 대하여 첫째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둘째 애국 선열들의 희생적 혈전한 공적과 셋째로는 우리 우방들 특히 미국과 국련의 공의상 원조를 깊이 감  사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후 약 두 달이 지난 7월 24일 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180표의 압도적 다수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어서 7월 24일에 거행된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서를 했다. 그리고 8월 15일 개최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에서는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 더 결심하며 맹세한다”라는 취임사를 낭독했다.

이승만의 기독교 장려 정책들

이상과 같이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를 발족시킨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4월 하야할 때까지 12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했다. 이 기간에 그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조석으로 기도와 성경 읽기를 실천했으며, 서울 정동감리교회의 등록교인(1956년 이후에는 ‘명예장로’)으로서 주일 예배를 거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독실한 신자의 모범을 보인 그는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사실상 형해(形骸)화 시키면서 기독교의 교세 신장에 도움이 되는 일련의 특혜조치를 취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기독교를 장려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주요 조치를 취했다.

  (1) 국가의 주요 의식을 기독교 의식에 따라 집행하는 관례를 세웠다.
  (2) 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정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주목례(注目禮)로 바꾸었다.
  (3) 군대에 군종제도(軍宗制度)를 도입함으로써 군에 복무하는 병사들에게 기독교  전도를 할 수 있는 길을 열고, 또 감옥에 형목제도(形牧制度)를 도입해 옥중의 죄수들에게 기독교 전도의 문을 열었다.
  (4) 정부 요직에 기독교 교인들을 많이 기용하고 기독교 교인들로 하여금 국회에   많이 진출하도록 장려했다. (정부 요직의 약 40% ; 국회의원 중 약 25%)
  (5) 기독교 신문과 방송사의 설립, 기독교계 학교와 신학교의 설립, 그리고 YMCA  및 YMCA의 활동을 장려 내지 지원했다.
  (6) 기독교 선교사들을 우대하고, 6·25전쟁 당시와 그 후 외국(특히 미국)에서 들어오는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한국기독교연합회’를 통해 개별교회와 교역자들 그    리고 신학교 등에 배분토록 조처했다.
해방 전 한국 전체의 기독교 교인 수는 37만명에 불과했다. 해방 후 남한에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기독교 교인의 숫자가 조금씩 불어나 그 수가 1950년에 이르러 60만명 수준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통치기간에 교인수가 부쩍 늘어 1960년에 남한의 기독교인 수는 114만명이 됐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공적에 필적

그 후 우리나라의 기독교 교세는 이 대통령 재임 시에 굳혀진 기초를 바탕으로 날로 번창해 2005년 말 현재 교인 총수가 1,376만명(개신교인 861만명 ; 가톨릭 교인 514만명)을 헤아리게 됐다. 달리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인 통치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의 기독교 장려정책에 힘입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기독교 정권을 창출했고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기 313년에 ‘종교 자유의 칙령’을 발포함으로써 로마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데 기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공적에 필적하는 업적을 한국 종교사에서 남겼다고 말할 수 있다.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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