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와 기독교 기관들이 시대가 바뀌고 ‘노쇠’하면서 설립취지를 망각하고 ‘빛과 소금’의 사회적 역할을 잃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한편 성공적으로 세대교체를 이루고 새로운 시대와 미래를 맞이하고 있는 곳들도 있다.
1950년대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설립해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 교회와 선교사(史)의 ‘전성기’를 이끌며 한 시대를 풍미한 고(故) 김준곤 목사의 2주기가 지난 9월 29일 종로구 부암동 CCC본부에서 있었다.(81 페이지 참조) <미래한국>은 이날 박성민 CCC대표를 만나 변화하고 있는 한국 교회와 CCC의 시대적 사명과 미래비전에 대해 들어보았다.
설립자의 ‘큰 신발’
CCC 본부 인근에 위치한 민족복음화센터는 정원이 딸린 가정집을 개조해 1층은 대표 사무실 및 간사들의 회의실로, 2층은 故 김준곤 목사의 기념관으로 꾸며놓은 곳이다. 기념관에는 생전에 김 목사가 10년간 신었던 낡은 구두까지 전시돼 있었다. 한국 CCC의 창설자이자 한국 기독교사의 큰 족적을 남긴 故 김준곤 목사의 후임 자리가 박성민 목사에게는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김 목사의 셋째 사위이기도 한 그는 “김 목사님의 신발이 너무 크다”는 비유로 답했다.
“김 목사님의 신발이 크십니다. 실제로 발이 크세요. (웃음) 그 표현을 빌려 말하면 목사님의 발자취가 너무 커서 저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현재 미국 CCC도 다소 축소된 경향이 있는데 한국에 제2의 김준곤 목사님이 없듯이 그곳에도 제2의 빌 브라이트 목사님이 없기 때문이죠. 후임자가 나름 활동력 있게 사역하고 있지만 빌 브라이트 한 분이 가지고 계셨던 영향력이 다음 분에게 완전히 계승은 안 됐습니다. 물론 CCC 자체가 약화됐다기보다는 기독교의 사회적 힘이 전체적으로 예전만 못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미국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단체들의 리더십도 7,80년대에 비해 현저히 축소됐다. 과거에는 YMCA와 CCC 등이 중심이 돼 사회, 문화를 이끌어갔다면 현재는 각종 미디어와 매체가 역으로 기독교 내부에 침투하고 있다. 기독교 대형집회가 뜸해진 자리에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박 목사는 기독교 자체의 영향력 증가로 인해 상대적으로 CCC를 비롯한 기독교 단체의 역할이 축소된 것일 뿐이라고 답했다.
“1970년대 한국교회는 입지가 많이 약했습니다. 1974년에 한국의 기독교인이 약 300만 명 정도였으니까요. 약자들끼리 뭉치자는 의미에서 연합운동이 일어났었고 CCC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이 민족복음화 선언을 하며 CCC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기독교인 1천만 명 시대에 교단마다 큰 교회가 많습니다. 각 교회에서도 연합 운동보다는 교회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죠. 이렇게 기독교 자체의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CCC의 영향력이 작아졌다는 얘기일 겁니다. 1970년대 영화계가 ‘신성일이 나온 영화’와 ‘안 나온 영화’로 구분됐을 정도로 신성일의 영향력이 컸듯이 당시에 CCC는 기독교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죠. 지금은 영화계도, 기독교계도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와 뛰어난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눈에 덜 뜨일 뿐입니다.”
숫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김 목사 타계 이후 성장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해마다 회원이 5~10% 씩 증가하고 있고 국내 CCC 간사는 매해 60여 명씩 늘어 현재 풀타임 사역자가 1,250여명에 이르고 있으며 대학생 기독교 단체 중 이직률이 가장 낮다. 박 목사는 ‘끊임없는 쇄신’과 ‘복음주의에 기반한 인재 양성’이 비결이라고 답했다.
1200여 명 풀타임 간사·37만 회원 성장, 비밀은…
“비전은 처음과 같아야 하지만 전략은 바뀌어야 합니다. 인간의 속성상 초심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처음의 부르심과 방향성, 철학과 같은 라인에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은 변해도 되지만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교회와 단체의 본질이 변했다면 접고 다시 시작해야죠. 모든 조직은 인간의 생로병사처럼 상승해서 절정기를 맞은 후 하강하는 사이클이 있고 태어난 후 죽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조직의 연속성을 위해 ‘개혁’을 강조했다. “세상은 변했는데 교회는 변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과 반대급부에 서 있는 ‘맘몬’ 즉, 권력과 돈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속화되고 단상에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해지지 않고 사람이 좋아하는 ‘마사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 안티 세력이 등장하고 이단들도 득세하고 있는데 특히 캠퍼스에 많습니다. 때문에 접근과 전략법도 많이 바뀌어야 합니다. 과거 대형집회를 통해 연합 운동을 벌였다면 현재는 한국 기독교의 성장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비전은 같지만 방법론에 있어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시대에 맞는 변화’는 박 목사가 본인의 저서 <완전 소중한 7가지 비밀>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다. 제목 앞에는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꼭 알아야 할’이라는 수식어까지 달려 있다.
박 목사는 “과거에는 책을 읽는 세대라 말로 던져 놓아도 수용이 됐지만 현재는 영상세대”라며 아이패드와 앱을 이용한 설교를 제작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도 대상자에게 종이로 된 교재가 아닌 3,4분짜리 영화를 보여주며 토론하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앱으로 제작된 4영리는 변화의 첫걸음이다. 그의 10년 후 비전은 ‘젊은이들이 커피숍에서도 아이패드로 기독교 영화를 보며 토론하는 문화’다. 이를 위해 이미 3년 전부터 간사 한 명을 뉴욕에 유학 보내 전문 영화인으로 키워오고 있으며 현재는 애니메이션 팀을 만들어 기독교의 가치관이 담긴 필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김준곤 목사님이 연합 운동으로 도우셨다면 저는 어린이, 젊은이, 청년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툴을 계발하고 싶습니다. 영상뿐 아니라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타로점 까지 전도에 접목시키고 있습니다. 여러 개의 카드를 놓고서 ‘가장 마음에 드는 카드를 고르라’고 하면 상대의 마음 상태가 드러나거든요. 그 다음 ‘나머지 카드 중에서 어떤 마음이 되길 원하냐?’고 물어보면서 자연스레 간증이 시작되는 겁니다."
박성민 대표와 故김준곤 목사의 3녀인 김윤희 사모 사회 속 기독교 리더 양성이 목표
젊은 세대에 맞는 파격적인 전략을 도입하고 있지만 ‘리더 양성’이라는 목표는 변함없다. 현재까지 CCC를 거쳐 간 대학생은 대략 37만 명 정도다. 그중 ‘나사렛 장로’라는 이름의 선배들이 후배들을 물질적으로 후원하고있고 회원 중 10% 가량은 단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천명이 훌쩍 넘는 풀타임 간사가 사역자로 섬기고 있다.
“과거 김 목사님이 모든 결정권을 가졌던 1인체제에서 벗어나 현재는 핵심 리더층이 모인 리더 팀과 함께 상의한다”고 밝힌 박 목사는 ‘총재’라는 이름도 부담스러워 쓰지 않는다고 한다. 아직은 김 목사의 자리를 홀로 감당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과거 권위주의적인 문화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저희는 이 세대의 지상 명령 성취를 돕기 위해 리더들을 키워 사회로 보내는 것과 사람을 키워 사회 속에서 영적인 리더가 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1차적으로는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목표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훈련해 파송시키는 것이 목적이죠. 목회로 나가는 조직이 아니라 대학이라는 강을 건너 주는 뱃사공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박 목사는 CCC의 활동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수련회와 리더십 훈련이라고 밝혔다.
“여름수련회 참여 인원이 1만 명 정도로 대학생 단체 중 가장 대규모이고 여름, 겨울 수련회 사이에 있는 순장 수련회에도 2500명 정도 참석하고 있습니다. 대학생 기독교 단체들은 많지만 단순한 세미나 형식의 단체가 대다수고 주로 파송에만 집중하는 편입니다. 저희는 전도, 육성, 훈련, 파송이 고루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선교단체 첫 학기 가면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가장 적극적으로 전도하는 사람이 바로 CCC입니다.”
CCC의 선교 사역은 언어연수반과 선교반으로 나뉘어 파송되는 나라에 대한 준비를 밀도 있게 진행된다고 한다. 졸업을 미루고서라도 어학 연수를 다녀오는 요즘 캠퍼스의 추세에 따라 1년에 350명 정도의학생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추진 중이다. 교회와 캠퍼스를 연계해 중보기도와 전도를 후원하는 ‘캠퍼스 양육’ 운동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다만 故 김준곤 목사가 시작한 ‘북한 젖염소 보내기 운동’은 현 정부의 정책 때문에 잠시 중단된 상태다.
정치 참여 문제로 김준곤 목사와 갈등
대규모의 인원 동원이 가능한 청년단체인데다 2004년 기독당 창당 당시 김준곤 목사의 정치 참여 활동도 있었기 때문에 정계의 러브콜도 상당할 것 같다. 하지만 박 목사는 “학생들을 정치적으로 이용되게 할 수 없다”며 선을 그었다.
“대부분의 학생단체들이 ‘좌쪽일 것이다’는 생각으로 김준곤 목사님 이후 CCC나 저를 보고 좌파 성향일 거라는 기대나 우려도 하는데 저는 좌우 어느 쪽도 아니고 ‘위(we)파’입니다. 이데올로기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중요하니까요. 저희 간사들도 좌파에서 우파 성향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정치권에서 저희 학생들에 대해 관심이 많지만 저는 학생들을 정치적으로, 개인적으로 이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어 그는 2004년 당시 김 목사와 정치 견해에 관한 마찰로 6개월 간 틀어졌던 일화를 털어 놓았다.
“기독당 창설 당시 저는 ‘CCC 차원에서는 절대 도울 수 없다’고 반대했습니다. 당시 김 목사님은 ‘전국에 있는 CCC 간사가 역할을 해서 당의 중심이 돼야 한다, 학생들도 당원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제가 목사님에게 반대했던 거의 유일한 사건이었습니다. ‘이견’은 많았지만 반대는 처음이었고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했죠.”
당시 갈등이 꽤나 심각했다고 한다. 6개월간 김 목사와 대화가 중단될 정도였다. “당시 한 진보적 언론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저에게 정치 참여에 대한 의사를 물었고 저는 ‘CCC는 중립적인 입장이며 개인적으로 동참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이 내용이 언론에 나가자 김 목사님이 화가 나셔서 6개월 동안 저와 한 마디도 안 하셨습니다. 전화하면 끊어버리실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기독당이 23만 표를 얻어 참패하고 참여했던 인사들의 정치적 야심이 들어나자 목사님이 ‘박 목사가 옳았소’ 하시더군요. 목사님은 굉장히 순수한 분이십니다. 사실 당시 정치에 참여하신 것은 통일교에서 가정당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신 거였죠.
김 목사님은 일제 강점기와 6·25를 겪으신 분이기 때문에 노무현 시대의 분위기에 위기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굉장히 순수한 마음으로 참여하셨어요. 그런데 주위에 정치꾼들이 모이기 시작한 겁니다. 세상이 그걸 이용한 것이죠.”
박 목사는 최근 일고 있는 기독교계의 창당 움직임에 대해서도 부정적 입장이었다. 본질적으로 기독교의 정치 참여는 가능하지만 “적절한 시기가 아니다”는 것이다.
“기독당 아류들이 총선 때마다 들어서면서 유럽의 기독당에 비유하는데 넌센스지요. 문화적으로 많이 다르고 기독교는 이미 상당한 기득권층이지 마이너리티가 아닙니다. 안티 세력도 많은 상황에서 기독당을 만들면 ‘불교당, 이슬람당’까지 나올 수 있습니다. 차라리 기독이라는 이름을 빼고 ‘제3의 정당’으로 만든다면 가능하겠지요.”
박 목사는 장기적 안목에서 기독교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좀 더 전문성 있는 인력을 키운 후 기독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얻은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마쓰시다 정경숙’처럼 ‘크리스천 정경숙’을 만들어서 앞으로 10년을 내다보고 준비한다면 저는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의외로 인재를 키우기보다는 당장의 결과에만 연연하는데 우리 세대에 열매가 안 나오더라도 투자하면 다음 세대에는 나올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에도 ‘윌버포스’와 같은 정치인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년 김 목사님 3주기 때부터는 유성 장학금이 개설돼 인재를 뽑아 장학금을 주는 사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인터뷰 / 김범수 편집위원 www.kimbumsoo.net
조진명 기자 jadujo@naver.com
사진/이승재 기자 fotolsj@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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